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604)

“필라, 너희 가족은 뭐 해? 앞 번호의 테라리움으로 가족들을 이주시키는 것이 꿈이랬으니… 28번째로 온다면 받아 줄 수 있는데. 우리 테라리움은 지금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인력이 궁하거든.”

“정말 해괴한 테라리움이네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세계수의 가지가 유지가 되는 거죠? 아… 아닙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제가 건드려선 안 될 영역 같네요. 궁금해 죽겠지만 어르신이 턱턱 내놓는 다이아 수량이 저에게 입을 다물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루프가 계약서 양식을 가져오겠다며 필라의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여동생은 드루이드이고… 부모님은 소소하게 식당 일을 하세요. 아마 루프의 가족들보단… 음….”

“딱 좋네. 루프의 가족들이 이주하면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아 그런데 농사는 지을 수 있어? 28번째 테라리움은 식료품 공급도 좀 무리일 건데.”

“그것부터 고민해야 하는 정도인가요? 텃밭은 좀 가꾸시는데… 농사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저희 가족은 좀 그런가요?”

“아냐아냐, 식료품 쪽은 차라리 다른 테라리움과 거래 루트를 터야겠네. 앞서 말했듯이 인력이 부족해서 생산적인 일이 가능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해. 물론 거주지 마련부터 알아서 해야겠지만.”

지금은 테라리움에 드라이어드들만 있으니 식료품 걱정은 안 했는데, 사람들이 이주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나름대로 큰 수량의 다이아가 오가도 초반 외에 엘더가 조용하길래 수상쩍은 눈으로 뒤를 보았다. 이쯤 되면 귀찮게 한 번 튀어나왔어야 했는데? 그곳에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메스키트와 애써 이쪽을 외면하고 있는 엘더가 보였다.

“내 주인, 제이. 엘더 꼬맹이는 제가 주의를 줬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이 꼬맹이가 허영심에 눈이 멀어 제이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

역시 나의 천사… 나의 메스키트….

필라는 42번째 테라리움은 루프네 테라리움보단 사정이 나은 편이라 가족들과 좀 더 상의를 해 보고 말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은 정말 꿈의 지역이라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루프가 자신의 연구물과 계약서를 동시에 가져왔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필라에게 양도하는 문서까지 사인하고 난 후에야 연구물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것은…. 기생충이었다….

“아, 말씀 안 드렸군요.”

내가 유리관을 덮은 천을 치우자마자 비명을 삼키며 메스키트의 등 뒤로 숨는 모습을 보고 필라가 여상히 말했다.

“루프는 이런 벌레 연금술 전공자입니다.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 뛰어나요.”

유리관 속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유영하는 실 같은 그것들을 4천 다이아나 주고 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기생충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가시를 소재로 한 영화나 ‘겨울철 방어 드실 때 조심하세요.’ 하며 붉은 살덩이에서 실을 죽 잡아 빼는 영상들에서는 많이 봤어도.

내가 대체 돈을 주고 뭘 산 거야? 아무리 돈이 아주 많이 넘쳐나도 그렇지. 무한 다이아를 가지고도 합리적 소비에 대해 고찰을 하게 될 줄이야.

“혹시 제 연구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어, 아직 제대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서 그러실 거예요.”

루프는 기겁한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의 연구물에 내가 기대 이하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닐지 전전긍긍했다. 연구물을 양도하며 꽤 좋은 조건들을 많이 제시받았기에 다 허사가 되어 버릴까 봐.

그녀는 기생충이 담긴 유리병을 툭툭 쳤다. 털실 같은 기생충들이 루프의 손끝이 내는 진동을 피해 이리저리 유영했다.

“아직 팔팔하네, 돈 없어서 밥 준 지 좀 오래됐는데.”

마치 애완동물에게 말하는 것처럼 기생충을 향해 여상히 툭 뱉는 루프의 담력에 엄지를 내세우고 싶었다. 기생충이 무사함을 확인한, 정확히는 상품성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세계수의 18번째 테라리움 연금탑 소속, 1급 연구원 루프! 발표하겠습니다!”

필라의 연구실로 들어설 때 초췌했던 그녀는 자신의 발명품을 옆에 두자, 내가 5천 다이아를 제시했을 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제 발명품 ‘루프 패러사이트 5호’, 줄여서 ‘RP 5호’는 벌레 연금술의 대가인 어닝의 최상품 연금 기생충 4대 조건을 모두 따르며 특별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 4개 조건을 모두 만족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루프는 진짜 대단하고 그녀의 발명품도 유지비가 장난 아니게 드는 것 외에 최고인 겁니다, 어르신.”

옆에서 필라가 거들었다. 그에게서 마치 학예회에서 자식 자랑하는 학부모의 모습이 보였다. 루프의 한쪽 입꼬리가 쭉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첫째, 적응력. 제 RP 5호는 어떠한 생물을 숙주로 삼아도 기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발명품인 말벌들에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지요.”

“둘째, 재생력. 제 RP 5호는 상처를 입거나 감염돼도 금방 스스로 복구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 저게 웬만한 약으로는 절대 죽지 않더라고요. 루프가 발표회 때 저 유리병 안에 욕실 세척제 한 통을 다 들이부었다는 게 믿겨 지십니까? 지금도 알싸한 약품 향이 맡아질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병 근처에 가까이 갔을 때 락스 비슷한 냄새가 나긴 했다.

“셋째, 번식 제어력. 제 RP 5호는 사용자가 원할 때만 번식시킬 수 있습니다. 개체 수 조절이 탁월하여 악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희귀성도 유지됩니다!”

“저게 진짜 힘들거든요. 루프 같은 벌레 연금술사들이 만드는 기생충이란 특정 숙주에게서만 특정 행동을 하게 해야 하고 오랜 시간 숙주가 살아남아야 하는데, 연금술로 만들어진 기생충들은 워낙 튼튼하고 번식력이 뛰어나서 숙주 영양분을 다 빼앗아 먹고 숙주를 망치거든요. 그렇다고 기생충을 약하게 만들면 재생력이 떨어지고, 숙주를 제한하자니 적응력이 떨어져서 말입니다.”

루프가 끼어들지 말란 식으로 필라를 흘겨보았다. 마치 벌레 연금술 강의라도 하려는 것처럼 떠들던 필라가 입을 뚝 다물었다.

“마지막, 감응력. 숙주를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습니다. 제 RP 5호는 번식 제어력과 감응력에 특별함이 있는 발명품입니다.”

클라이맥스인가 보다. 루프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동화되어 손뼉 칠 준비를 하며 집중했다.

“제 RP 5호의 특기는 ‘목적’의 전이, 감염입니다!”

“엥? 그게 뭐야?”

루피의 눈치를 보고 있던 필라가 이때다 싶었는지 끼어들었다.

“어르신께서 제 말벌이 다른 벌들을 잡아먹는 걸 별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루프의 기생충을 쓰면 포식 행위를 멈추고 감염 행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걸 어디에 써? 감염이라니?”

나는 그저 단순히 말벌만을 원한다니까… 왜 자꾸 진화를 시켜…? 감염은 또 뭐야? 병에 걸리게 하겠다는 거야?

“일단 제 말벌들이 포식 행위를 멈추는 대신 다른 벌들을 공격해서 기생충을 번식시키게 할 겁니다. 그럼 말벌에게 공격당한 벌들에 저마다 루프의 기생충들이 심어질 건데, 모두 원본의 목적을 따라 하게 될 겁니다. 그 ‘목적’을 훈련시키려면 특이하게도 먹이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유지 비용이 많이 들어서요.”

유지 비용이란 말에 루프가 시선을 피했다.

필라가 하는 말은 꼭… 좀비 바이러스 같았다. 감염시켜서 조종하는 슈퍼 좀비 말벌…. 내가 원했던 스펙이 아닌 온갖 이상한 것들이 다 붙은, 그러니까 기생충까지 심어진 말벌을 떠안게 생겼다. 그것도 내 스마트폰에!

“어르신, 기생충의 ‘목적’은 어떤 것이 제일 근사할까요? 어떤 것이 제일 상업적일까요? 죽이진 않아도 남의 벌들을 조종할 수 있다면 완전 대박 아니겠습니까? 고도의 작업이 필요한 ‘목적’을 훈련시키려면 아무래도 먹이가 좀 많이 들 겁니다. 기생충이 워낙 단순해서 한 개 이상을 익히지도 못할 거고요. 추천 드리자면, ‘벌’이니까 전하려는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메시지를 전하든 모두 같은 단어로 바뀌게 하는 겁니다.”

“꼭 스팸 메일인데 그거. 바이러스 걸린 스팸 메일이네….”

“이를테면 ‘오늘 광장에서 점심때 만나’라는 메시지를 전해도 ‘필라는 최고의 연금술사’라고 바뀌어 전달되는 것이죠.”

“내 RP 5호를 그런 쓸데없는 일에 쓰지 마.”

루프의 핀잔에 필라가 어깨를 움츠렸다. 루프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겁먹은 햄스터 꼴을 하는 것이 볼만했다.

“그래, 뭐 모든 벌들을 다 조지고 다니는 것보다 낫겠지…. 기생충을 심되 꼭 ‘목적’을 지금 익혀 놔야 하는 거야?”

“원하신다면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요. 대신 바꾼다면 이전의 ‘목적’은 상실됩니다. 파생된 기생충들의 목적도 일제히 바뀐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징그러운 건 징그러운 거고, 신기한 게 더 컸다. 이쯤 되니 좀비 바이러스라기보단 어렸을 때 내 컴퓨터를 작살내 놨던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 같았다.

“어르신, 이제 제 연구에 들어가도 될까요? 빨리 루프의 기생충을 제 말벌들에 융합시키고 싶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기생충의 번식 제어력의 경우 말벌의 포식성을 대체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벌끼리만 작용하게 됩니다. 더 세밀한 목표 설정이나 다른 생물을 대상으로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혹시 확장을 바라신다면 제가 더 연구….”

“아, 뭐… 그대로 해. 벌만 해. 대충 해. 그리고 빨리 해.”

“먹이 훈련은 어떻게 할까요? 혹시 지금 정하셨다면 제가 구하러 다녀와야 할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기생충의 먹이는 뭔데? 뭐길래 유지 비용이 그렇게 비싸다는 거야?”

제발 여기서 더 징그러워지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오만 정이 떨어져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다른 말벌을 알아보러 가게 하지 말아 주세요.

“이게 사실 재생성을 강하게 만들고 번식 제어력을 견고하게 하려고 세계수의 힘을 응용해 만든 거라….”

루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세계수의 일부가 아니면 기생충들이 쳐다도 안 봅니다…. 원래는 포션을 먹여 키웠는데 감당이 안 돼서….”

“…세계수의 일부?”

“네, 세계수에서 떨어져 나온 거라면 뭐든지 먹습니다. 포션도 결국 수액이니까…. 사실 이게 진짜로 될지 몰랐는데, 성공했던 사례도 있다고 하니까 혹해서 시도해 보니 저도 성공해 버려서….”

내 경험상 세계수의 뭐가 붙은 건 죄다 다이아값이 장난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세계수는 이 세계에서 엄청 신성한 존재 아니었어? 그 일부를 저런 기생충을 키우자고 먹였다고? 하물며 드라이어드들도 세계수에서 태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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