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게 사람 사는 곳이야? 돼지우리야?”
우리 엄마가 난장판인 내 방을 보면 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1년에 명절을 맞아 집에 들이닥치는 친척들을 대비하여 대청소를 할 때를 제외하곤 내 방은 늘 더러운 상태를 유지했다. 지금 보는 광경이 그 배는 심했다.
“오, 어르신. 방금 제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제 여동생도 이 혼잡 속에 존재하는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제가 어지르기만 한다고 했거든요.”
필라는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보곤 슬쩍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정말 그가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린 것이 맞는지 그리움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동생 있구나….”
난 외동인데. 한때는 위아래로 형제들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형제들과 사이가 좋은 케이스는 적었기에 지금 와서는 외동이 더 낫다는 입장이었다.
“넵, 여동생 하나 있습니다. 여동생은 지금쯤 어르신처럼 멋있는 드루이드가 되어 있겠죠?”
“여동생도 드루이드야?”
“네, 매일 산과 들을 쏘다녔는데 그게 식물들과 친화력이 좋은 드루이드의 특징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죠. 다 클 때까지 부모님도 몰랐습니다. 동생이 말을 안 하기도 했지만….”
필라는 덩치가 큰 내 드라이어드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치우는 중이었다.
등에 거대한 방패를 매단 메스키트나 길쭉한 스태프를 들고 다니는 엘더가 정돈 전의 연구실을 지나다니며 툭툭 치기만 했어도 대재앙이었다. 산사태처럼 잔뜩 쌓아 둔 물건들이 와르르 무너질 터였다.
“드루이드는 뭔가 유전적인 게 아닌가 보네….”
혈통 좋아하는 판타지들 많잖아? 야생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는 메커니즘과 같이, 세계수가 흩뿌린 축복이 깃든 영혼이 드루이드가 된다고 들었었다.
드루이드는 혈통으로 씹어 먹고 다니는 닌자 나오는 만화보단, 디지털 세계에서 여행하는 만화의 선택받은 아이들 같은 개념과 비슷했다.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필라는 용케 캐치했다.
“네, 당연하죠. 태어날 때부터 드루이드의 운명이 정해진 아이들도 있지만 커 가면서 깨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여동생은 선척적인 케이스였고요. 동생이 드루이드인 것을 알았을 땐 정말 부러웠습니다. 전 제가 드루이드가 되고 싶었거든요.”
사실 답은 이미 나왔었지요. 동생과 함께 화분을 키우면 저는 매번 죽이는 반면 동생은 화분 하나로 꽃밭을 만들었거든요.
필라는 마저 말하며 사각 어항처럼 생긴 커다란 유리 케이스를 가져왔다. 마른 흙이 가득 채워진 곳에 똑 떼어진 썩은 고목 가지가 꽂혀 낙엽에 잔뜩 뒤덮여 있었다.
“제가 밥을 제때 챙겨 주지 못해 많이 예민해진 애들이라… 최대한 이렇게 가려 놓아야 합니다….”
필라가 유리 케이스를 내려놓자 진동으로 인해 안의 생명체가 깨어나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주말에 울리는 진동 모닝콜처럼 불쾌한 소리였다.
“여동생은 왜 드루이드인 걸 숨겼는데?”
“…생각이 깊은 아이였어요. 저희 집 형편에 드라이어드 열매를 마련할 돈이나 여행 자금을 모으긴 힘들었거든요. 드루이드들에겐 숙명이 있지만 여동생은 현실을 선택했어요.”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사례는 아주 익숙했다.
“이곳처럼 번호가 앞인 세계수는 열매를 많이 맺으니 무료로 풀리는 수량도 많지만 제 고향은 번호대가 뒤라서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거든요. 무료 열매를 얻으러 줄을 서도 매번 순번에서 밀렸습니다. 한 번은 동생이 순번에 들기 위해 3일 밤낮을 새운 적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 해 흉년이었어요. 바로 동생 앞에서 순번이 잘렸을 땐 동생이 며칠 방 안에 박혀서 나오질 않았답니다, 하하….”
썩은 고목엔 누런 밀랍이 큰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서 주먹 반만 한 거대한 말벌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극혐이었다. 저걸… 메신저로 써야 한다고? 내가 살면서 본 말벌 중에 저놈이 제일 크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똑같은 크기의 다른 놈이 기어 나올 땐… 욕이 나올 뻔했다.
“그래도 여기서 받은 월급으로 300다이아짜리 드라이어드 열매는 사지 못했지만 설익은 열매는 살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능력이 뛰어나서 곧바로 뒷산 숲의 야생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었더라구요! 제 동생의 첫 드라이어드는 목련입니다. 무려 레어 등급이죠! 동생의 소개로 그곳에 목련 군락지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동생의 활발한 성격을 똑 닮아서 좋은 파트너가 되었어요.”
목련 군락지라…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얀 꽃이 만개한 꽃나무 숲을 떠올리니 절로 황홀해졌다.
“고향이 어디야?”
“세계수의 42번째 테라리움입니다.”
와, 42번과 여기 18번은 갭이 꽤 큰데…. 그나저나 42번째 테라리움 쪽엔 목련 군락지가 있다 이거지? 어차피 엘더 나비 때문에 뒤 번호의 테라리움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만약 가깝다면 꼭 방문해 봐야지.
“어르신, 제 고향과 여기 테라리움의 번호 차이가 많이 크다고 생각하셨죠?”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지?
“물론 다들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보통 자신의 고향 번호의 테라리움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하거든요. 그러나 연금 학회의 장학 제도는 상당히 우수합니다. 실력 있는 연구원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점차 앞 번호의 연급탑으로 갈 수 있거든요. 어렸을 땐 드루이드가 꿈이었지만 가망이 없어졌으니 전 빨리 제 길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제 꿈은 1번째 테라리움에 소개되는 엄청난 연구물을 내어서 가족들 모두 20번대 안의 테라리움으로 이사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꼭 동생에게 300다이아짜리 드라이어드 열매를 선물해 줄 거예요! 요즘 다들 드루이드라면 드라이어드를 셋은 데리고 다니니까요.”
기특하네. 그러면서 꾸깃꾸깃 구겨진 한 다발의 종이들을 들고 왔다.
저기서 대학교의 향수를 느끼고 말았다.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논문 초안을 저렇게 종이에 수기로 쓰게 하여 대학원생을 괴롭혔다.
학과 건물을 사물함 때문에 들를 때면, 저런 뭉텅이를 토템처럼 소중히 안고 좀비처럼 휘적휘적 다니는 대학원생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필라가 내게 넘겨주려던 그것을 슬쩍 밀어내고 웃었다.
“브리핑해 줘. 다 못 읽어.”
“네, 어르신! 설명 드리겠습니다! 말벌을 찾고 계셨죠? 여기 이 말벌 한 쌍은 보통의 말벌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뭐가? 크기가? 아니면 저 바늘 3개만 한 굵기의 독침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절대 도중에 뺏길 수 없는 녀석들이죠! 아주 강합니다! 거미줄을 찢어발기는 것은 기본이며 저 녀석들만의 특징도 있습니다! 바로바로…!”
필라가 종이 뭉치를 깃발처럼 아래위로 흔들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동족 벌들을 모두 잡아먹습니다….”
“뭐?”
아니 뭐 말벌이 뭐든 잡아먹는 뭐 그런 곤충이라곤 들었는데….
“꿀벌은 물론 같은 말벌도 잡아먹습니다! 오히려 꿀벌보다 말벌을 주식으로 더 선호합니다. 섭취하는 것은 말벌 그 자체의 데이터라 메시지는 삼키지 못하고 남습니다. 한 놈을 풀어놓고 도달 기간만 연장시켜 놓으면 그 일대의 모든 벌들의 씨가 마르는 것을 볼 수 있….”
메신저 기능을 하는 말벌을 원했더니 남의 메시지까지 약탈하는 바이러스급 말벌을 소개해 준다.
“벌들의 천적이 거미줄 외에 새들도 있어서 최강 말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새의 주식 데이터와 결합시켰더니… 이런 놈들이 나왔습니다…. 정말 강하지만… 먹이를 같은 벌들로 챙겨 줘야 해서 유지비가 장난 아닙니다…. 그래서 연금 학회에서 반려당했습니다. 하지만 지원을 좀 더 해 주신다면…!”
“유지비는 상관없는데… 저런 녀석들을 어디에 써?”
“하지만 남의 메시지를 도중에 갈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나요? 쓰기 나름이라 생각했습니다. 전 만들 뿐이죠. 용도는 쓰는 사람 마음 아닙니까?”
필라가 뻔뻔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이 일대의 벌들의 씨를 말려서 어디에 쓰겠어. 내가 보스도 있는 특정 세력의 일원인 척 흉내는 내고 있지만, 세계를 정복하려는 그런 야망은 없는데. 그나저나 이 말벌 정말 그런 안 좋은 놈들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겠네.
“흠, 내가 쓰기엔 애매한데. 음… 매력적이지 않아. 실효성도 떨어지고.”
졸업 준비를 위해 모의 논문을 작성시키던 지도 교수님이 내 논문 반려시킬 때 하던 말투를 따라해 봤다. 필라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 그럴 리가! 어르신같이 돈 많은 분들은 분명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부자들의 니즈를 전부 파악하지 못했군요…. 좀 더 타락해서 상업적인 연구원이 되어야만 했는데…!”
“상업적이면 타락한 거야?”
“무릇 지식인이라면 순수한 지식을 추구해야죠! 이왕 타락한 거 좀 더 타락해 보겠습니다! 연구가 마무리 단계인 다른 대안이 있긴 합니다…! 다만 제가 연구비가 모자라서….”
“뭐, 얼마나 모자란데?”
“다른 방 녀석이 기가 막히는 연구품을 발명해 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유지비 때문에 반려당한 것이 있거든요. 그 녀석 발명품에 대한 권리를 사 오고 제 말벌들에게 적용시키려면…. 말벌이 두 마리고… 그 녀석 최근 도박에 빠져서 빚도 있으니 바가지 씌우려고 할 거고….”
들고 있는 종이 뭉치 위에 사각사각 계산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액수가 대단한가 본데. 그런 거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말해 줘도 되는데.
“안 돼.”
대뜸 엘더가 말했다. 말벌 케이스 등장 이후로 겁에 질린 바곳 외에 모두 정신 팔려서 거기만 구경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쪽 대화도 잘 듣고 있었나 보다. 돈 이야기를 또 찰떡같이 알아들은 엘더가 잔소리를 한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드라이어드와 보통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한다고 했다. 난 엘더가 28번째 테라리움 경매 때도 조용히 있길래 말을 못 알아먹은 줄 알았는데. 필라의 말을 알아듣고 잔소리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메스키트에게 내 생각에 대한 답을 구하자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드라이어드들은 보통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드라이어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뿐이라고.
정확히는 언어적인 소통보단 모체에 축적된 지식을 통해 그 사람의 행동, 분위기, 말투, 표정, 소리의 높낮이 등 모든 것을 읽고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식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니. 새삼 신기해.
“그래서 계산은 끝났어? 얼마야?”
“그 어르신이 미리 아셔야 할 게… 원래 지식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지만 매우 값어치가 높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희 같은 인재들이 중요 자산 취급을 받는 것이고….”
“아, 뭐. 알고 있어. 난 값이 높다고 폄하할 생각 없어. 담력이 허락하는 만큼, 부를 수 있는 만큼, 한번 불러 봐. 얼마가 필요한데?”
“그 녀석이 그거 발명하는데 2년 넘게 걸렸었고… 네, 네. 알겠습니다. 3천… 3800다이아쯤 부를 거 같습니다. 후하후하.”
필라가 “3800이면 내가 여기서 월급을 몇 번 받아야 하지? 아무것도 안 쓰고 5년은 모아야….” 하면서 중얼거렸다.
“좋아. 계약서 쓰게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