핸드폰 화면을 보며 넷의 레벨을 가늠해 보고 있는데 이리스가 말했다.
“그리고 저희가 드라이어드를 많이 꺼내 놓지 않고 다니는 이유는 어떤 소문 때문이에요.”
“소문이요?”
“저흰 제법 다양한 테라리움을 돌아다녔거든요. 꽤 퍼진 이야기인데 드루이드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돌아요. 드라이어드를 사냥하고 다니는 드루이드들이 있다는 소문이요. 레어 등급 이상을 노린다거나 특정 종의 드라이어드를 노린다는 등 타깃은 정확하지 않지만, 참 괴상하죠? 드라이어드를 사냥하다니요. 그래서 대부분 모험을 자주 다니는 드루이드들은 높은 등급의 드라이어드는 되도록 꺼내지 않고, 드라이어드가 필요한 경우에는 최소한으로만 꺼내요. 타깃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정말 강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드루이드가 아닌 이상. 저희도 이렇게 몰려다녀도 몸을 사리는걸요.”
“이리스 파티는 4명이잖아요? 그런데도 무섭다고요? 넷이 합쳐서 드라이어드가 그렇게 많은데도요?”
아니 무슨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를 사냥하고 다녀? 필연적으로 전투가 발생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진짜 막무가내로 잡고 다닌다고? 잠깐, 이 게임에 PK 유저가 설치고 다니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네, 세상엔 저희보다 훨씬 강한 드루이드가 많으니까요. 저흰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불타 버린 100번대 테라리움을 다녀온 드루이드들도 있고 첫 번째 테라리움에서 거대 길드를 이끄는 드루이드도 있고, 10그루가 넘는 포레스트를 거느리는 왕을 가진 드루이드도 있죠.”
와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네. 나는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정말 강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드루이드들은 드라이어드를 숨겨요. 소문 탓도 있지만 자신이 가진 패를 남에게 다 보여 주지 않으려는 전략도 있어요. 상대가 자신이 어떤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으니까요. 드라이어드끼리 상극인 경우도 있고.”
메스키트가 전에 한 세계수에서 나고 자란 드라이어드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의문을 물으니 그런 불문율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드루이드와 영혼이 견고해진 드라이어드들은 당연하게 드루이드를 우선시하게 된단다. 게다가 별난 드루이드들이 워낙 많으니 보이지 않는 전투는 어디에서나 일어난다고 했다.
아니 세계수가 불 때문에 위험하다면서요. 드라이어드는 세계수를 불로부터 지키는 존재라면서요. 불이랑 싸우느라 바빠야지, 왜 여기저기서 PK를 뜨고 있나요? 다들 메인 퀘스트 안 하세요?
나는 슬쩍 뒤로 빠져서 메스키트에게 붙었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메스키트, 방금 들은 거 알고 있었어? 메스키트는 오래 살았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메스키트에겐 전 주인이 있었다고 했는데. 저런 일들을 겪어 봤을까?
“내 주인, 제이. 어쩌면 모두 예견된 일이었답니다. 다만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무너지고 있을 뿐.”
그 말 이후로 메스키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뜻은 대체 뭘까? 메스키트는 너무 신비로워. 베일에 꽁꽁 싸여 있어. 내가 어디까지 물어봐도 되고 어디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나도 다른 드루이드들처럼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에 넣고 다녀야 할까? 난 다 같이 다니는 여행이 좋은데. 날 지극정성으로 보호하는 드라이어드들이 이를 따라 줄 리도 없고.
그때 우리보다 한참 앞서서 걷던 노토스가 소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소나무들이 단서를 놓쳤다. 아무래도 이 일대엔 소나무가 자생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부턴 좀 더 넓게 살펴야 할 것 같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직하게 생긴 모습답게 목소리도 매우 중저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할 말만 딱 하고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 파티의 리더는 아마 이리스.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는 걸로 보였다.
“동쪽이라 해도 범위가 너무 넓은데. 지도상에 자세히 표시된 지역은 이미 길잡이들이 다녀가서 군락지가 없다는 것을 뜻하니까 모호한 곳을 봐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넓어.”
내가 가진 지도는 26번째부터 옆으로 28번째, 위로 18번 도착 전까지만 표기되어 있어서 이리스가 가진 것보다 범위가 좁고 단출했다.
지도도 업데이트해야 되는 거였네. 보통 게임처럼 내가 간 지역이면 알아서 좀 지도가 열리고 그러는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했다.
“좀 나누어져서 수색해야겠는걸.”
그러면서 이리스는 지형이 흐릿하게 그려진 두 부분을 짚었다.
“저희는 보통 이런 경우 저와 노토스, 제퍼와 헤르마가 나눠서 수색해요. 무언가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노토스의 소나무들뿐이지만 제퍼의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를 수신기처럼 사용할 수 있거든요.”
“드디어 우리 애가 나설 차례인가!”
걷는 내내 배를 붙잡고 낑낑대던 제퍼가 순식간에 기운을 차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빛 무리에 둘러싸이며, 둥글게 올려 묶은 노란 머리에 노란 꽃들이 방울방울 장식된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그녀가 제퍼를 보며 무척이나 기쁜 듯이 한 바퀴 빙글 돌자, 펑퍼짐한 낙엽색의 스커트와 잎사귀처럼 생긴 앞치마가 훅 퍼졌다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소매에 잔뜩 매달린 뾰족한 가시 같은 것들이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보였다. 저것들이 그 도깨비바늘인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소매에 달린 것들이 사방에 떨어져 내렸다.
“보고만 있지 말고 진정시켜! 자꾸 저렇게 굴면 내 옷에 다 구멍이 뚫리겠어!”
“내 사랑스러운 드라이어드가 내가 너무 좋다는데 어떻게 말려?”
“너를 때려 패서 강제로 아티팩트로 돌려보내기 전에 어떻게든 하겠지.”
“자자, 그만. 나의 향기로운 꽃이여. 멈추고 내 이야길 들어 주겠니?”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세계수….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 열매 하나라도 남김없이 전부 내어 드리겠어요.”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둘을 이리스는 정말 질렸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보는 것이 늘 저렇게 요란법석인가 보다.
“팀 내에서 제퍼의 것 중 유일하게 공유할 수 없는 드라이어드가 있다고 했죠? 저 드라이어드예요. 제퍼의 말이 아니면 절대 듣지 않아요. 완전 통제 불능에 사고뭉치예요! 제 주인이랑 아주 똑같아요! 저 드라이어드는 아주 배수망 없는 다이아 화분이에요. 쟤 때문에 새어 나간 다이아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저런 식으로 소매에 달린 열매를 사방팔방 뿌리고 다니니 쟤 손에 작살난 옷과 이불만 테라리움 하나를 다 덮고도 남을 거예요!”
너무 화기애애해진 나머지 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둘을 보며 이리스는 열분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무기를 꺼내더니 둘에게 달려가려는 것을 헤르마가 온몸을 바쳐서 막았다. 그녀는 힘이 상당히 센지 헤르마가 버거워 보였다.
나도 내 드라이어드들과 사이가 꽤나 좋다고 생각했는데 저 둘은 정말 저 세상 애정이었다.
“진정하고오…. 쟤들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보나…. 우리는 지금 길드 입단 테스트 중인디. 그냥 길드도 아니고 테라리움 전속 길드인디. 저 녀석은 글렀고 너마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헤르마가 내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미래의 길드 마스터가 어찌 보겠어?”
그의 말에 이리스가 빠른 속도로 진정하는 것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무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후…. 제퍼의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는 보시다시피 저 뾰족한 가시 같은 열매를 어느 곳에나 부착시킬 수 있는데 거리만 멀지 않다면 열매가 부착된 생물을 전부 감지해 낼 수 있어요. 서로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능력이 끊기면 다시 만나면 되는 거고, 또는 열매를 일부러 없애서 뭔가의 신호를 줄 수도 있어요.”
“우리 사랑스러운 드라이어드의 능력은 그게 끝이 아닙니다요! 제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는 무려 회복형이라 열매에도 회복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위기 시 예비 힐링으로 사용할 수 있죠!”
도깨비바늘의 힐링을 받기 위해 뾰족한 바늘에 뒤덮여 있는 드라이어드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올 뻔했다. 힐링 참 요란하게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둘로 나뉘어 움직일 건데 제이 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혹시 탐지 능력이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으신가요?”
아직 제대로 확인해 본 적 없지만 민들레 아이들도 있고 메스키트도 있었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지진을 일으키는데 나무 타입은 버틴다고 해도 풀꽃 타입은 못 버틴다고 했지. 여기엔 어린 민들레들도 있어서 메스키트의 능력은 사실상 봉인이었다.
민들레들이 탐지 능력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이리스는 고민했다. 화력과 능력만 놓고 보면 내가 따로 행동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목상 길드 입단 테스트 중이었고, 저들은 모르나 아직 18번째 테라리움 주변은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와의 일 때문에 내가 혼자 다니기 위험했다. 두 팀 중 하나와 합류하되 어느 쪽과 함께 할지 고민이 되었다.
탐지 능력이 없는 제퍼 쪽과 함께하면 민들레의 힘을 유용하게 쓸 수 있으나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와 저러는 꼴을 내내 봐야 할 것이다. 엘더가 어느새 한두 개 날아와 옷에 붙은 바늘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내는 것을 보며 더욱 안 되겠다 싶었다.
더구나 이리스가 먼저 자신들과 함께해 주기를 내게 권했다. 드라이어드 조합 때문이다.
제퍼와 헤르마에겐 방어형 드라이어드가 없으나 각각 회복형을 하나씩 데리고 있다고 했다. 이리스쪽은 노토스의 경우 지원형인 소나무만 둘이고, 이리스에겐 방어형이 하나 있으나 회복형이 없다고 했다.
내게 회복형이 있으니 만약 위기가 생긴다면 균형이 맞을 거라고. 타당하십니다! 힐러 없는 파티는 끔살이죠!
두 무리로 갈라지기 전 도깨비바늘의 열매를 하나씩 얻어 몸에 붙였다. 어느새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도깨비바늘을 덕지덕지 붙인 제퍼를 보며 이리스 쪽을 선택한 것이 매우 옳았음을 느꼈다.
제퍼는 전투를 치른 것처럼 매우 너덜너덜 해 보였다. 같이 가야만 하는 헤르마가 불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