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네가 익숙하지 않은 회복형의 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지. 공격형이었어 봐. 네가 안전핀만 뽑히면 사방으로 터지는 수류탄… 아니 얼마나 대단한데!”
그래, 혼자서 넓은 지역을 제 영역으로 만들어서 생물이 발만 디뎌도 리타이어시키는 죽음의 늪지대로 만들어 냈던 게 말이야. 상대에게 적절한 드라이어드가 없다면 괴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 너의 독 디버프인데.
그 잘난 엘더도 너 하나 상대하느라 초주검 상태까지 갔었단다. 얘가 도트 딜 박는 디버퍼가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심지어 그 디버프가 중첩도 돼. 공격형으론 아주 우수한데 회복형도 충분히 우수하게 될 수 있어서 기대감이 컸다.
“자, 봐 봐. 난 작은 세계수잖아?”
“…….”
드라이어드들이 나만 보면 맨날 작은 세계수라고 부르지. 작달막한 민들레 아이들도 단델리온에게 들어서인지 내게 작은 세계수라고 하고. 하지만 바곳은 인공적으로 태어난 드라이어드라 드루이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고 했지.
“작은 세계수는 말이야, 세계수의 축복의 힘이 내 영혼 어딘가에 박혀 있어서 세계수랑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어.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와 떨어져 오래 지낼 수 없으니 내가 그들에게 걸어 다니는 세계수가 되어 주는 거야. 내 영혼에 드라이어드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내가 세계수와 똑같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는 거래.”
사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수가 뭔지도 몰랐던 생초짜였다. 메스키트의 설명은 물론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으로 간신히 아는 척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렇게 나란히 누워서 주절주절 말을 하고 있으니 꼭 바곳만 한 조카에게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는 이모가 된 것 같다.
“너는 나라는 작은 세계수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첫 번째 투구꽃 개량종 드라이어드인 거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작은 세계수 중에 처음으로 널 가진 게 나지. 큰 세계수도 못 한 일을 이렇게 작은 세계수가 먼저 선수 친 거야.”
내가 원래 처음의 무언가 집착하긴 해도 처음, 첫 번째는 꽤 중요한 거잖아. 무언가의 시작이니까.
나는 아직도 26번째 테라리움에서 처음으로 맞췄던 장비들을 가지고 있었다. 주머니에 꾸역꾸역 넣으니까 들어가긴 하더라.
그때보다 더 좋아진 장비를 착용하고 있지만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모험가답게 장비를 마련했을 때의 벅찬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싶었다. 가게 주인이 버려 준다고 했지만 자꾸 눈에 걸려서 결국 챙겨 버렸다.
나중에 여건만 된다면 장비들을 전시해 놓고 싶다. 뉴비 제이가 처음으로 모험을 떠날 때 입었던 옷.
“이것 봐. 이제 너도 세계수에 정보가 있지? 비록 작은 세계수지만. 아니면 혹시 작아서 싫니?”
바곳은 눌린 머리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 아이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다. 바곳, 다이아 길만 걸어.
더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저 바곳을 꼭 껴안아 주었다. 바곳이 나를 특별하게 여겨 줬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특별한 만큼 나의 드라이어드인 자신도 특별하게 여길 테니까.
내 드라이어드들이 아티팩트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밤, 홀로 외따로 피어난 꽃이 한데 모여 핀 꽃밭에 꽃잎을 기웃거리는 밤. 용기를 내어 뿌리를 멀리 뻗으면 언제든지 그 곁에 닿을 수 있으니까.
비록 자신이 이미 꽃밭 안에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더라도 언젠간 주위를 둘러보면 결국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에 몸을 맡기고 고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으니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길.
***
이른 아침부터 이리스의 파티가 날 기다린다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부지런한 파티였다. 어제 작정하고 내가 준 지원금으로 쇼핑하고 다니던 것 같은데 잠도 없나.
여관 점원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바곳이 홀로 날 깨우다 실패하여 아티팩트의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 끝에 겨우 내가 일어났다.
간만에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든든하게 아침밥도 챙겨 먹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더니, 더 자고 싶다고 통곡을 하던 머리가 당이 들어가자 겨우 항복했다.
로비의 테이블에 이리스의 파티가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엔 어젠 보지 못했던 그들의 드라이어드들도 시립해 있었다.
이리스의 곁에 선 드라이어드는 여태 봤던 것들 중 가장 알록달록하고 화려해 보였다. 보통 드라이어드가 꽃잎 색과 같은 머리칼이나 방어구를 가진 반면, 이리스의 드라이어드들은 최소 5가지 이상의 색깔로 머리카락, 방어구가 반짝거렸다.
심지어 등에 꽃의 날개가 있는 드라이어드도 있었다. 오, 저 드라이어드는 포레스트의 왕인가 봐.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호화로운 여관을 잡아 주셔서 저흰 정말 잘 잤어요. 감사합니다.”
날 발견한 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상쾌해 보이는 그녀와 달리 죽어 가는 남자가 둘이나 보였다.
“아, 헤르마는 원래 아침에 약해요. 제퍼는 어제 그렇게 처먹더니 배탈이 났거든요. 밤에 고생 좀 했어요.”
“저런….”
“무식하죠? 쟤는 죽어도 먹다 죽을 녀석이에요. 못 먹고 자란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음식에 집착하는지. 저희 팀은 다른 드루이드 팀보단 그래도 상황이 나아서 끼니를 잘 거르진 않거든요. 비록 비상식량이지만.”
“살려줘….”
“상태는 저래도 오늘 의뢰는 잘 수행할 수 있어요! 못하면 때려 패서라도 잘하게 만들게요. 부디 잘 봐주세요!”
“하하… 하….”
이리스 한 성격 하는구나. 굿굿, 마음에 들어. 이제 슬슬 출발하기 전 어떻게 행동할지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때마침 내 드라이어드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티팩트에서 나오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민들레 아이들 때문에 메스키트와 엘더에게 한 명씩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리스의 파티를 만나기 위해 데이지와 바곳만 데리고 급하게 내려온 터였다.
“와… 세상에 그쪽 드라이어드들인가요…?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한눈에 알아보셨군요. 제 드라이어드들이 좀 대단하긴 하죠.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때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아침에 약하다는 헤르마가 부활이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두 눈을 비비며 구르듯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넌 그냥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게 전부여? 저 드라이어드를 봐도?”
헤르마가 가리키는 것은 메스키트였다. 우리 메스키트가 스페셜급 대단한 드라이어드긴 한데. 그는 무슨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엄청 호들갑을 떨었다.
“아, 뭐. 유니크 등급은 많이 봤잖아. 나도 하나 있는걸. 그래도 여전히 볼 때마다 신기하긴 하지만.”
“저건 단순한 유니크 등급이 아닌디.”
“뭐? 그럼 설마 스페셜급인가요? 저도 모든 드라이어드를 아는 것은 아니라…. 세상에! 진짜 스페셜 등급이에요?”
스페셜을 보는 건 처음이야! 이리스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둘의 호들갑에 로비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배를 부여잡고 죽어 있던 제퍼도 입을 쩍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여관 점원의 배려로 파티션이 있는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때마침 적절한 배려였다.
과수원에서 엘더와 같은 유니크 등급이 개화했을 땐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개화했다던 스페셜 등급 메스키트는 정말 사람들에게 연예인 같은 존재였나 보다.
스페셜 등급인 걸 알아보면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평소 메스키트와 밖을 돌아다닐 때 시선을 끌긴 했어도 이런 호들갑은 처음인데. 처음의 이리스처럼 단순 유니크라고 생각했던 걸까?
“스페셜도 단순 스페셜이 아닌디. 너 정말 기억 안 나? 어디서 본 적 있잖아. 저 드라이어드.”
“헐! 메스키트를 본 적 있어요? 아니 벨벳 메스키트 드라이어드가 또 있어요? 엘더가 메스키트는 유일무이랬는데?”
“아니, 움직이는 드라이어드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헤르마는 “맞을 텐디…. 확실히 그중 하나였는디….” 하고 중얼거리며 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리스는 좀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너희들도 기억 안 나?” 하면서 다른 일행들에게도 시선을 보냈지만 제퍼는 여전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노토스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다들 사막에서 뒈질 뻔한 기억만 남았나. 길 잘못 들어서 70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갔던 거 기억 안 나? 거기 신전형 던전에서 봤잖아. 저 드라이어드 조각상. 입구 앞에 있던 10개 정도 되는 것 중 하나였잖아.”
헐, 조각상?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메스키트 조각상이라니! 헤르마의 말에 다른 이들도 그제야 기억났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한층 더 놀란 얼굴로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왜 대체 뭔데. 뭐 때문에 그러는데? 같이 좀 놀랍시다!
저들끼리 수군거릴 때 메스키트가 흠, 하고 길게 심음을 뺐다. 왠지 그녀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저 방패랑 랜스….”
“꽤 대단해 보이는 드라이어드들 조각상이 한데 모여 있었는디….”
“헐. 메스키트 조각상이 있어요? 어디에요?”
아니 얼마나 대단하면 조각상도 있어? 대체 무슨 조각상인데? 나도 보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