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604)

“제이 님, 저희 테라리움의 첫 쇼핑 스토어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실망만 안겨 드려 죄송합니다. 좀 전의 포션 상점은 쇼핑 스토어 내에서도 실적과 평점이 매우 높은 곳이기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퍼스널 쇼퍼가 너무 저자세로 사과를 하기에 되레 내가 무안해졌다. 그녀의 잘못은 아녔다. 평점 높은 가게니 어련히 잘 처신하리라 생각했겠지.

상점 주인의 실적과 평점은 어떻게 쌓였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는 입을 잘 털었다. 사람을 잔뜩 띄워 주고 물건을 사지 않거나 평점을 좋게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겠지.

원래 저런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평점 주라고 닦달한다. 만약 나같이 정에 약한 한국인이 제대로 걸렸다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매우 좋다고 평가해 주고 돌아서서 후회했겠지. 하지만 난 내 드라이어드에 대한 정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 애 기를 죽이다니.

“포션 상점은 제이 님의 구매로 실적은 크게 올랐지만, 가장 중요한 평점이 아주 많이 떨어져 프리미엄 서비스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가이드 이벤트 리스트에서 제외되고 세금 혜택도 더 이상 받을 수 없으며, 심할 경우 상점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쇼핑 스토어 외곽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일은 저희 행정 관리원님께서 주의 깊게 살펴보실 예정입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그 정도면 됐죠….”

조치가 너무 강한 것은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나의 평가로 물 밑에 있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일 뿐이며 오히려 내가 아주 매너 있게 사태를 처리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만약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방문하여 오늘 같은 일이 생겼다면 심할 경우 테라리움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했다. 오우… 이게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단 말이야…?

나의 행정 관리원이라는 위치에 대해 다시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나만의 테라리움을 갖게 된 것은 좋지만 외부적인 요소가 따르니 아주아주 무거운 왕관을 쓴 기분이야.

다음 안내판 전달 리스트는 장비 상점이었다. 확실히 26번째 테라리움의 상점가보다 넓고 가게의 종류도 많았다. 문제는 내가 간 곳에 장비 상점이 두 곳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어 어디인지 헷갈렸다.

각 상점이 이름이 따로 없고 단순히 장비 상점이라고 쓰여 있을 뿐만 아니라 입구만 보면 어느 곳으로 들어가서 전달해 줘야 하는지 바로 알긴 힘들었다.

둘 다 같은 곳인가? 그러기엔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아무 데나 들어가도 되는 건가?

“마음에 드시는 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두 곳 모두 유명한 장인 가족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쪽이 부모, 다른 한쪽이 그 자식이 운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다만 평가는 더 오래 운영해 온 부모 쪽이 높습니다.”

“오홍… 여기도 대를 물려서 가업을 이어받는구나.”

고민하고 있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포션 상점에서 만났던 드루이드 파티였다.

“신발 하나만 바꾸자. 저번 전투에서 찢어져서 물이 새어 들어온단 말이야.”

“네 돈으로 사. 그거 너희 도깨비바늘이 다 뚫어 놓은 거 알고 있어.”

“아니 우리 애가 기특하게 세탁해 주겠다고 하잖아….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게 더러워 보인다고 손수 세탁해 주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저번에 그런 식으로 장갑도 날려 먹어서 새로 샀잖아! 다시는 걔한테 뭐 맡기지 말라고 했지?”

“쟈는 이제 남은 돈이 없을 건디….”

그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포션 상점에서 타박 받던 호리호리한 남자가 내게 조언해 줬던 여자에게 또 타박 받고 있었으며, 문제의 그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는 또 화제가 되었다.

느리고 조용한 말투를 쓰는 체구가 작은 남성과 과묵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덩치가 큰 남성까지. 어쩐지 밸런스가 잘 맞아 보였다.

그들은 재잘거리며 자연스럽게 자식이 운영하고 있다는 장비 상점으로 들어갔다. 오, 나도 저기로 가 볼까?

“진짜 부츠 딱 하나만 사. 대신 오늘 저녁은 굶어. 매번 제일 뒤에서 공격하면서 장비 갈아 끼우는 빈도는 네가 제일 높다는 게 말이 돼?”

“밥은… 밥은 먹게 해 주라…. 제발…. 이 테라리움 나가면 이제 또 비상식량만 먹어야 하잖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너 때문에 팀 공동 자금이 얼마나 축나고 있는지 알아? 벌써 의뢰로 받은 돈을 거의 다 썼잖아! 이 테라리움은 누가 이미 의뢰를 전부 다 완수해 버려서 일감이 없단 말이야. 이러다 우리 다음 테라리움에서 의뢰 맡기 전에 먼저 파산 나게 생겼어!”

오… 의뢰라… 용병인가 봐! 드루이드 용병 파티다! 신기하다…. 역시 판타지의 꽃은 용병이지. 용병 실제로 처음 봐.

아니, 잠깐만. 의뢰라는 게 만약 퀘스트면 그 퀘스트 받아서 해결하면 나도 용병 아니야? 사실 나도 용병이었던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짱 멋있네?

“어서 오세요….”

“어우, 놀라라.”

용병 제희, 이거 참 폼 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거는 바람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찾으시는 물건이 따로 있으신가요…? 없으시다면… 저는 저쪽 카운터에 있을 테니… 물건을 골라서 오시면 됩니다….”

말을 건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여태 만나온 상점 주인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와 움츠러든 어깨. 꼭 우리 바곳처럼 자신감이 많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 여기 품질 좋네. 거기다 착용감도 아주 좋아. 네 부츠 말고 내 장갑을 살까? 착 감기는 것이 완전 나를 위한 장비 같잖아?”

“글쎄… 이거 나한테는 너무 작은데. 여기 내 발 사이즈에 맞는 신발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저들의 목소리는 꼭 이 조용한 가게의 BGM 같았다. 소란스럽긴 해도 듣기 싫지는 않았다. 마치 내가 궁금해한 평범한 드루이드들의 일상을 엿듣는 느낌이라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은 기분이었다.

안내판을 채 전달해 주기도 전에 상점 주인이 가 버려서 카운터까지 쫓아가야 했다.

“안내판 전달하려고 왔어요. 어디 보자… 이번엔 장비 상점 쪽 안내판을 누가 들고 있니?”

“저예요!”

데이지가 제가 들고 있던 것 중 하나를 내게 넘겼다. 이번의 상점 주인은 앞의 케이스와 달랐다.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곤 안내판을 유심히 읽어 보았다. 그녀의 주위에 안내판 더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 보통은 저희 가게로 전달하러 오지 않고 옆 가게로 가기 때문에…. 저쪽이 더 멋있는 장비들이 많으니까요…. 음… 초보 드루이드님이시군요. 저희 쇼핑 스토어를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제가 착용할 만한 장비들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내내 입고 있던 로브를 열어 내가 입고 있는 장비를 보여 주었다. 아직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들이지 못해 조금 불편함이 있는 장비 세트였다.

“품이 좀 커 보이네요…. 이쪽으로 와 보시겠어요…?”

그녀는 솜털 같은 발걸음으로 목재 마네킹들이 잔뜩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떤 타입의 전투를 선호하시나요…?”

“어… 저는 아직 전투에 나서 본 적이 없어서요.”

가진 것이 다이아뿐이라 주특기도 다이아 던지기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원거리 공격이네요. 슬프다.

“드루이드분들이 전투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도 많지만 아직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피해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움직이기 편하신 장비들이 좋겠네요. 가죽이 금속보다 가벼워 좋긴 해도 면적이 넓을수록 무게가 상당합니다…. 그래서 천과 적절히 배합하여 관절이나 급소를 가리는 쪽에만 가죽을….”

“맞아요! 지금 입고 있는 장비들이 좀 무겁긴 해요. 물론 제가 체력이 쓰레기라 그런 것도 있지만.”

소개해 준 갑옷이 마음에 꼭 들어 손뼉을 쳤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제품을 소개해 줄 수 있지. 그 잠깐 사이 내 퍼스널 쇼퍼가 내가 마음에 들어 한 갑옷에 맞는 장갑과 부츠를 리스트화하여 말해 주었다.

뭘 사야 될지 몰라도 이렇게 편안한 기분으로 쇼핑하는 거 오랜만이야!

상점 주인은 내게 로브를 벗어 달라 권하였다. 26번째 테라리움을 떠나기 전부터 나를 둘둘 감고 있던 검은 로브가 처음으로 훌렁 벗겨졌다. 그녀는 나를 한 번 훑더니 유독 많이 닳은 부분들을 집어냈다.

오른쪽 장갑에 상처가 더 많네요, 넘어질 때 오른손으로 먼저 짚으시나 보네요, 손가락을 다 가리는 장갑이 불편하신가 봐요, 끝이 많이 주름져 있네요, 그럼 오른손은 좀 더 감싸고 왼손은 이쪽을….

그러고 있으면 거기에 대고 내 퍼스널 쇼퍼가 내가 어두운 색을 선호하고 데리고 다니는 드라이어드들을 아끼니, 색감은 데이지와 바곳의 색이 포인트로 사용된 이쪽이 낫겠다며 상점 주인을 거들었다.

이렇게 착용하면 드라이어드들과 커플이 된 느낌이 들 것이라며…. 둘은 내게 환상의 조합이었다.

물건을 구경하느라 잠시 조용했던 드루이드 파티의 수다가 다시 들려왔다.

“여기 장비 상점, 내가 초보 때 들렀다면 더 좋았겠다. 나 처음 장비 맞췄을 때 허리가 너무 커서 벨트로 꽉 조이고 다녔잖아. 근데 여기엔 내 체격에 맞는 장비가 많이 보여.”

“그래? 난 대부분 딱 맞던데.”

“네 사이즈가 표준 사이즈라 그럴걸? 보통 여행 떠나기 전엔 드루이드들이 전투에 가담할 것을 대비해서 근육을 키우는 경우가 많잖아. 그래서 거기에 맞춰 장비들이 어느 정도 큰데 나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나한테 딱 맞는 장비가 없었어. 난 그래도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가벼운 옷을 찾았는데 죄다 무거운 것밖에 없기도 했고.”

“어쨌든 내 신발 사려면 옆 가게로 가야겠네.”

“아쉽다…. 저 장갑 나한테 꼭 맞는데…. 야, 좀만 더 구경하다 가자.”

나도 막 장비 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뉴비 추천 장비를 적당히 입긴 했는데 확실히 사이즈가 좀 크긴 했지. 그래도 완전 뉴비를 위한 옷이었던지 많은 불편함을 못 느끼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 나를 위한 맞춤옷 같은 장비를 입으니 느낌이 확 달랐다.

“음, 보통 표준보다 작은 사이즈 옷을 만드시나요?”

“부모님 가게를 방문하신 초보 드루이드님들을 보고… 결심하게 됐어요…. 큰 사이즈나 숙련된 드루이드 분들을 위한 장비는 부모님께서 팔고 계시니 제가 초보 드루이드님의 장비를 팔면 좋을 것 같아서….”

“와… 멋지다.”

이런 가게가 잘돼야 하는데!

“그래도 부모님께선 못마땅해하셔요…. 표준 사이즈로 만들면 더 잘 팔리는데… 주문 제작을 의뢰하지 않는 이상 작은 사이즈는… 정말 초보 드루이드님들께만 팔 수 있으니….”

“저 같은 사람한테는 완전 딱인데요! 자 보세요! 전 근육이 하나도 없어서 이렇게 딱 맞잖아요? 아예 초보자 전용 장비 상점으로 노선을 틀면 딱일 것 같은데! 아니면 저처럼 전투 구경 전문 드루이드라든가.”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곧 이 가게는 부모님 가게와 합병될 거예요…. 판매 실적이 좋지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재고가 소진되고 나면… 다시 장비들이 전부 표준 사이즈로 통일될 거예요….”

앗! 그건 안 되지. 나처럼 도움받을 수 있는 드루이드가 훗날 또 방문할 수 있잖아! 이렇게 초보자들에게 배려가 넘치는 상점이 사라지는 것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실적을 내기 애매했다. 장비는 소모품이 아니라 포션 상점에서처럼 막 사들일 수 없었다. 분하다. 똑같은 장비를 여러 벌 사도 내 인벤토리만 채우지, 실질적으론 갑옷은 남 도움받지 않는 이상 입기 귀찮아서 매번 갈아입기도 그렇고.

“저기요!”

나는 열심히 아이쇼핑을 즐기고 있던 드루이드 파티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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