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604)

상점 주인이 두툼한 손으로 내 어깨를 밀며 가게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진열대로 향했다.

슬쩍 뒤에 시립한 퍼스널 쇼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점 주인을 말려야 할지 아니면 내 흥미를 끄는 상품을 소개하는 것을 반겨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보였다.

원래 백화점 VVIP들이나 이용하는 퍼스널 쇼퍼는 그 백화점에서 장난 아니게 돈을 많이 쓴 고객들을 위한 거잖아?

그럼 그 고객이 어떤 취향인지 빅데이터가 쌓여 있을 텐데, 행정 관리원이 강제로 내게 붙인 그녀는 솔직히 ‘퍼스널 쇼퍼’로 일하기엔 정보가 부족하여 고민할 만도 했다.

VVIP 제이, 백지 수표나 다름없는 무한 다이아를 휘두르는 자. 난쟁이들의 축복 하에 인벤토리 꽉 찰 때까지 흥미 있는 것은 다 구매해 보는 자.

기생충도 돈 주고 사 봤는데 뭐라도 못 살쏘냐. 이젠 돌멩이라도 한정판이라고 잘 구슬리면 네 자릿수 다이아도 턱턱 내고 잘 살 정도로 호구… 라는 빅데이터가 조만간 쌓이려나….

우리가 이동한 곳의 한쪽엔 파티로 보이는 드루이드가 네 명 모여 있었다. 코너를 사이에 두고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일반 포션 진열대였고 내가 있는 곳은 먼지를 분 단위로 닦는지 반짝반짝한 스페셜 썸띵이 가득한 진열대였다.

그들이 모여 심각하게 속닥거리고 있기에 의도치 않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다이아가 부족할 것 같은디….”

“그럼 이거 환불하고 저걸로 개수 채워서 쿠폰 적립할까? 잘만 하면 포션 하나 더 공짜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미니 포션으로 더 구매하는 것이 가성비가 좋을 것 같지 않아?”

“이전까진 큰 전투가 없어서 포션을 조금씩 나눠 쓰긴 했는디… 소분한 포션은 국소 부위에만 쓸 수 있으니까… 그러다 갑자기 위기 상황이라도 생기믄….”

“후… 언제까지 포션 상점에 짱박혀 있을 거야? 우리 아직 구매해야 될 물건이 산더미야.”

무한 다이아가 없는 일반 드루이드들의 평범한 대화였다. 무시하려고 할 때였다. 쿵 하고 분노에 찬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점 주인이 기겁하며 스페셜 썸띵 가득 찬 진열대를 붙드는 것이 보였다.

“이게 다 네 새끼가 여관 수수료로 여비를 날려 먹어서 그렇잖아! 여관에서 도깨비바늘 꺼내지 말라 했지, 내가? 이불 시트에 다 구멍 뚫어 놔서 새로 하나 사 줘야 했잖아!”

“아니 우리 애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난 그냥 굿나잇 인사만 해 주고 금방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려고 했어.”

“구라 치지 마! 네놈 드라이어드가 침대만 작살내 놓은 줄 알아? 카펫이랑 커튼도 다 구멍 뚫어 놨던데 그거마저 들켰으면 우린 다음 테라리움까지 맨몸으로 가야 했거든?”

소란이 커지려고 하자 상점 주인이 날렵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만약 소란으로 인해 상품이 파손되면 전부 구매해야 한다고 하자 드루이드 파티는 금세 잠잠해졌다.

“홍홍, 손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용. 그럼 여기 특별한 것들을 보실까용? 아유, 드루이드님의 드라이어드들이 꽃잎들도 참 곱고 사랑스럽네용.”

“후후… 그쵸. 제 드라이어드들이 참 사랑스럽고 예뻐요.”

더 해 봐요, 더. 역시 내 눈에만 우리 애들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게 아녔어! 남들 눈에도 우리 애들이 예뻤던 거야! 콧대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상점 주인은 숙달된 솜씨로 내 드라이어드들을 칭찬하며 아주 나를 하늘 높이 띄워 놨다.

“아직 자라나는 드라이어드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식물 영양제! …입니다용!”

상점 주인은 다양한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에 맞춰 식물 영양제가 준비되어 있다며 진열대의 한 곳에 꽂혀 있던 안내판을 내게 보여 주었다.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는 수분의 저장을 더욱 용이하게 하며….

“오! 나 그거 뭔지 알아엽!”

영양제는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바곳을 제외한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골고루 먹여 줬었다. 행운권 추첨 경품으로 받아다가 고루 나눠 줬지. 방어력 스탯을 줬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이름은 식물 영양제가 아니라 ‘드라이어드 특제 영양제’였던 것 같은데.

“이건 일반 드라이어드 영양제와 다르지용. 모체들에게 충분한 영양 공급을 해 주며 꽃잎이 더 싱그러워질 수 있도록 하는…!”

“저거 그냥 물에 약 조금 탄 거잖아. 값만 비싸고 효과를 보려면 엄청 먹여야 하고. 저걸 살 돈으로 차라리 과수원 가서 정통 영양제나 양분 열매를 사 먹이고 말지….”

드루이드 파티에서 성을 냈던 여성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소곤거렸다.

오홍… 그렇단 말이지? 상품 안내판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자 상점 주인의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과수원에서 영양제도 판단 말이지? 이걸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거야. 알았다면 내가 몇 박스를 사 줄 수 있는데. 스페셜 썸띵이 더 이상 스페셜해 보이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다. 내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려고 했다.

“어어…! 손님! 그거 손대면 사야 합니다용! 이게 특수 제작된 병이라 한 번 손때가 타면 상품성이 떨어집니다용!”

갑자기 상점 주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깜짝 놀라 등 뒤의 진열대에 부딪힐 뻔한 것을 퍼스널 쇼퍼가 능숙하게 잡아 주었다.

엥? 그런데 내가 뭘 손댔다고? 난 안내판 말고 손댄 것이 없…. 그의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 끝을 보니 바곳이 제 주먹보다 작은 유리병을 쥐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바곳은 늪지대 밖으로 나온 이후로 세상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낯설어했다. 둥둥 떠다니는 개구리밥을 하염없이 바라볼 만큼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겠지.

그런 아이에게 진열대의 반짝거리는 액체가 가득 담겨 있는 예쁜 병이 퍽이나 신기했나 보다. 저도 모르게 내가 물건 고르는 것을 따라 하며 하나 집어 든 것 같은데….

“헛소리하지 말아요! 병에 손때 좀 묻었다고 상품성 떨어지는 영양제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갑자기 내게 아닌 척 조언을 해 줬던 드루이드 파티의 여성이 변호에 나섰다.

“이… 이건 그래용! 이건 연금탑의 특수 의뢰를 넣어 제작된 병이라서 그래용!”

“당신도 물건 옮기면서 막 만졌을 거 아니에요?”

“저… 저는 당연히 장갑을 끼지용! 그것도 특수 제작된 장갑으로 소중히 물품을 다루고 있습니다용!”

슬쩍 내 퍼스널 쇼퍼를 바라보았다. 제법 포커페이스가 강했던 그녀지만 생판 남인 내가 보아도 매우 썩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상점 주인의 말은 개소리였다. 왈왈.

그러니까 이 영양제 진열대는 완전 호구들을 물 상품으로 가득 차 있고, 내가 예상과 다르게 저 파티의 조언으로 하나도 사지 않을 걸로 보이니 이렇게 바곳을 빌미로 덤탱이를 씌우시겠다…?

솔직히 저 드루이드 파티의 조언이 있다 하더라도 상점 주인이 좀 더 우리 애들을 성층권 뚫을 기세로 칭찬했다면 기분이 좋아서라도 구매할 의향은 있었다.

급변한 상황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한 바곳이 울상이 되었다. 스태프 조각이 꽂혀 있기에 재앙급 울음은 터뜨리지 않을 것이지만 고작 저런 병 하나에 내 드라이어드가 기죽는 건 말이 안 됐다. 바곳의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굽혔다.

“우리 바곳, 기특하기도 하지. 더 쑥쑥 자라려고 마셔 보고 싶었어? 얼른 자라서 날 지켜 주려고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 자자, 우리 바곳이 골랐으니 한 번 마셔 볼까?”

영양제를 담은 병은 뚜껑도 양주 뚜껑처럼 고급스럽게 생겼다. 내용물이 달리니 외적인 것을 포장해서 가치를 올리려는 발악으로 보였다. 뚜껑을 대충 엄지로 따니 통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아이 착하다.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이렇게 쑥쑥 자라고 강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부 욕심내는 것이 바른 자세야. 역시 내 드라이어드다워.”

바곳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 엄지손가락 두 개만 한 병을 바곳의 입에 대 주었다. 병이 두꺼워 안에 담긴 액체는 손가락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울먹울먹하던 바곳은 금세 눈물을 쏙 삼키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랫입술에 병을 대주니 한번에 꼴깍 잘도 삼킨다. 내 드라이어드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면 난 곧바로 몸으로 느낀다.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스탯이 증가한다거나 레벨이 오른다거나 하는 변화를 말이다. 하지만 별 느낌이 안 들었다.

“데이지도 마셔 볼래?”

진열대에 일정한 거리로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던 병들을 한 손으로 쭉 쓸어 데이지에게 주었다.

“어… 손님!”

상점 주인의 이목구비가 다시 가운데로 몰렸다.

“별 변화를 못 느끼겠네. 바곳, 더 마셔 봐.”

데이지에게 쥐여 준 만큼 그 윗줄을 쓸어다가 바곳에게 주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바닥엔 영양제 뚜껑이 통통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애들이 대여섯 병은 들이마셨을 때나 조금 느낌이 왔다.

“말씀대로네요! 효과 좀 보려면 엄청 먹여야겠네요! 정말 차라리 양분 열매를 사 먹이는 게 더 낫겠어요.”

“그… 그렇죠?”

내게 조언을 해 줬던 여성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이드님… 이거 맛없어요…. 죄송해요….”

내가 시켜서 열심히 마시던 데이지가 들고 있던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데이지, 사과하지 마! 이런 맛없는 걸 파는 가게가 문제인 거지!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데 이건 쓰고 몸에 좋지도 않은데 어디에 쓰라는 거야? 먹지 마, 먹지 마. 그만 마셔.”

데이지와 바곳이 들고 있던 병을 죄다 수거해 진열대 옆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손님, 그거 전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계산해 주세요! 다이아는 버린 셈 칠게요! 여긴 다시 오고 싶지 않을 만큼 별로네요! 저 여기서 상품 구매하면 상점 쇼핑 평가도 할 수 있다고 했죠? 최악이라고 평가할래요!”

상점 주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시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내 퍼스널 쇼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월렛을 꺼내더니 말했다.

“바로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구매에 사용하신 다이아 비용만큼 평가에 가중치가 생기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상점 주인의 벨 소리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월렛을 꺼내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좀 전의 바곳이 한 얼굴보다 더했다.

“무엇보다 저희 테라리움의 매우 귀중한 고객이신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님께서 하신 평가이시니 그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별점 테러 정도로 생각했는데…. 5성급 호텔의 가치를 별 제로로 내려 버린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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