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604)

“잠시만요. 길드 설립은 좀 더 고민해 봐도 될까요?”

때마침 주문했던 디저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점원 세 명이 카트를 끌어다 메뉴판 전체를 가져다 달란 주문을 충실히 이행해 주고 있었다. VVIP쯤 되니까 메뉴판 전체를 달라는 주문도 그냥 군말 없이 들어주는구나.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퍼스널 쇼퍼도 끌고 특별 입구를 통해 전용 룸으로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이 정도 주문이 아니면 체면을 구겼을지도 모르겠네.

인간 제희, 상식이 없지, 다이아가 없냐. 내 손엔 한도 무한대의 블랙 카드가 있다. 좀 더 다이아를 축내야 한다.

굳이 핸드폰에서 다이아를 꺼내지 않아도 내 난쟁이들이 장난식으로 핸드폰 밖으로 다이아를 던져 놓을 때가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딱딱하고 각진 것들이 잔뜩 만져지는데, 내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다이아의 9할은 난쟁이들이 항의 식으로 핸드폰 밖으로 다이아를 던져 놓은 것이다. 마치 핸드폰에 구멍 뚫린 것처럼 다이아가 줄줄 샜다.

그것들을 한 움큼 쥐어 잔돈 꺼내듯 탁자 위로 쏟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정도 다이아로 사람들이 놀라는 건 익숙하다.

내가 겁나는 것은 여기서 어느 정도를 더 꺼내야 사람들의 얼굴색이 변할 정도인지 그 선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아직 이 정돈 다이아 부자가 허세를 떨 수준인 걸 이젠 감 잡았다.

꺼낸 다이아들을 손가락으로 나눠 정확히 삼등분했다. 이것들을 고스란히 점원들에게 팁으로 주었다. 센스 넘치는 부자. 외국에서도 팁 주고 그러잖아? 미드에선 팁으로 수표도 주고 그러던데.

“한 10분 뒤에 다시 오셔서 여기 분들이 한입이라도 드신 디저트와 음료들을 또 가져다주시겠어요?”

서비스의 질이 달라졌다. 원래도 친절했던 점원들은 친절 스킬을 리미트 해제한 것 같았다. 서로 기분 좋고 얼마나 좋아? 윈윈.

갑자기 포크 부딪히는 소리마저 뚝 끊겼다. 드루이드 파티를 바라보니 이리스와 제퍼가 급히 등을 꼿꼿하게 세우는 것이 보였다.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에 내 주위엔 퍼스널 쇼퍼와 드라이어드들이 앉아 있고 반대쪽에 드루이드 파티가 앉아 있었다. 이 구도와 긴장감… 이 자리가 갑자기 대기업 면접 자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에이, 편하게 앉으셔도 돼요! 디저트는 마음껏 드시고 더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이건 앞으로 잘해 보자는 제 작은 성의일 뿐이에욥!”

“이게 작은 성의면….”

테이블을 가득 메운 음식들은 맛은 어떨지 몰라도 형형색색 겉만 봐도 구미가 당길 정도로 예뻤다. 그중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디저트는 겨우 컵케이크뿐이었지만…. 솔직히 디저트보단 요리를 먹고 싶어서 손이 많이 가진 않았다.

나는 음료만 홀짝이며 아티팩트를 착용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차분히 고민했다.

내게 필요한 드라이어드는 우선적으로 길드에 대한 보편적인 상식을 잡아 줄 메스키트와 조작법에 조언을 줄 데이지2였다.

핸드폰을 보는 척 슬쩍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메스키트 헬프! 밖으로 불러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곳 역시 상가 구역이라 덩치가 큰 드라이어드들은 금지였다.

메스키트와 엘더는 아티팩트 구역에 없었다. 정확히는 마이 룸 구역에 없었다. 둘은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었다. 메스키트는 양팔에 민들레 아이 둘을 대롱대롱 달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이 못 본 사이 많이 자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좋겠다…! 나만 빼고 다들 28번째 테라리움에 놀러 가 있다니!”

잔해더미 속에서 멀쩡한 벤치에 앉아 있던 엘더가 버럭 화를 냈다. 그 벤치는 26번째 테라리움 아티팩트 공방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난 여기보다 거기에 더 가고 싶었어!”

찡찡. 저거 아직도 저렇게 삐진 상태네. 엘더는 고개를 팩 돌려 버렸지만 슬쩍 눈짓으로 여길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도 예쁜 게 귀엽게 군다.

“메스키트. 길드에 대해 알아?”

“우리 드라이어드들이 모여서 포레스트를 형성한다면 드루이드들은 모여서 길드를 형성하는 정도론 알고 있답니다.”

길드는 역시 내가 아는 상식선의 그 길드가 맞았다.

“오늘 만난 드루이드 4명이 길드를 만들자고 하는데 메스키트는 어떤 거 같아?”

내 드라이어드들이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에 있는 한 내 생각이 모두 그들에게 공유된다. 내가 보고 겪은 드루이드들과 길드를 만들려는 이유를 떠올리자 메스키트가 민들레 아이들을 내려놓고 가볍게 생각에 잠겼다.

“전 행정 관리원님도 28번째 테라리움 전속 길드를 운영하셨어요. 정확히는 길드 마스터는 아니셨고… 행정 관리원님의 보좌관이 길드 마스터를 맡았던 것 같은데… 아마 관리가 테라리움 행정만으로도 벅차시니까 그러셨던 것 같아요. 길드에 중요 의뢰도 많이 넣고 치안 담당도 시켰던 걸로 기억해요.”

“스케어크로우였나? 28번째 테라리움에 전속 길드가 있었어?”

“네, 그런데 테라리움의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유지가 힘들어서 해산시켰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유지했다면 많은 도움이 됐을 텐데…. 불이 침입했을 때도 다른 테라리움에 도움을 요청하기에도….”

내가 게임 내에서 길드를 들어갈 땐 항상 서로의 유대감이 끈끈했던 길드만 겪어서 그런지 좀 이상했다.

가장 어려울 때 해산하여 갈 길 가 버렸다니. 정말 돈으로만 유지되는 그런 형식상 길드였나? 그래도 길드인데 정말 힘들 땐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것 같은데….

“길드를 설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여기 28번째 테라리움에 세우실 거죠? 그리고 테라리움 전속 길드로 하실 생각이신거구요? 그럼 일단 길드 구성원들이 테라리움의 유사 거주자들이 됩니다. 다른 테라리움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28번째 테라리움에도 거주하고 있는 이중 거주 자격을 갖게 됩니다. 다만 진짜 주민들과 다른 점이 세금을 내는 부분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세금을 일부 지원해 주시든가 전부 내 주셔야 해요. 그게 아주 큰 특혜라 전속 길드에 가입하려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테라리움은 내가 세금을 없애 놨으니 딱히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테라리움 전속 길드를 운영하면 유지비가 많이 나오는 이유의 대부분이 이것으로 보였다. 세금 지원.

“그리고 길드 구성원들이 집결할 수 있고 창고를 운용하거나 의뢰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요. 드루이드들의 모임 장소라 하여 스톤헨지라 불리는 곳이 필요한데 여긴 전부 박살 나서 쓸만한 곳이 없지 않나요? 제이 님.”

스톤헨지는 내가 다른 드루이드들과 파티를 맺을 때도 봤던 단어였다. 핸드폰이 스톤헨지 모드로 변경이 되었지.

다른 게임으로 치면 길드 하우스나 길드 성이라고 불리는 곳을 선정해야 하는데 우리 테라리움의 아주 큰 문제인 복구도가 걸렸다. 내가 떠난 사이 데이지2가 열심히 테라리움을 수습하고 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건물도 세우고 하려면 역시 무리였다.

“임시로 쓸 만한 곳은 없나? 사방이 막혀 있고 방이라고 봐 줄 만한 곳이면 되는데….”

아티팩트로 28번째 테라리움을 쓱 둘러봐도 금방이라도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 위태한 곳들만 보였다.

아니, 하나 있었다. 그나마 세계수의 가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피해가 적었던 곳, 과수원이 있었다. 그것도 전 행정 관리원의 방은, 내가 그곳에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어질러져 있긴 했지만 그 정도면 합격점이었다.

“정말 그 방을 쓰시게요? 과수원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인데….”

“괜찮아. 당장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느라 바쁘고 업무는 어디서든 월렛으로 보면 되니까.”

그나마 덜 파괴되어 장소를 과수원으로 선정하였으나 장소를 그곳으로 선정함에 따라 문제가 또 발생하였다. 일반 사람들이 과수원의 오픈된 공간이 아닌 비즈니스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려면 적절하게 등급을 지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두 개의 테라리움에서 몇 급 가드너로 지정된 것처럼 길드원들을 일일이 등급 업시켜 주어야 하며 테라리움에서 보증하는 신분이기에 책임도 많이 따를 것이라고 했다.

거기다 행정 관리원이 나로 바뀌며 각각 가드너 등급에 따른 혜택도 처음부터 다시 지정해 주어야 했다.

조용히 아티팩트를 착용한 손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아 겁나 할 일 많네. 좀 귀찮아짐.

벌써 종류별로 필링이 다른 쿠키 한 상자를 클리어하고 트레이에 쌓아 둔 베이커리를 층별로 공략하고 있는 데이지를 보며 힐링했다.

잘 먹네. 반면 바곳은 데이지를 따라 이것저것 손은 대지만 새 모이만큼만 집어 먹고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던 내가 대놓고 딴짓을 하자 그들이 물었다.

“길드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제가 다른 게임에서 길드를 만들 땐 버튼 몇 개 누르고 길드 이름이나 소개 쓸 때 타이핑만 조금 해 주면 되는 시스템만 겪다가 설계부터 다시 하려니 과제로 다가와서 좀 귀찮아졌지 뭐예요, 하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전속 길드인 만큼 좀 신중하게 생각해 보려고요.”

“네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가 길드는 설립해 본 적이 없어서…. 분명 복잡한 과정이 있는 건 알고 있어요.”

“길드를 만들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지만. 돈이 많이 드니까.”

“좀 닥치라고. 이거나 더 퍼먹어.”

“그럼 길드에 가입했던 적은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의뢰를 완수한 경험도 많고 실력도 좋아 보이는데, 보통 게임으로 치면 이 정도 고렙들은 웬만해선 길드에 가입하지 않나?

“아… 그게 저희도 길드가 있었던 때가 있긴 한데… 좋지 않게 끝나서….”

“그전 길드 마스터가 워낙 수전노라 길드 의뢰비에 수수료를 워낙 많이 떼먹었어야지….”

“돈 문제군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길드로 들어온 의뢰에 길드 마스터가 수수료도 뗄 수 있구나. 테라리움 전속 길드가 아닌 길드는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작게 진동했다. 살펴보니 메스키트가 날 부른 것이었다.

“그들을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어요.”

메스키트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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