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주인에게 총알을 만드는 연금술사에 대한 소개서를 받았다.
연금탑의 안내 데스크에 소개서를 전달하면 그를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정갈한 편지 봉투에 담긴 소개서를 주머니에 넣고 머리를 굴렸다.
완료해야 될 퀘스트가 산더미가 된 기분이다. 주위에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 있는 NPC면 죄다 클릭해서 서브 퀘스트로 퀘스트 창을 꽉꽉 채워 플레이하는 유저가 나였다. 연금술사는 언제 만나러 가지…?
총을 수납할 수 있는 허리띠도 구매하여 착용하니 이제야 좀 폼이 나는 것 같았다. 위기 시 빠르게 총을 꺼내는 연습을 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그게 얼마짜린데….” 하면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상점 주인의 눈을 애써 피했다.
아 좀 쪽팔리네…. 머릿속은 분명 액션 영화였는데 육체가 다큐멘터리였다. 그것도 나무늘보를 주제로 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음에 방문해야 할 상점 리스트를 살폈다. 식당이 딸린 식료품점과 고대하던 아티팩트 공방이 남았다. 식료품점은 이미 비상식량을 잔뜩 마련해뒀기에 안내판만 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리다운 요리를 먹고 싶긴 했지만 VIP 전용이나 되는 여관에서 묵을 예정이니 그곳에서 나올, 일반 식당과는 차원이 다를 만찬이 기대되었다.
무기 상점을 나오니 포션 상점들이 몰려 있는 방향으로 뛰고 있는 이리스와 그녀의 일행들이 보였다.
“야, 이 돼지 새끼야! 그걸 다 퍼먹는 걸 기다리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잖아! 오늘 내로 필요한 걸 다 구매하려면 시간이 빠듯한데!”
“너 초콜릿 분수 본 적 있어? 딸기 위에 생크림이 삼단으로 올라가는 사치를 누려 본 적 있어? 앞으로 살면서 그런 걸 먹어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기회가 있을 때 다 먹어야지!”
“배탈 날 거 같은디….”
“그러는 너도 단 건 싫다더니 녹차 케이크는 한 판 다 먹었잖아!”
“나는 내 앞에 있는 것만 먹고 끝냈지, 너는 레모네이드도 3잔이나 리필해서 퍼마셨잖아! 그게 다 들어갈 자리가 있긴 해?”
“맛이 나는 음료를 마셔 본 게 얼마 만인데!”
여전히 시끄러운 파티였다. 이렇게 동선이 자주 겹치는 걸 보면 저 파티와 나는 참 인연이 있어도 뭔가 있는가 싶었다. 용케 날 발견한 과묵한 남자, 노토스가 슬쩍 눈인사를 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 했으나 그는 급기야 무기를 꺼내 들며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남녀의 등을 쭉 밀며 다급하게 멀어졌다. 그 행동에 왠지 민망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식료품점을 방문하여 안내판만 간단히 전해 주고 나오니 퍼스널 쇼퍼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18번째 테라리움에서 자체적으로 공수하는 품질 좋은 재료로 실력 있는 요리사가 다양한 요리를 할 줄 안다며 식료품점의 특별 서비스를 아주 열심히 설명해 준 것이 무색해진 것이다.
나는 그저 대충 감탄만 하고 휙 나와 버렸었다. 이전 상점들에서 보여 준 지갑 스킬을 이곳에서도 보여 줄 것이라 내심 기대한 건가?
후후, 실망하지 마시라.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상점에서 펼쳐질 것이니!
“혹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의견을 주시면 최대한 반영할….”
“인테리어 깔끔하고 좋았어요! 주인분도 친절하셔서 제가 기분이 나빠서 구매를 안 한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딱히 살 것이 없었을 뿐이에요. 비상식량도 이전 테라리움에서 이미 맛있는 걸로 잔뜩 사둬서. 재료를 사도 제가 뭐 요리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도 쓰레기거든요.”
나는 우리 엄마가 인정한 요리 똥손이었다. 가리는 게 없으시고 가끔 유통 기한 지난 우유도 엄마가 주면 잘 드시는 아빠마저도 내가 한 떡볶이는 매운 거 싫어한다며 한 숟갈 뜨고 마셨다. 해장국에 청양고추를 몇 개나 잘라 넣어 드시는 분이 말이야….
너는 나중에 요리 잘하는 남자랑 결혼해서 네가 밖에 나가 돈 벌어 오라는 엄마의 말에 옳다구나 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은 잘 계시려나? 워낙 개인주의가 심한 집안이라 MT 간다는 말 없이 3박 4일을 사라져도 문자 한 통 없던 분들이셨는데.
내가 게임을 즐긴 지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분들이어도 실종 신고를 하시진 않았을까…?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고 싶으냐?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의 난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만큼은 통학도 없고 과제랑 시험도 없고 졸업 논문도 없고 토익 공부도 없고 모의 면접도 없고 취업 걱정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실컷 놀 수 있다고 했으면서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수능 끝나고 딱 한두 달만 자유다. 마냥 노는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지.
지금 나는 많은 드라이어드를 모으고 레벨 업도 하고 다이아도 펑펑 쓰면서 드라이어드를 키우는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치트 키나 다름없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니 항상 나만 바라보고 있는 데이지가 날 따라서 예쁘게 웃었다.
그래, 우리 데이지도 있고. 빨간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니 귓가에 탐스럽게 자리한 빨간 데이지 꽃이 화사하게 흔들렸다.
잡생각을 끝내니 안내 퀘스트의 마지막 목적지인 아티팩트 공방에 도착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유명 장난감 회사의 본사라도 방문한 것처럼 거대한 건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잘한 잡몹 같은 상점들을 지나 드디어 보스 레이드에 입장하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과 양옆에 시립한 점원들, 바글거리는 사람들과 천장까지 진열된 상품들에 엘더의 좌절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곳은 엘더의 꿈의 낙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26번째 테라리움의 그곳처럼 드라이어드들의 자생지에 따라 각각의 아티팩트 가구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코너 한 칸이 여태 방문한 상점 한 개 수준이었다.
투명한 유리구에 포장되어 있는 아티팩트 가구들이 저마다 자기를 사 가라며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데저트 필드 코너에서 딱 키 높이 정도 크기의 모형으로 설치된 하얀 신전을 발견했다.
데저트 필드 드라이어드를 위한 최고의 하우스! 당신의 소중한 드라이어드에게 필드의 가디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세요! ‘태양의 신전’ 한정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