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604)

접수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상자를 든 사람이 다가왔다. 다이아 지불 상자였다.

이용 요금에 구매 금액의 수수료까지. 하나에 다이아 15개인 랜덤 박스를 구매하기도 전에 천 단위의 다이아가 거래소 때문에 빠져나가게 되었다.

구매 금액 자체는 물건을 올린 사람에게 가지만 내가 워낙 물건을 비싸게 사서 수수료가 상당했다. 솔직히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내 지금 모습을 봤다면 엄청 욕했을 것 같았다.

거래소의 물품을 구매하거나 홍보 서비스 재등록 등으로 안내원이 다이아 박스를 들고 자주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스에 다이아를 털어 넣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지만 매번 그러기엔 좀 귀찮은 부분이 있었다. 우리 난쟁이들 때문이다.

분명 오면서 상점을 틈틈이 들르며 핸드폰을 깨워 난쟁이들을 자주 불렀었다. 애들이 내 주머니에 장난식으로 던져 놓은 다이아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난쟁이들이 좀 심통이 나 있었다.

처음엔 자주 불러 주니까 좋아했다.

문제는 빈도가 아니라 그때마다 가져가는 다이아 양이 우리 난쟁이들의 성에 도저히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만에 가득 찬 난쟁이들을 다시 깨워야 될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인님! 더 가져가세요!]

[주인님! 더 안 가져가시면 삽으로 다이아를 주인님께 퍼 드리는 일을 맡은 난쟁이들이 일자리를 잃어요!]

본래 광산에서 다이아를 캐서 수레나 창고로 옮기는 것이 전부였던 난쟁이들이 언제부턴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세계수 빨대와 더불어 한 번씩 엘더가 터뜨려 주는 다이아 잭 팟 등 소비처가 늘어나니 안의 모든 난쟁이들이 직업을 갖게 됐다고 했지.

난 단순히 광산에 더 많이 캐러 가는 줄 알았더니 내가 입혀 놓은 코스튬은 어디 가고 안경을 낀 난쟁이나 가운과 학사모를 낀 난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무한 다이아>를 플레이할 때 엔딩이 난쟁이들의 다이아 제국 건설이긴 했고 그 안에서 난쟁이들이 각자 일하며 먹고 자고 살아가긴 했을 텐데, 화면에 보이는 광부 난쟁이들이나 가끔 응원 버프를 쓸 때 응원 도구를 흔드는 치어리더 난쟁이들 외에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무한 다이아>는 난쟁이들이 다이아를 캐는 것이 전부였던 아주 단순한 게임이었다.

서비스 종료를 앞두고 있던 게임이라 내가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코스튬이 출시됐을 리는 만무한데.

쟤들은 대체 뭔가 싶어서 보자 저마다 수레를 개조하는 난쟁이요, 그 수레를 설계하는 난쟁이요, 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내가 난쟁이들 기준으로 소량을 요구할 때나 삽으로 퍼 주는 역할이 그런 류였다.

심지어 내게 삽으로 다이아를 퍼 주는 자리는 아주 경쟁이 치열해서 우수한 난쟁이들만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했다.

[주인님! 전 괜찮아요! 안 불러 주셔도 열심히 삽으로 퍼서 드리고 있어요!]

내 주머니에 다이아를 던져 넣는 애들이 쟤들이었다. 몸집이 작아서 삽도 작은데 여럿이서 휙휙 퍼서 던지니 가끔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한 주먹씩 만져지곤 했다.

[주인님! 여기 이 호스를 보세요! 주인님이 너무 쓰지 않으셔서 저희가 미끄럼틀로 쓰고 있어요!]

작은 난쟁이들이 자기 몸집보다 몇십 배나 큰 호스 통로 안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꼭 워터 슬라이드를 보는 기분이었다. 호스는 엘더가 다이아 비를 내릴 때 외엔 좀처럼 쓸 일도 없을 건데….

[주인님! 큰일 났어요! 미끄럼틀을 타던 난쟁이 하나가 다이아 창고에 빠졌어요!]

[주인님! 빨리 주인님이 다이아를 많이 빼내 주시지 않으면 난쟁이가 죽어요!]

[주인님! 다이아를 써서 난쟁이를 살려 주세요!]

“그렇게 많이 필요 없다니까….”

[주인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주인님! 주인님이 너무 다이아를 적게 가져가니까 창고가 꽉 차서 더 위험해요!]

심통을 부리며 툴툴대더니 난쟁이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 같았다. 그 방향이 좀 어이없었지만.

화면을 내려 지하에 있는 다이아 창고를 보니 높게 쌓인 다이아 더미 위를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난쟁이 하나가 보였다. 내가 볼 줄 몰랐는지 황급히 자세를 바꿔 두 팔을 흔들며 SOS를 쳤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네. 거기 벽에 사다리도 있잖아. 게다가 이젠 내가 다이아를 많이 쓰는 것이 자비가 될 정도야?

“알겠어. 그럼 호스 3초만 열어.”

와아, 하는 엄청난 함성 소리에 직감했어야 했다. 다이아 상자 위에 핸드폰을 엎었는데 갑자기 상자를 들고 있던 점원이 아래로 휘청거렸다. 상자 크기는 작아도 보기와는 다르게 많은 다이아 양을 수용할 수 있는데 무게가 느껴질 정도면 대체 얼마나? 다급하게 핸드폰을 껐다.

황급히 다이아 상자에 표시된 숫자를 봤다가 크게 일 쳤다는 생각이 들어 눈앞이 깜깜해졌다. 기껏해야 몇천 다이아 쏟아 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만 단위를 쏟아 냈다. 앞자리가 다르긴 해도 만 단위면 엘더가 다이아 비를 쓸 때나 사용하는 단위였다.

일단 두 손으로 상자의 숫자를 가렸다. 누가 보면 큰일이었다. 내 옆에 있던 데이지가 날 따라서 작은 손을 내 위로 겹쳤다. 바곳도 질세라 팔을 쭉 뻗었다. 얘들은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이… 이게 대체…?”

“쉿, 조용히 하세요.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상자를 가리며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벽 쪽으로 점원을 끌고 갔다. 데이지 엄호해! 키가 큰 퍼스널 쇼퍼도 시야 방해용으로 함께 끌고 갔다.

“앞으로 귀찮게 제게 일일이 결제하러 오시지 말고 여기 드린 다이아에서 차감해 주세요. 나름대로 10번대 테라리움의 대형 공방이라 이 정도의 서비스는 마련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선결제 시스템은 흔한 건 줄 알았는데. 전 오롯이 쇼핑에만 집중하고 싶다고요. 얼마냐고 묻는 과정도 자존심 상해요!”

“미리 살피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이 님.”

갑자기 퍼스널 쇼퍼가 내게 사과를 했다. 급하게 지어낸 말과 함께 당황함을 숨기려 연기 좀 했을 뿐인데 너무 죄송해졌다.

순간적으로 미용실 선결제 시스템이 생각났기에 망정이지, 이 정도 금액은 도저히 실수로 때려 부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나 말고 상자의 다이아 숫자를 본 사람이 없으니, 퍼스널 쇼퍼가 이를 봤다면….

“다음에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금액을 확인하는 귀찮은 과정 없이 고르고 그냥 가지고 나가고 싶네요. 이게 몸에 배어 있어서 좀 답답했어요.”

이건 좀 티 났으려나. 습관이긴 개뿔, 가격표 다 보고 1+1 할인까지 챙겨 보던 난데. 결제 문자 오면 확인도 한다고!

“제이 님께서 쇼핑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겠습니다. 또한 제이 님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앞으로 귀중한 고객분들을 위한 서비스를 더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아까 리스트에 있던 황금 사과나무 말이에요. 그런 류를 좋아하는 우리 애가 하나 있는데 같은 느낌으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노멀 필드고 나무형이에요. 회복형이고요! 아, 물론 가격은 상관 않는 거 알죠? 미리 결제는 끝냈으니까.”

퍼스널 쇼퍼가 상자를 못 보도록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금방 추천 리스트를 만들어오겠다며 사라졌다.

“느낌 알죠? 그리고 구매한 것들은 전부 합성 연금 의뢰소로 보내 주세요. 의뢰비도 당연히….”

“네, 고객님께서 이용하시려는 서비스를 최적으로 즐기실 수 있도록 불필요한 과정을 절대 진행하지 않는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디 좀 편히 있을 곳은 없으려나. 사람이 너무 많아 복잡한데. 좀 조용한 곳이 좋겠어요. 뭐 내가 편한 것에 비용이 든다면 어쩔 수 없고….”

점원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내 말에 힌트를 받아 아예 내가 받는 모든 서비스에 팁을 부과해서 돈을 소비시킬 것으로 보였다. 그래야만 했다. 우리 난쟁이들은 도를 넘었다. 이 금액을 가볍게 소진시킬 수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 위험했다.

거래소의 자투리 요금만으로도 VIP가 한 번에 8등급이 되었다. 연금 의뢰 비용으로 9등급이 되고 VIP룸과 음료, 간식거리, 개인 거래 게시판 마련 등으로 10등급이 되었다.

내 룸으로 내 등급에서 구매할 수 있는 최대 수량의 랜덤 박스들을 주문하자 순식간에 12등급을 우습게 찍었다. 목표했던 10등급을 아주 우습게 제쳐 버렸다.

차가 식기 전에 VIP 꼭대기의 머리를 따고 왔소. 그런데 이쯤 되면 나 말고 이런 등급을 달성한 사람이 있긴 한가 싶었다.

VIP룸은 급작스럽게 마련된 것인지 도저히 그런 용도로 보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사실 이렇게 안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아티팩트 가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더 구경하는 것이 취향이었지만, 거래소에 폭탄을 터뜨린 게 누구냐, 시세 조작이냐, 어떤 사재기꾼인지 정말 갑부인지 얼굴이 보고 싶다는 수군거림이 커진 통에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적은 곳에 오자 바곳도 불안해하던 것을 멈췄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널브러져 막 구매한 태양의 신전을 이리저리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것도 점원이 직접 룸으로 가져와 준 것이었다. 분명 운반 비용도 빼지 않았을까 싶다.

내 옆엔 VIP 12등급을 증명하는 금색 카드가 놓여 있었다. 데이지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리움의 가드너 등급이 올라갈 때처럼 특별한 알림이 온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때가 될 때마다 점원이 명함만 한 사이즈의 금색 카드를 가져오며 VIP 등급이 오르셨다고 안내해 줄 뿐이었다. 이 카드를 단순히 명패처럼 내밀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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