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너 다이아를 그렇게…!”
엘더가 귀찮게 굴었다.
“네? 고민 안 해 보세요? 트리 1등급 바로 다실 때부터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3800다이아를 내신다고 따로 어르신께 혜택이 가는 게 없습니다. 개인 지식권을 거래하는 것이라서 연금탑에선 어떠한 특권도 주지 않아요. 거기다 지식권은 제가 가져갈 것이고요…. 그런데 그렇게 턱하고 다이아를 내신다고요?”
“지금 이 말벌들보다 좀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며. 난 말벌이 필요하고 이 말벌들은 내가 쓰기엔 뭔가 조금 그럴 뿐이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봐. 다 지원해 줄게.”
필라가 넋을 놓고 날 바라보았다.
“왜…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설마, 설마….”
“뭐가?”
“가끔 후원자들 중엔 좋지 않은 목적으로 어린 연구원들을 꾀어내는 파렴치한 놈들이 있다는데… 설마 이 제 잘생긴 얼굴을 보고…?”
기가 찼다. 파들파들 떠는 햄스터 꼴을 하고는 잘도 헛소리를 했다. 말투로 보나 뻔뻔한 행동들로 보나 필라는 확실히 자존감이 높았다.
유약해 보이는 얼굴이 나름대로 먹혔던 인생을 살아왔나 본데, 과거나 지금이나 내 미의 취향은 아주 화려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키랑 덩치도 많이 봤다. 거기다 내 기준의 하한치를 콘크리트 벽으로 두껍게 바리게이트를 쳐 버린 놈이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난 더 대꾸해 주지 않고 두 손으로 엘더의 얼굴을 받쳤다. 잘 봐, 난 매일 이 얼굴을 보고 살아. 필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하는 눈을 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를 데려오겠다며 황급히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필라에게 끌려왔다. 빚 때문에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닌 거라며 어르신이 이해해 주라고 필라가 변호했다. 여자의 퀭한 눈이 필라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다.
“뭔데?”
“정중하게 굴어. 이 어르신은 날 후원해 주시는 분이야. 너의 발명품을 내게 양도할 수 있도록 돈을 내 주시기로 했어.”
눈빛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얼마, 얼마까지 주실 수 있는데요?”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문득 궁금해졌다. 빚이 많다고 했지. 그것도 도박 빚. 사람이 절대 손대선 안 되는 것이 도박인데 돈이 많이 생겨 빚을 갚게 된다고 다시 도박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완전 타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그녀의 인생을 걱정해 줄 위치가 되는 걸까?
“뭐, 불러 보세요.”
“4천이요.”
“너 전에 나한텐 3천이랬잖아! 그렇게 막 부르면 어떡해? 나 말곤 그 발명품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며?”
“저 고고한 분위기가 돈이 많다고 외치잖아? 나도 한몫 잡아야지. 나 말곤 네가 원하는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필라와 그녀가 옥신각신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작은 치와와 두 마리의 개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너 그렇게 받아다가 다시 도박할 거지?”
“애초에 내 발명품을 연금탑에서 제때 구매해 줬으면 빚은 안 생겼어! 무리하게 연구비 당겨쓰다가 빚이 생긴 거란 말이야! 집에 돈을 못 보내면 가족들이 전부 테라리움 밖으로 나앉게 생겼는데 내가 뭐라도 해야지. 내가 가장이란 말이야!”
혹시 여기 연금탑의 연구원들의 사정은 다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필라도 가족들을 앞 번호의 테라리움으로 데려오기 위해 연구비에 절절매며 노력 중이고.
“그래도 도박을 하면 어떡해? 도박 빚 갚으려고 학생들 대리 과제까지 뛰어 주니까 정작 네 연구도 못 하고 있잖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래서… 그쪽은 4천 주실 수 있나요?”
“4천이면 빚을 모두 갚나요?”
순수하게 되묻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생각에 잠겼다. 필라가 내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팔뚝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정중하게 대하라는 듯했다.
“빚은 3천이에요. 나머지 천은… 천 다이아만 있으면 가족들을 30번대 테라리움까지 데려올 수 있어요. 제 고향은 지금 불의 침입이 심해져서 테라리움 안이라 해도 외곽에 살고 있으면 위험해요. 이 기회에 가족들을 안전한 테라리움까지 데려와야겠어요.”
“어르신…. 그래도 제가 말씀드렸던 3800다이아에서 200다이아 정도 높아지긴 했는데….”
필라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물쭈물했다. 저 여자한테 왜 저렇게 절절매지? 혹시…? 오오… 올?
“줄 수 있죠. 4천 정도야, 뭐.”
내 태도에 말을 꺼낸 것은 본인이면서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물론 더 줄 수도 있어요.”
“어르신! 사람은 공돈이 생기면 허투루 쓴다고요!”
필라는 그녀가 다시 재미로라도 도박에 눈을 돌릴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개만 좀 알려 줘요. 30번대 테라리움이면 된다는 거, 20번대도 상관없나요?”
“30번대 안의 번호면 누구나 원하는 꿈의 테라리움이죠….”
그녀가 뭔 당연할 걸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가족들은 뭐 하세요?”
그 질문에 살짝 경계하는 얼굴이 되었다.
“너 혹시 후원자라고 속이고 조사관을 데려온 거 아냐? 도박 중독이라고 내 직급을 강탈하려고….”
“내가 네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르신, 루프네 가족들은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아, 뭐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절대 나쁜 의도는 아니에요.”
그녀가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두 분다 주얼러, 보석 세공사 일을 하고 계세요. 하지만 높은 자릿수 테라리움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서 보석 쪽은 돈이 되질 않고… 수입은 없어서 보증도 못 서시는데. 재산도 없어요. 테라리움에서 제공하는 집에 살고 계셔서.”
혹시라도 내가 보증 같은 이상한 걸 요구할까 봐 또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난 어차피 그런 쪽으로 문외한이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주얼러? 그런 대단한 직업이 왜 그렇게 아래쪽에 있어? 앞 번호 테라리움들이 데려가려고 난리 아니야?”
필라가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대로 59번째 테라리움에서 진실의 사파이어를 세공하면서 살았으니까. 불 때문에 세계수가 힘을 잃기 전까지 59번째 테라리움엔 항상 9월 태양의 힘이 세계수의 가지에 맺혔다고 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걸 세공해서 액세서리로 만드는 것이 우리 가문의 일이었고. 할아버지가 젊었을 땐 스페셜 등급의 사파이어 반지도 세공해 보신 적 있다고 했어.”
개쩐다…. 단순 보석이 아닌 엘더나 데이지의 손가락에 끼인 드라이어드 파워 업 보석을 말하는 것이었다니!
“4천에 천 다이아를 더 줄게요!”
“어르신…! 무슨 다이아가 땅 파면 나오시나요?”
필라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땅 파서 다이아 캐는 것은 맞다. 우리 난쟁이들이. 놀라서 입을 쩍 벌린 루프에게 손바닥을 폈다.
“거기에 당신 가족들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이주해 왔으면 해요! 이건 제 첫 번째 조건이에요. 천을 더 주는.”
엄지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28번째요? 왜 하필… 아니 그런 높은 테라리움으로 가려면 천으론 부족한데…. 20번대면 세금도 높지 않나요?”
“28번째 테라리움은 세금이 없어요.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요.”
“그런 테라리움이 있다곤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필라와 루프가 동시에 소리쳤다.
“두 번째, 28번째 테라리움은 지금 반파당해서 당장 거주지가 없을지도 몰라요. 이주해 온 가족분들이 처음부터 살 자리를 일궈 나가야 하죠. 대신 원하는 자리는 마음대로 선점할 수 있어요. 중앙이든 외곽이든. 거기에 대한 지원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반파당했다고요…?”
“불의 침입이 한 번 있긴 했는데 속사정은 비밀로 할게요. 대신 그 어떤 테라리움보다 불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세계수의 가지가 다이아가 많을수록 힘이 강해진다면, 28번째 테라리움은 최강의 안전지대일 거예요.”
침입이라기보단 거대한 불이 아예 휩쓸고 지나갔지. 하지만 이제 안전만큼은 자부한다. 세계수의 가지가 실시간으로 내 다이아를 쪽쪽 빨아먹는 이상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한테 절대 밀려선 안 됐다. 28번째 가지가 어떤 가지인데. 물먹는 하마보다 더하지.
“세 번째, 28번째 테라리움은 과거 불멸의 다이아몬드가 생산됐던 곳이라고 하던데 가족분들께서 선조의 지혜를 되살려 다시 그 보석들을 부활시켜 주셨으면 해요. 파는 것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생산되는 모든 보석을 제가 매입 후 처리할게요. 물론 여기에 드는 비용도 전부 지원해 줄 수 있어요.”
내 손가락이 세 개 접히자 루프가 제자리에서 작게 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런 조건이 가능하다고요?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자랑 무슨 사이예요? 보석 세공 일을 다시 하는 건 부모님의 꿈이기도 해요! 거주지가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제가 연구원 일을 하기 전까지 다들 공동 회관에서 지내거나 자리가 다 차면 거리에서 자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너무나 좋은 제안이… 마치 당신이 제게 사기를 치려는 것처럼 들려서….”
“어르신, 28번째 테라리움에 다이아라도 꿔 주신 건가요? 아니면 협박을….”
뭘 모르시네. 이쯤 되면 테라리움 속사정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의심해 봐야 하지 않나?
“그야… 제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기 때문이죠.”
무려 오늘 임시 딱지도 뗀 정식 행정 관리원이란 말씀!
내 말에 둘 모두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이에요. 제가 다이아를 주면 다신 도박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4천은 지금 당장 드리겠지만 추가로 주기로 한 천 다이아는 28번째 테라리움에 있는 제 드라이어드에게 맡겨 둘게요. 당신의 가족들이 이주해 온 후 전달받으면 돼요.”
“당장!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얼마든지!”
루프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내가 놀라서 뒷걸음질 치자 메스키트가 안정적으로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줬다.
“몰라봬서 죄송해요!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가족들에게 바로 이주해 올 수 있도록 지금 가서 말할게요! 이참에 저도 연구원은 때려치우고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얼러 일을 물려받아야겠어요. 가족들만 아니었으면 저도 적성에 안 맞는 연구원 일을 계속 할 필욘 없어요! 재능이 있어서, 돈을 많이 줘서 남은 거지.”
“뭐? 연구원을 그만둔다고?”
필라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내가 방금 한 남자의 연애 전선을 시작도 전에 끊어 버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