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604)

메시지 입력을 마치니 양도할 사람을 고르라는 리스트가 주르륵 떴다. 말벌은 각각 자신의 짝이 있는 수신자와 비트윈처럼 1:1 메시지밖에 주고받지 못하니, 최초 발신은 양도자를 정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리스트의 이름들은 죄다 내가 다이아 수레를 보낸 적 있는 드루이드들이었다. 와, 이거 생각보다 섬세하네.

칼롱의 이름을 찾아 터치하자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화면 위로 홀로그램처럼 말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곤 순식간에 웽웽 날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와 쩐다, 이거! 아이메시지를 보낼 땐 후웅, 하는 소리라면 이건 웽, 이었다. 이 세계에 사과폰 사용자가 없을 테니, 이걸 누가 공감 좀 해 줬으면 좋겠다. 문득 외로워졌다.

하지만 말벌이 날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내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탄성을 내뱉자 그런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주인, 제이. 이제 뭘 하실 건가요?”

수벌이 담겨 있던 칩이 사라진 곳에 암벌의 칩을 끼워 넣는 날 보며 메스키트가 물었다. 차분하게 귓가에 울리는 메스키트의 목소리는 내 생각을 정리해 주는 ASMR 같았다.

“칼롱이 당장 이 테라리움을 떠나면 위험하다고 했으니… 당분간 머무르려고 해.”

내 드라이어드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테라리움 안은 안전하니까 괜찮아! 메스키트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안의 사정은 행정 관리원의 월렛으로 한눈에 확인할 수 있거든. 오늘 만난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굉장히 계산적인 사람이니 자신의 테라리움에 해가 되는 분자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시들링을 버튼 하나로 추방시켰던 것이 떠올랐다.

“내 28번째 테라리움을 노리려고 했던 사람들, (다이아가) 나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꽤 대단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나한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한 번 만나 보려고 해. 어쩌면 그 사람들이랑 만나 보면 28번째 테라리움의 교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일단 바로 만나러 가긴 그러니까 할 일이 있어! 그건 바로 이곳 18번째 테라리움의 아티팩트 공방을 방문하는 거야!

상가로 가자! 26번째 테라리움보다 번호가 앞이니 상가도 장난 아니게 클 거야! 공방도 크고 예쁜 아티팩트 가구들도 많을 거야!

내 생각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역시 엘더였다.

***

상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26번째 테라리움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것도 이유였지만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워낙 셈이 빠른 자인 것이 큰 몫을 했다.

그는 이 거대한 테라리움을 나처럼 ‘무한 다이아’ 없이 유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다이아를 모으는 자였다. 어디로 가든 상가로 통하도록 길이 짜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안내판도 무척이나 친절했다.

1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신 놓고 있는 사이 개미지옥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호객 행위에 홀려 화려한 상가로 빠질 것 같았다. 드루이드들의 월렛을 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구나 싶었다.

18번째 테라리움의 상가는 시장 골목 따위가 아니었다. 거대한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이 둥글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안을 상점들이 빼곡히 입점하여 자리하고 있었다.

계단을 통해 2층도 갈 수 있는 구조였는데, 꼭 사방이 트인 2층짜리 백화점 건물을 보는 것 같았다.

26번째 테라리움보다 과수원도 크기가 대단하더니, 앞 자릿수가 바뀌면 모든 랜드마크 규모가 장난이 아니구나. 새삼 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앞 번호로 가려는지 알겠어. 안전도 안전이지만 인프라가 하늘과 땅 차이잖아?

상가에 들어서려고 얼쩡거리는데 입구에서 무언가를 나눠 주던 사람들이 날 부드럽게 제지했다.

“고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안이 복잡하여 다른 분들의 원활한 통행과 안전을 위해서 대형 드라이어드는 아티팩트로 돌려보내 주실 것을 권고 드립니다! 꽃나무 타입이라면 모두 포함됩니다. 소형 풀꽃 타입 드라이어드들도 최대 2그루까지만 입장 가능합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는 산처럼 덩치가 큰 메스키트와 엘더를 바라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확실히 안에 드라이어드를 대동한 사람들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간간이 몇몇 작은 드라이어드가 보이긴 했지만 소수였다.

좀처럼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들이라 고민이 되었다. 또한 상가에서 돈 주는 사람이 참 흐뭇하게 내 다이아를 물 쓰듯 축낼 수 있는 것이 엘더라, 아티팩트로 돌아가게 된다면 입맛만 다셔야 하니 난처했다. 모처럼 엘더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걸리게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어떻게 안 되나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테라리움의 방침인지라 특별 관례를 남기기 힘든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이 방침을 무리 없이 따르고 계셔서 어쩔 수 없습니다. 상가 구역만 나서시면 얼마든지 드라이어드들을 다시 소환하셔도 되니 번거로우시더라도 따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렉이 심해서 캐릭들 좀 집어넣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게 여기 테라리움의 룰이고 다른 사람들도 군말 없이 따르고 있으니 나 혼자 튀는 행동을 하긴 좀 그랬다. 심지어 26번째처럼 한자리 꿰찬 가드너도 아니라 이 상가 구역을 다 사들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 그럼 얘 둘 정도는 괜찮나요?”

데이지와 바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훌쩍 큰 데이지는 그래도 좀 덜했지만 꾸준히 묘목 취급을 받은 내 드라이어드들이었다. 안내원은 그 정도면 무리 없다고 했다.

내가 어미랑 헤어지는 병아리처럼 메스키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웃으며 내 손목을 가리켰다.

“내 주인, 제이. 딱히 위험해 보이는 곳도 아니고 무엇보다 데이지 아이가 함께할 것이니 저희 걱정은 하지 말고 편히 즐기도록 해요.”

바곳은 아직 메스키트가 생각하기에 내게 든든한 드라이어드가 아닌가 보다. 메스키트가 날 달래는 것과는 다르게 엘더는 잘생긴 얼굴을 구겼다. 명백히 아티팩트로 돌아가기 싫다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난 메스키트가 나를 안심시켰던 것처럼 반대로 엘더를 달래야만 했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고, 대신 원하는 거 많이 많이 사 올게.”

저 묘목만 한 애들이 뭐가 도움이 되겠냐며 피해 안 가게 얌전히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실수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상가 오기 전 엘더의 눈을 가리고 들어왔지.

사방엔 엘더가 혹할 물건들이 굉장히 많았다. 용도도 모를 온갖 화려한 아이템들이 나를 사가라는 듯이 반짝반짝 뽐내고 있으니, 엘더 입장에선 완전 참새가 방앗간에 시찰 온 격이었다.

시찰은 왔는데 현대식 방앗간이라 강화 유리가 곡식 분쇄기 달달 돌아가는 주위를 막고 있어서, 부리로 암만 쪼아도 낱알에 결코 닿지 못하는 불쌍한 상황이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탐스러운 쌀알에 부리 끝도 못 대보는…

“묘목이라니! 얘들도 다 컸어! 여기 방침이 너같이 떡대만 한 드라이어드들은 못 들어간다는데 지켜야지. 그게 인간 사회야!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크래! 얼굴도 예쁘고 덩치도 크고! 아주 다 가졌어, 다!”

어쩌다 보니 타박을 빙자한 칭찬이었다. 난 저 얼굴에 절대 싫은 소리 못한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엘더에게 손짓으로 크기를 가늠하며 소리치자 메스키트가 우릴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메스키트가 보기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 좋다며!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맞아! 완전 좋지!”

“그럼 날 데리고 다니는 게 더 좋은 거잖아?”

“아니 영원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넌 내 아티팩트에 얌전히 앉아서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조르면 되는 거잖아. 그럼 내가 어련히 알아서 네가 사 달라는 거 다 사 줄 건데, 덩치만 컸지, 왜 이렇게 애처럼 굴어. 여기 얌전한 우리 데이지랑 바곳 좀 봐. 말도 잘 듣고 너처럼 떼도 안 써.”

“내가 쟤들보다 더 강해.”

“야! 네놈이 얘네를 키웠냐! 내가 다 키웠는데! 넌 세계수에서 다 커서 나왔지만 데이지는 내가 영양분 덩어리 열매 먹여 키우고 반지도 끼워 주고 다이아 던져 가며 레벨 업 시켜서 키웠는데! 내가 손수 키운 내 새끼들도 다 강해, 인마!”

엘더랑 무의미한 언쟁을 나누다 씩씩거리고 있는데, 잠시 할 말을 잃은 엘더가 입을 다문 사이 문득 주변이 소란스럽다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뭐야. 저기 싸우나 봐. 뭐야, 애를 키우네 마네 하는데 부부싸움 아냐?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핫씨… 무슨 부부싸움이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엘더 꼬맹아, 그만하렴. 제이가 곤란해하잖니.”

우리들의 재롱을 구경하다가 내가 쪽팔려서 얼굴을 가리는 걸 본 메스키트가 중재에 나섰다. 메스키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엘더에게 세계수 안에 있을 적 꼬꼬마 시절을 언급하며 억지를 잠재웠다. 엘더를 말로 패는 격이었다.

업어 키웠다더니… 역시….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합격 목걸이라도 걸어 주고 싶은 엄청난 촌철살인급 타박이었다. 뿌이뿌이뿌이, 잘 들었다가 다음에 나도 써먹어야지.

결국 엘더는 잔뜩 삐친 얼굴을 하곤 메스키트와 함께 테라리움 아티팩트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곳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곳과 마냥 해맑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데이지를 데리고 막 상가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제이 님 맞으시죠?”

“어우, 놀라라. 누구세요?”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여성이 다가와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번엔 또 뭔데?

“제이 님께서 상가 구역에 진입하신 것을 확인한 행정 관리원님께서 보냈습니다. 저는 앞으로 상가 구역에서 제이 님의 쇼핑을 도와드릴 퍼스널 쇼퍼입니다. 이곳 상가 구역은 넓고 복잡하여 제이 님께서 원하시는 상품을 편하게 찾으실 수 있도록 제가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아주 내 월렛을 작정하고 열려고 집중 마크할 사람도 보냈다, 이거지?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그나저나 퍼스널 쇼퍼라니. 처음 봐! 이거 백화점 VVIP들한테 따라붙는다는 최상급 서비스 아니야? 이런 건 그래도 좀 부담스러운데….

내가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최대한 신경 쓰이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따라다닐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 하루 일당 챙겨 드릴 테니 행정 관리원한텐 일했다고 뻥치고 딴 데 가서 쉬다 오면 안 되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면 큰 실례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쇼핑을 먼저 즐기고 싶으신가요? 원하는 구역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또 잘 생각해 보니… 이렇게 복잡한 구역을 친히 설명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앗,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쪽 행정 관리원의 성원에 힘입어 다이아 펑펑 쓰고 갈게요.”

“저희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께선 그런 뜻이 아니라….”

“에이 다 알아요, 다 알아. 그럼 아티팩트 공방부터 안내해 주세요! 여기도 랜덤 박스 있나요?”

당연히 있었다. 역시 없을 리가 없었다. 유저들 지갑 여는 데는 뽑기 상품만 한 것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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