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604)

뒤에 시립한 퍼스널 쇼퍼의 눈치를 살짝 보고 허리를 낮춰 아이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긴데 좀 좋은 거 나오는 상자는 어떤 건지 알 수 없을까요? 슬쩍 골라 주면 안 될까나요? 이거 분명 내가 까면 젤 낮은 등급 나올 거 같은데.”

아직 상점 구역이었다. 행운의 최상위권인 엘더를 불러내 직접 고르게 하면 좋겠지만 소환을 하려면 이 구역을 나가야만 했다. 차선책으로 데이지에게 걸어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애가 한 행운 하긴 해도 소소한 편에 속했다.

“음, 저도 잘 몰라서….”

아이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소곤소곤했다.

“과자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제가 저기 간식 코너에서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게 해 줄게요.”

아이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내가 뭐 하는가 궁금한지 데이지와 바곳이 쪼르르 몸을 붙여 왔다.

“상자가 다 똑같이 생겨서….”

아이는 정말로 내 제안이 너무 끌리는데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좌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게 해 줄게요. 여기 테라리움에 있는 내내 마음대로 먹게 해 줄게요.”

“잠시만요!”

아이는 장신구 박스를 꺼냈던 탁자 밑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곤 내게 슬쩍 손짓했다. 아이가 들추고 있는 테이블보 안엔 작고 검은 상자가 켜켜이 놓여 있었다.

아이를 따라 쭈그려 앉았다. 퍼스널 쇼퍼가 있는 방향을 데이지와 바곳이 막고 서 있으니 완전 범죄가 가능한 곳이 되었다.

“사실 똑같이 생겨도 무게는 조금 다르거든요.”

그러면서 상자들을 하나하나 흔들어 보더니 두 개를 내게 쥐여 주었다. 오, 정말 다른데? 랜덤 박스들은 죄다 무게가 똑같던데.

“안에 들어 있는 건 전부 반지인데 보석이 다르긴 해도 무게는 거의 다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가끔씩 이렇게 차이가 나는 상자가 있어요. 그리고 살짝 무거운 느낌이 드는 상자를 줬을 때, 상자를 연 드루이드님들의 표정이 밝았어요!”

“오오오….”

“아마 비싼 장신구는 더 잘 보관해야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똑똑하다!”

아이의 도움을 받아 그중 제일 무거운 상자를 두 개를 골라냈다. 원칙상 무조건 하나만 열 수 있어서 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첫 번째는 무조건 최상급, 두 번째는 내 드라이어드에 맞는 전투 보너스 보석! 메스키트와 데이지를 위한 4월의 보석이라든가 엘더를 위한 6, 7월의 보석, 바곳을 위한 9월의 보석이 목표였다.

“데이지, 하나만 골라 볼래?”

그래도 안전빵으로 간다. 조금이나마 데이지의 행운을 보탠다!

데이지는 고민하더니 내 왼손에 있던 상자를 골랐다. 좋아, 너로 결정했다!

“혹시라도 좋은 게 안 나오면….”

“에이, 안 나와도 사 줄게요. 기특해서라도 간식 코너 다 털어 줄게요!”

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였다. 제발 좋은 게 나와서 맘 편히 과자를 먹게 해 주세요! 작게 중얼거렸지만 다 들렸다.

조심히 락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확실히 좋은 것이 들어 있는지 뚜껑이 무겁게 열렸다. 예감이 좋았다. 장신구를 싸고 있는 하얀 천이 보였다. 천을 조심이 거둬 내 보았다.

“어?”

제일 먼저 보석의 빛이 눈에 띄었는데, 그곳에는 예상치 못했던 색깔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록색…?”

내가 아는 초록색 보석은 딱 하나였다. 에메랄드. 가만, 에메랄드는 몇 월 보석이지? 일단 우리 애들 보석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아니 어쩌면 엘더가 6, 7월을 포용하니까 혹시 6월이…?

“와, 행복의 에메랄드네요!”

“에메랄드는 5월의 태양을 담고 있습니다. 제이 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던 아이가 어느새 까치발을 하고 내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퍼스널 쇼퍼가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곧바로 답해 주었다. 낑낑대며 반지를 보려는 아이와 달리 그녀는 큰 키로 슬쩍 이곳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석을 알아차렸다.

잘 살펴보면 그녀의 시야각에 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데이지와 바곳이 작달막해 방호벽을 서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나와 아이의 작당 모의를 알면서도 눈감아준 것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리스펙트. 고개를 꾸벅 숙이자 “제이 님을 위한 것, 그것이 제 일이니까요.” 하면서 여상히 말했다. 멋있다!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보았다. 새의 은색 발톱이 네모난 에메랄드의 모서리를 꼭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들반들한 오면체가 열대 바다를 조각 내 담은 것처럼 청량하게 반짝거렸다. 보석도 꽤나 상등품인 것 같고 주위를 감싼 은의 세공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아름다운 이 반지는 색 조합을 비롯하여 여러모로 엘더를 떠오르게 했다. 더군다나 엘더의 눈은 에메랄드와 꼭 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닮으면 뭐하랴. 엘더는 물론 해당이 없었고 내 드라이어드 중 5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너무 아쉬웠다.

“우와! 자세히 보니까 상급 장신구네요! 최상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거니까….”

혹시 아까 골랐던 두 개 중 다른 하나에 최상급이 들어 있었으려나?

아니 어쩌면 최상급은 없고 상급만 있으면서 구라 쳤을지도 모른다. 확률이 낮아서 아무도 못 뽑았다고 우길 수도 있으니까. 0.0001%라도 확률은 확률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 속이 쓰려서 안 됐다.

“뭐, 어쨌든 상급도 좋은 거 맞지! 내가 처음 걸 열었다면 제일 낮은 품질의 반지를 얻었을 테니까! 약속대로 과자 마음껏 먹게 해 줄게요.”

아이가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꼭 데이지를 보는 것처럼 귀여웠다. 다만 아이는 데이지보다 좀 더 명랑했다. 아이가 종종 찾는 것 같던 간식 코너에 선불을 슬쩍 찔러 주었다. 물론 주머니에서 나온 다이아만으로.

알고 보니 아이는 그곳 간식 코너 주인장의 딸이었다. 종종 이런 퀘스트 도우미 역할을 하며 심심할 땐 부모에게 놀러 가서 얻어먹던 것 같았다.

다만 너무 자주 군것질을 해 보수로 받은 돈만큼만 주고 있었는데 내가 보수의 몇십 배나 되는 돈을 찔러 넣는 바람에 앞으론 수시로 찾아가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간식 코너 주인이 한사코 거절하던 것을 아이를 열심히 칭찬하며 다이아를 넘겼다. 자식 칭찬에 버틸 부모가 어디 있으랴. 거기 주인이 정말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내 다이아를 받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쇼핑 스토어를 나왔다. 상급 에메랄드 반지는 당장 쓸 일은 없어도 나중에 내가 어떤 드라이어드를 또 영입할지 모를 일이므로 주머니 속에 고이 모셔 두었다.

몸이 고단하여 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퍼스널 쇼퍼는 날 행정 관리원이 마련해 준 VIP 여관까지 바래다주고 작별했다. 오늘 쇼핑 스토어에서 종일 날 맞춰 주고 엘더를 위한 아티팩트 가구도 잔뜩 추천해 주셔서 따로 뭐라도 너무 해 드리고 싶었지만 완강히 거절하셨다.

오히려 내가 만족스러운 쇼핑을 한 것 같아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에 만족한다고, 무언가를 받는 것은 월급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올 때처럼 갈 때도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셨다.

서비스 만족도 평가라도 문자로 왔으면 좋겠다. 별점 5개 꽉꽉 채워서 드릴 텐데….

여관은 로비부터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안내받은 방 또한 괜히 VIP 전용 여관이 아닌지 천장도 아주 높고 방도 굉장히 넓었다. 원한다면 호텔 룸서비스처럼 식사를 방 안에 마련해 준다는 말에 흔쾌히 요청했다.

본래 상점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내려고 했지만 날이 어둑해지니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 마음을 접었다.

내 방에 입실하고 나서야 메스키트와 엘더를 불렀다. 엘더는 나오자마자 때맞춰 여관으로 배송된 아티팩트 가구들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왜 진작 아티팩트로 전달해 주지 않았냐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잡생각을 많이 채워서 난쟁이들의 사고를 머릿속에서 묻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

식사도 가져다주겠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져서 편히 있기로 했다. 로브와 장비를 훌훌 벗어 던지자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 내가 입고 있었던 맨투맨 티셔츠 차림이 되었다.

비록 바지는 덧입을 수 없어 26번째 테라리움에 버리고 온 터라 가죽 하의를 입고 있었어야 했지만, 이렇게 간편한 차림이 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머리도 풀고 마구 손으로 빗었다. 종일 머리를 묶고 있으니 정수리가 당겼다. 가벼워진 몸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니 메스키트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내 주인, 제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요?”

“여기 쇼핑 스토어가 엄청 대단했어. 아마 엘더가 따라왔으면 걜 거기 두고 와야 했을지도 몰라. 넓기도 하고 상점도 많고 구경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겪어서 좀 피곤해.”

아티팩트 가구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엘더가 흘깃 이쪽을 노려봤다. 새초롬한 얼굴을 하곤 내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너랑 떨어질 리가 없잖아.”

피곤하다는 내 말을 들어서인지 하얗게 빛을 내는 엘더의 큰 손이 이마에 와 닿았다. 엘더 플라워의 달콤한 향이 코끝에 감겼다.

“아냐… 정말 네가 못 봐서 그래. 분명 네가 봤다면 두고 가라고 억지 부렸….”

침대가 푹신해 몸이 안정되고 좋은 기운이 머리에 퍼지니 잠이 솔솔 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드루이드 파티랑 뭘 좀 찾기로 했는데….”

“그래요, 그 이야긴 제이가 자고 일어나서 듣기로 해요. 벌써 두 눈이 다 감겼네요.”

메스키트가 웃으며 침대의 이불을 끌어와 푹 덮어 주었다. 메스키트 역시 침대에 걸터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갑옷 무게에 침대가 출렁, 하고 푹 꺼졌다. 그 바람에 그녀 쪽으로 기우뚱 몸이 돌아갔다. 팔뚝에 토닥토닥 조심스러운 손길이 와 닿았다.

“식사 시켜 뒀는데….”

“오면 깨워 줄게요. 그때까지 자고 있어요.”

“나 못 깨우면 어떡해?”

“후후, 제이의 식사를 거르게 할 순 없으니 열심히 깨워 볼게요.”

아, 그럼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 내일 이리스의 파티와 만나기로 했으니 미리 이야기를 꼭 해놔야 해. 그리고 아직 메스키트가 태양의 신전에서 워킹하는 모습도 못 봤어.

엘더를 아티팩트 밖으로 꺼내 놨으니 이젠 볼 수 있는데. “뭐야, 왜 메스키트 하우스만 있어. 내 건?” 하는 엘더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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