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604)

하지만 내가 카드를 내밀 일은 없었다. 내 얼굴은 이미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냥 얼굴만 내밀어도 공방 직원들이 내 등급을 아는 수준이 되었다.

다행히 내가 만 단위의 다이아를 선결제한 것은 소수만 알고 있는 듯했다. 나머진 그저 날 팁 나오거나 하루 수당 채워 주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듯 온갖 서비스를 해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룸에 드나드는 점원들도 꽤 됐고 퍼스널 쇼퍼가 추천 리스트를 꾸려 왔을 땐 굳이 그 코너의 담당 직원까지 함께 들어오곤 했다.

퍼스널 쇼퍼의 리스트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하나라도 더 끼워 팔기 위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거나 급기야 데이지와 바곳에게 어필도 하기 시작했다.

“드라이어드 여러분 여길 보세요. 아티팩트 필드 안에 더 아름답고 화려한 가구를 두고 싶지 않나요? 피로감을 더 빨리 줄여 주는 특별 상품이랍니다.”

데이지는 상자에 다이아를 부어 혼자 쇼핑을 보냈을 때도 알파벳 토피어리 하나 달랑 사 올 정도로 물욕이 없는 애라 그들의 설명에 그저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바곳은 애써 자신의 흥미를 끌기 위해 말을 꺼내는 사람을 피해 등을 돌리고 앉아 랜덤 박스만 사부작거리며 까고 있었다.

퍼스널 쇼퍼는 엘더의 취향을 참 잘 꿰뚫어 보았다. 이런 것도 황금으로 씌울 수 있어? 싶은 물건까지 잘 찾아오셨다.

단순 금뿐만 아니라 하우스를 구매한 경우 그곳 창을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으로 갈아 끼울 수 있는 제품이라든가 벽면을 반짝거리는 에메랄드 문양으로 도배할 수 있는 제품 등, 까마귀처럼 반짝거리고 비싸 보이는 것에 환장하는 엘더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 주셨다.

난 아직 하우스라곤 28번째 테라리움에 데이지2 자라고 넣어준 오두막밖에 없었다. 구매 요청을 걸어 둔 거래소나 이런 랜덤 박스에서 엘더를 위한 하우스가 나오길 빌어야 했다.

26번째 테라리움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공방들은 좀처럼 하우스를 단일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았다.

메스키트에게 딱 어울릴 법한 태양의 신전 하우스를 구매한 것도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하우스는 무조건 랜덤 박스에서. 지독하다, 지독해.

가장 기대하고 있던 합성 연금 의뢰소는 좀처럼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다. 구매했던 재료 가구들을 죄다 연금에 때려 박았는데 성공 확률도 낮을뿐더러 희귀한 건 물량 자체도 적고, 어떤 것은 몇 번의 합성을 반복해야 얻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합성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도 내 운이 바닥이라 그런가….

내가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던 황금 사과나무는 묘목 단계에서 벌써 8번 터졌다고 했다. 실패하면 재료 두 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 다이아가 허공에서 터지고 있었다. 우리 난쟁이들이 좋아하는 소리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내가 실시간으로 거래소에 다이아를 엄청 풀어 버린 덕에 대박을 노리고 랜덤 박스를 까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물량 자체가 없던 상품들도 점차 얼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양의 신전을 빨리 아티팩트에 설치하고 메스키트에게 워킹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주저되었다.

아티팩트에 있는 드라이어드들은 내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받는다. 난쟁이들이 벌인 만 단위 다이아 사태를 엘더가 알면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공방 안 데려가 줬다고 찡찡댈 게 몇 배의 징징거림으로 바뀔지 겁이 났다.

랜덤 박스 까는 것도 이제 좀 지루해지고 있었다. 랜덤 박스를 원 없이 까 보는 건 이미 해 봐서 특별할 것이 없었다.

26번째처럼 거래소라도 없었으면 나올 때까지 까는 것이 투쟁 본능을 일깨웠을 텐데. 지금은 누가 까면 나온 거 사야지 하는 마음에, 한쪽에 잔뜩 쌓인 상자를 내버려 두고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데이지가 랜덤 박스를 까다 말고 내가 코 박은 쿠션 옆으로 고양이처럼 머리를 들이밀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울타리가 아니라 징검다리 돌만 오지게 나오고 있어서 슬프기도 했다. 데이지가 종종 신기한 것을 뽑긴 했지만 여기 박스는 징검다리 돌 박스다. 다이아를 주고 내가 돌을 샀어.

박스 깐 것 중 합성 의뢰에 해당하는 품목이 있으면 골라 가는 직원 옆에서 퍼스널 쇼퍼가 내게 물었다.

“나머지는 필요 없으신 건가요?”

“화분 거치대나 분리대도 예쁘긴 한데 추천 리스트에 있는 거나 합성으로 나오는 가구들 다 집어넣으려면 아티팩트에 자리가 없어서요. 이것들은 어떻게 처분하지…. 특히 이 돌들…. 형형색색의 돌들….”

무려 개당 15다이아짜리 돌들. 생각해 보니 겨우 판판한 돌을 아티팩트 가구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아? 한데 모아서 화단에 던져 놓으면 누가 아티팩트 가구라고 생각하겠어? 응? 그리고 무슨 돌에 보너스 효과도 붙어 있어.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퍼스널 쇼퍼는 내게 거래소에 이미 돌이 잔뜩 등록되어 있어서 팔리진 않을 거고 공방 내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다.

오케이, 쓰레기통에 버려야 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놔두면 알아서 하겠지. 설마 랜덤 박스에 재활용하는 거 아냐…?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합성 연금 의뢰소에 앉아 있던 세 명 중 하나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폭삭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고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제가… 제가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여기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나무입니다!”

“와!”

황금 사과에서 묘목의 벽을 뚫고 드디어 나무가 됐구나! 나무가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과들이 터져 나가 하늘의 별이 되었겠지만 비로소 나무가 된 거야!

연금술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게 건넨 작은 아티팩트 가구를 바라보았다. 내가 우연히 황금 사과 거래가를 봤을 때 하나에 100다이아였으니 황금 사과나무는 태양의 신전보다 훨씬 비쌀 것이 분명했다.

이 작은 것이 누군가의 빚을 해결하는 금액이 되고 조직을 배반하는 금액이 된다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아티팩트 가구는 엔드 콘텐츠가 분명했다. 어쩌면 황금 사과를 나무로 만들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사람은 혹시 나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 열린 사과는 물론 목질과 이파리도 노랗게 반짝거렸다. 오래된 고목처럼 굵은 나무줄기와 풍성하게 그물같이 뻗은 가지, 노란 물감을 빈틈없이 점점이 찍은 것처럼 수북하게 붙들려 있는 나뭇잎과 그 사이사이로 탐스럽게 열린 둥근 사과.

정말 신화 속의 신들의 황금 사과나무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땅땅.

황금 사과나무에 붙은 보너스 효과를 살폈다.

모체가 하늘색 꽃잎을 가진 드라이어드의 경우 추위를 더 잘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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