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604)

그리고 이상한 꿈을 꿨다. 그건 개꿈이었다. 왜 개꿈인 줄 바로 알 수 있었냐면.

“왕이시여, 이제 신랑감을 구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상한 궁전의 왕좌에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왜 여깄어…?”

별안간 벨라돈나가 내 옆에서 내 드라이어드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라돈나뿐만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드라이어드들이 내 옆에 시립하고 있었다. 물론 반대편엔 내 드라이어드들도 있었다.

수정구를 들고 있던 블루 멜로우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의 자리는… 외로운 길… 어서 빨리 주군을 보필할… 배우자를 찾으시지요….”

“나는 아직 연애할 생각 없는데. 지금은 모험이나 더 하고 싶….”

“훌륭한 후보가 마침 이곳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라 하라!”

“아니 난 생각이 없다니까?”

“왕이시여. 소문으로는 아주 잘생긴 자라고 합니다.”

“함 보자, 보자! 들어와라!”

결혼은 물론 연애할 생각은 아직 없는데 잘생겼다고 하니 한번 봐 줄 마음은 들었다. 그런데 커다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어이없게도 시들링이었다. 쟨 또 왜 여깄어? 아니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여기 있으니 쟤도 나타날 법한가?

시들링은 무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어이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갑자기 벨라돈나가 혀를 찼다.

“쯧쯧, 잘생기긴 했어도 우리 왕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구나. 우리 왕의 옆엔 제일의 미라는 엘더 플라워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어디 너의 얼굴이 먹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갑자기 옆에 서 있던 엘더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몸을 붙여 왔다. 아이 잘생겼다. 그래, 난 좀 화려한 얼굴이 취향이지. 아니, 근데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얼굴이 뒤처져도 소문으론 돈이 아주 많은 자라고 합니다. 의뢰로 돈을 쓸어 모아서 지참금으로 많은 돈을 왕께 헌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엔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로즈우드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벨라돈나가 종 모양 꽃이 대롱대롱 매달린 기다란 지팡이를 흔들며 그에게 성을 냈다.

“어림도 없다! 어디 돈이 많은 자로 우리 왕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우리 왕은 돈으로 나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아주 별 볼 일 없는 후보로군요! 쫓아내 버려요!”

“지금 당장 쫓아내 버리겠습니다!”

연분홍색 머리의 칼미아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자 가시 돋친 몽둥이를 든 카돈이 옳다구나 뛰쳐나갔다.

“야, 너희 드루이드인데 그렇게 막 대해도 돼?”

“기다리거라! 아직 그가 왕의 취향에 맞는 매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왕께선 키도 크고 몸매도 적당히 근육이 잡힌 나이스 보디의 남자를 좋아하니 어디 어필해 보거라!”

“야이… 미친!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러자 벨라돈나가 취향이야 뻔한 거 아니냐는 표정을 했다. 남들은 물론 내 드라이어드 앞에서 내 취향이 노골적으로 까발려지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자리에서 우뚝 일어서는 시들링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벨라돈나의 말에 주섬주섬 두텁고 견고한 은색 갑옷을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인마! 내 꿈에서 뭐해!”

층층이 겹쳐진 건틀릿을 벗어 내니 하얀 셔츠의 소매가 보였다. 그러고는 나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핏줄이 돋은, 터질 것 같은 팔뚝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반응이 있으시다. 더 해 보거라!”

“후후, 내 주인, 제이. 저런 걸 좋아하셨나요?”

갑자기 텁, 하고 흑색 건틀릿이 내 양팔을 붙들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저도 제이 취향 아닌가요?”

“메스키트는 갑자기 왜 그래?”

메스키트가 내 앞에 서자 천장의 조명을 가려 거대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다 망했다! 네놈은 멋있는 걸로도 메스키트에게 밀려났으니 쓸모가 없는 녀석이다!”

“쫓아내자! 다음을 기약해라, 약한 놈아!”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그에게 돌진하는 것이 보였다.

“왕이시여! 다음 놈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제법 얼굴이 화려한 자라고 하니 그놈은 봐 줄 만할 것입니다!”

벨라돈나가 시들링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며 내게 말했다. 다음 놈은 또 누구야?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메스키트가 날 채근했다.

“어서요, 가야죠.”

“어딜?”

“식사하러 가셔야죠. 정말 일으키기 힘드네요.”

신랑 후보를 찾다가 갑자기 밥을 먹는다고? 메스키트가 내 양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자 속수무책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쭉 끌려갔다.

“언제까지 잘 거예요?”

그 말에 확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꿈에서처럼 내 양팔은 메스키트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메스키트의 얼굴이 있었다. 나른하게 웃는 태양을 담은 호박색 눈을 마주하니 하마터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잘 잤어요?”

“꿈… 꿈에… 꿈….”

그제야 내가 얼마나 해괴망측한 꿈을 꿨는지 떠올라서 갑자기 쪽팔림이 밀려와 어디로든 숨고 싶어졌다.

***

비몽사몽으로 잘도 음식을 주워 먹었다. 아주 상다리 부러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푸짐한 만찬이 마련되었지만 자꾸만 어처구니없던 꿈 내용이 떠올라 잘 먹다가도 포크를 아작 씹었다. 치아가 얼얼했다.

일어나자마자 아티팩트에 태양의 신전을 설치하고 메스키트에게 부탁을 하려 했지만 이 꿈 내용이 내 뇌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무리였다.

후식으로 나온 작은 빵을 냠냠 먹으며 부른 배를 두드렸다. 배는 불러도 잘도 들어간다. 원래 후식 배는 따로 있는 법이다.

“드루이드들과 무언가 찾으려고 했다던데 그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이?”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메스키트가 말했다. 아, 그거?

“18번째 테라리움 근처에 가막살나무 군락지가 있대. 그 군락지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도 찾은 사람이 없나 봐. 그래서 다들 전설처럼 여기고 있길래 내가 찾아보고 싶어졌어! 함께 길드를 만들기로 했던 드루이드들이 동참할 거야. 메스키트가 한번 만나 보고 싶댔지?”

“가막살나무라… 왜 그 나무를 찾고 있는 거죠?”

“읽었던 바론 불에 잘 타지 않는 방화수라서 생울타리로도 쓰인다는데 그것 때문인가 봐.”

“음, 그 나무들은 확실히 그런 점으로 인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죠.”

조용히 듣고 있는 엘더의 표정이 묘했다. 왜 그래?

“그쪽 나무들은 우리들이랑 별로 안 친해. 하나같이 답답하고 꽉 막힌 성격에 재미도 없거든.”

“엘더 꼬맹아, 친하지 않은 것은 너뿐이란다. 난 그 나무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성품이 곧고 바르며 조용히 수행에만 매진하는 미덕이, 아직 덜 자란 너에겐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가 보구나.”

“난 다 자랐어.”

새로운 식물의 드라이어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메스키트와 엘더가 신기했다.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도 세계수에 있을 때 만난 거야?”

“세계수엔 이 세상의 모든 식물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답니다. 가막살나무의 경우 비교적 수가 많은 편이라 자주 마주쳤지요.”

“메스키트는 엄청 오래 살아서 모르는 드라이어드가 없어. 저렇게 인간들이 따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엘더가 바곳을 가리켰다. 얘는 왜 또 가만히 있는 애를 건들고 그러니. 바곳의 아픈 부분을 찌르자 아이가 침울해지는 것이 보였다.

“에궁, 또 저 얼굴만 잘난 못된 드라이어드가 심술을 부렸어? 매번 얼굴만 믿고 자기만 생각한다니까. 너무 침울해지지 말렴. 그래도 넌 세계수가 손수 데리고 가라고 열매까지 내어 준 애니까. 어떻게 보면 유일무이한 드라이어드가 되는 거겠네?”

“유일무이는 메스키트지. 하나밖에 없으니까. 저건 태어난 방법이 잘못되었잖아.”

야, 이 얼굴만 예쁜 놈아! 꼭 애 기를 그렇게 죽여야만 했냐! 예쁜 얼굴과 지옥의 주둥이를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아!

“그래서 제이, 어떻게 군락지를 찾으실 거죠? 어쩌면 정말 찾기 힘들 수도 있답니다. 이미 없어졌을 확률도 높아요.”

“헉! 없어졌다니?”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를 만나기란 무척 드문 일인 건 알고 계시죠? 군락지는 드라이어드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곳이긴 해도 애초에 드라이어드가 자연적으로 태어날 확률은 매우 낮은 법. 만약 아무도 태어나지 못해 군락지를 지킬 드라이어드가 없다면 이미 불에 당해 군락지가 없어졌을 확률도 있답니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럼 다른 사람들이 여태 군락지를 못 찾은 이유가 그런 이유였을까? 이번엔 다른 드루이드들은 어떻게 의뢰를 수행하나 너무 궁금했거든.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좀 보고 싶었고. 뭐 정 안 된다면 나에겐 탐지 능력이 좋은 메스키트가 있잖아! 그 뿌리 내려서 찾는 거! 그걸 믿어 볼까 했는데.”

“그건 좀 위험할걸. 메스키트가 넓은 범위를 다 뒤지려면 엄청난 대지진이 올 거야.”

“아….”

그러고보니 메스키트가 뿌리를 내려 드라이어드를 찾을 땐 지진이 일어났었다. 18번째 주변이라고만 알고 있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땅을 다 파고 다녔다간….

“제이, 만약 아직 군락지가 존재한다면 거기에 대해선 의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메스키트가 내 손목의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가리켰다.

“잠깐 들려서 보니 민들레 아이들이 나름대로 성장했더군요. 그 정도 성장이면 어쩌면 그걸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거라니?”

메스키트의 말을 들으며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데이지2와 민들레 아이들이 잔해를 열심히 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 잠은 자고 일하니? 아, 드라이어드는 잠을 잘 필요가 없댔지. 그래도 그렇게 매일 밤낮없이 일하면 내 마음이 아픈데….

“민들레 군락지의 왕이 사용하던 기술을 기억하시나요?”

“음….”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날 메스키트가 웃으며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단델리온을 말하는 거면 안개를 군락지 주변에 둘러 그곳을 숨겼지. 파나케이아도 만들고. 또 뭘 했더라.

“이 꽃씨들은 침입자를 감별해 내기 위해 정찰용으로 보낸 거예요.”

“드루이드님이신 줄 알았다면 경고의 꽃씨가 아닌 환영의 꽃잎을 보냈을 겁니다.”

데이지의 빨간 머리에 고양이 솜털처럼 엉겨 붙던 하얀 꽃씨가 떠올랐다.

“아! 민들레 꽃씨를 뿌렸던 것 같은데! 그걸로 불 위치도 알려 주고.”

“그래요, 역시 기억하고 있었군요. 아직 묘목인 아이들이지만 왕의 곁에서 자랐던 아이들이기에 성장한 지금이라면 흉내 내 볼 수 있을 거랍니다.”

다시 아티팩트 안을 들여다봤다. 좀 전까지 잔해들을 치우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어느새 벤치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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