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604)

바곳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후드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려 버렸다. 껍질 깐 흰 감자 같은 작은 두 손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민들레 아이들은 같은 회복형이란 말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민들레나가 바곳의 왼쪽으로 기어가더니 자신들의 사이에 바곳을 두었다. 그리고 둘은 바곳에게 힘을 써 보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데이지2는 공격형이라 기술 시범을 좀처럼 하질 못하니 답답했다면서.

“너도 단델리온 왕처럼 그런 대단한 힘을 쓸 수 있어?”

“보여 줘, 보여 줘. 보고 베끼기만 할게.”

둘은 잘 티격태격하면서도 합이 꽤 잘 맞았다.

바곳은 양쪽에서 짱알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휙 돌리며 당황했다. 후드 아래의 안경 안 보랏빛 눈망울이 내게 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아직 울 기세도 안 보이고 해서 내버려 두었다. 바곳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무기인 기다란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바곳이 회복 기술을 쓰는 것은 한두 번 본 적 있었다. 엘더의 힘을 따라 해 보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바곳은 엘더처럼 힐을 때려 넣는 정석 힐러가 아니라 디버프 등에 특화된 서브 힐러였다. 미미하게 힐을 해 보려는 것보다 어서 빨리 자신의 특성을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바곳이 힘을 사용하니 옅게 보랏빛을 띠는 빛과 은은한 산약초 향이 방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미약하지만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었다. 비록 조촐한 기술이긴 해도 이젠 곧잘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기특했다. 잘한 일에는 칭찬을 해 줘야지. 손뼉이라도 쳐 주려고 할 때였다.

“그것밖에 못 해?”

“우리가 더 잘해!”

하면서 둘이 요술 지팡이 같은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민들레 홀씨를 닮은 하얗고 둥근 끝부분에서 바곳보다는 좀 더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산을 오를 때 코끝을 파고드는 것과 같은 눅눅한 풀내음이 바곳의 산약초 향을 덮어 가기 시작했다.

아기 새의 솜털 같은 연약한 꽃씨들이 방 안을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그것들 중 하나가 피부에 닿자 그 부위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민들레 아이들의 회복의 힘 역시 엘더의 것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보아하니 꽃씨를 뿜을 줄은 아는 것 같고. 잘 응용하면 단델리온 왕처럼 정찰용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 너의 버팀목이 될게.”

“쓰승이라고 불러. 한 수 가르쳐 줘야겠어.”

“맞아, 싸부라고 불러. 내가 얘보다 더 잘 가르쳐.”

바곳이 어깨를 움츠리며 스태프를 끌어안았다.

바곳은 애초에 공격형에 익숙한 아이라 엘더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회복의 힘이 조잡할 수밖에…. 우리 바곳 큰일 났네. 빨리 힘을 일깨우지 않으면 갓 태어난 민들레 아이들한테 얕잡아 보이겠어.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아까부터 심드렁하게 앉아서 아티팩트 가구만 만지작거리는 엘더를 바라보았다. 넌 무려 유니크 등급인 힐러인데 뭐 조언해 줄 건 없니? 엘더는 전혀 이곳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다행인가? 저 주둥이는 애들한테 해로울 테니까.

“꽃씨를 다룰 수 있으니 잘됐어요. 아까 그 꽃씨가 누구누구에게 닿았는지 느꼈나요?”

메스키트가 민들레 아이들의 코끝을 툭 치며 물었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던 것을 멈추더니 눈을 감고 곤히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렇고 아직 아이들인데 대단하네. 단델리온이 손수 키운 아이들이라 그런가. 바곳은 아무리 제약이 있긴 해도 태어난 건 저 아이들보다 더 오래됐을 건데. 애들 처음 봤을 땐 정말 작았잖아. 그런데도 뭔가 배우는 게 빠른 것 같은데.”

아이들을 내게 보낼 때, 묘목인 아이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며 우려하던 단델리온이 떠올랐다. 그래서 뭔가 기술다운 기술을 쓰는 걸 보게 되는 것도 좀 더 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미미하긴 해도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 말에 메스키트는 고민하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내게 다가왔다.

“아마 둘 중 하나만 있거나 둘을 멀리 떨어뜨려 놨다면 지금의 힘을 반도 쓰지 못할 거랍니다.”

“엇, 정말?”

“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두 아이는 지금 ‘연리지’ 상태랍니다.”

“연리지?”

들어본 적 있는 단어였다. 연리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잘 등장하는 단어였다. 두 나무의 뿌리가 한 데 엉켜 자라는 것이었던가?

“종이 같은 둘 이상의 드라이어드가 서로 연이 깊고 서로에게 친밀도가 높은 상태면, 가지를 한 데 얽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연리지랍니다. 둘의 힘을 더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더 강해지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제이.”

“포레스트랑 비슷한 건가?”

“후후, 조금 다른 개념이랍니다. 포레스트는 왕 한 그루에게 영혼을 위탁하여 왕이 더 강해지게 만들고 서로 떨어져 있어도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연리지는 둘 이상이 함께 필드에 나와 있어야 하며, 필드에 나와 있는 만큼만 서로가 더 강해지는 것이랍니다.”

오… 중복 덱이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한다는 원리인가? 보통 카드 게임은 중복 출전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는데, 생각해 보면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내 마음대로 드라이어드를 꺼낼 수 있으니 중복 출전이 가능하겠네.

만약 내가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다섯 출전시키면 각자 5배 보너스를 받는다는 거겠지?

“그럼 데이지도 둘 다 나와 있으면 더 강해지나?”

“데이지 아이는 이미 영혼을 위탁받아서 같이 필드에 나와도 소용이 없답니다. 다만 제이의 아티팩트 안에 있을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함께하게 된다면 좀 더 든든함을 느끼긴 하죠. 왕이 함께하니까.”

데이지2는 우리 데이지의 진화 재료로… 써 버려서 안 된다는 거군.

“민들레들은 육성법을 좀 더 고민해 봐야겠는걸. 하나에게 힘을 몰빵해 줘서 단델리온처럼 특수 기술도 열어서 키울지… 아니면 둘 다 똑같이 성장시켜서 같이 강해지게 만들지…. 연리지란 개념을 듣고 나니까 어려워지네.”

“내 주인, 제이. 뿌리를 서로 얽어 거대한 숲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이게 만들지, 가지를 한데 얽어 서로를 지지하는 튼튼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게 만들지는 제이의 선택이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드라이어드는 강해지고 제이를 더 든든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그거면 된 거예요.”

메스키트가 웃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전 메스키트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든든한데요…. 막말로 메스키트 둘이서 연리지 효과를 받으면… 세상 무서울 덱이 없다는 거잖아? 대단해.

그때 민들레 아이들이 드디어 느낌을 알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잘됐네요. 그럼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훈련해 봐요.” 하면서 메스키트가 민들레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앗!”

가는 길에 그녀가 기습적으로 데이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데이지는 아슬하게 침대 밑에 발등을 집어넣어 멈출 수 있었다.

엘더까지 앉아 있던 침대의 한쪽이 번쩍 들린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힘을 준 메스키트에게 놀라워해야 할지, 침대 무게를 한쪽 발등만으로 견뎌 내는 데이지에게 놀라워해야 할지….

“갑자기 뭐야?”

봉변을 당한 엘더만 휘청이며 굴러떨어지는 아티팩트 가구들을 붙잡고 있었다.

“묘목 아이들도 저렇게 훈련하는데 데이지 아이도 노력해야겠죠?”

“저도 더 강해질 거예요!”

다들 의욕이 산 건 좋지만 밤새 저러면 난 잠은 어떻게 자나 싶었다. 그러나 잘 시간이 되자 다들 훈련을 명목으로 내 아티팩트로 쏙 들어가 버렸다. 확실히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는 손목에 달려 있긴 해도 안은 정말 넓었지. 28번째 테라리움으로도 갈 수 있으니까.

엘더마저도 아티팩트 가구를 설치하겠다고 홀연히 가 버렸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내가 밖에 있을 때보다 여관 방 안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길바닥에서 잘 땐 하나둘 돌아가며 보초를 섰었는데 지금은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바곳은 어울리지 못하고 내 침대 옆에 함께 누워 있는 중이었다.

연금탑에서 만들어 낸 금지된 식물 출생이란 것에 아이가 많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엘더는 원래 생각 없이 말하는 애고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이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민들레 아이들이 바곳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바곳은 내 옷을 붙잡으며 버텼다.

아이는 내 옆 베개를 차지하고 누웠다. 나는 바곳의 안경을 벗겨 침대 옆 탁자에 놓고 힘 있게 끌어안아 주었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일까?

바곳은 커다란 곰인형처럼 적당히 폭 알맞게 안겨 있었다. 등을 토닥거리며 모처럼 맞이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난 네가 어떻게 태어났든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방식으로든 넌 내게 온 소중한 드라이어드니까.”

바곳은 말이 없었다. 아아… 이거 아직 우리 사이 친밀도가 부족해서인가요. 어떻게 해야 친밀도를 높일 수 있죠. 공략 팁 좀 주세요. 쥐며느리처럼 푹 웅그린 고개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자. 너의 모체의 정보가 단지 세계수에 없다는 게 큰 문제인 거잖아.”

손을 열심히 꼼지락거리며 웅크린 쥐며느리 모드인 바곳을 파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애라 그런가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은 기분이야.

마침내 두 손으로 찹쌀떡처럼 몽글한 두 볼을 찾아내 잡을 수 있었다. 영차, 하며 끌어 올리니 올망졸망한 청보라색 눈이 드디어 나와 마주해 온다. 등불에 반사되는 아이의 눈 안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주눅 들면 안 되지. 넌 무려 이 위대하신 제이의 드라이어드라고. 난 어디 가서 내 드라이어드가 꿀리는 거 절대 못 봐.”

“죄송해요. 저는 묘목들보다 잘하지도 못하고….”

아이의 높다란 미성에 ‘죄송’이 ‘쩨성’으로 들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잘 참았다.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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