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는 연금탑으로 안내하며 열심히 입을 놀렸다. 금방이라도 내가 변심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연금술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창의성입니다. 이미 기술과 지식은 발전될 만큼 발전됐죠. 이젠 그것들을 가지고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한 아주 색다른 것을 창조해 내야 합니다. 다른 연금술사들이 이러한 고민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때!”

그는 어깨를 가슴팍을 쫙 펴며 턱을 높게 들었다.

“제 머릿속은 창의력의 샘이 무궁무진하게 솟고 있죠! 다만 그걸 실현시킬 자금이 부족할 뿐입니다.”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자랑스럽게 남에게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끄러운 마음도 없이. 머리도 똑똑하고 실력이 좋으나 돈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다양한 버전의 신세 한탄을 듣다 보니 높게 솟은 건물에 도착했다.

연금탑은 무언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바벨탑 같은 위용을 기대했는데, 63빌딩은커녕 흔히 볼 수 있는 고층 아파트 정도의 높이였다.

다만 균형 있게 쭉 솟은 건물이 아니라 곳곳이 혹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고, 아슬아슬 곧 무너질 것 같은 곳들을 거대하고 굵은 나무 줄기들이 지지대처럼 휩싸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18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입니다. 보안이 철저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죠.”

그의 말은 맞았다. 나는 입구에서 저지당했다. 은행 창구를 방불케 하는 반원형 데스크에 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얼굴을 확 구겼다. 동시에 덩치가 큰 사람들이 와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덩치가 제일 큰 우리 메스키트가 앞으로 나서자 주춤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데스크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수선스럽게 떠들어 댔다.

“설마 연금탑에서 전투를 벌이겠다는 건가요? 이곳에선 어떠한 전투도 용납되지 않아요!”

“진정하세요! 이 어르신은 제 후원자입니다! 제 뛰어난 연구에 감명을 받으셔서 기꺼이 후원을 하려는 분이시라고요! 전 지금 당장이라도 제 연구물들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요!”

그냥 말벌을 얻기 위해 간소한 투자 정도를 생각했는데 언제 갑자기 후원자가 된 거지?

필라의 말에 데스크 직원은 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나의 능력을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얕잡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권 자리를 위한 경매에서 느꼈던 눈빛이었다.

비록 초보자 룩을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난 더러워져도 신경 쓰이지 않고 움직이기에도 간편한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기에는, 그러니까 돈이 엄청 많아 후원자를 자처할 수 있을 정도로 보이기에는 부족할 것 같았다.

이곳에선 당장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는 높은 직급이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고, 화려하고 강한 드라이어드들 정도로는 부자의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으니까.

“18번째 테라리움 연금탑의 개인 연구원 후원자가 되시려면, 먼저 이곳 연금탑에 기부를 하셔야 합니다. 연구원은 연금탑의 소속이며 연금탑이 오랫동안 연구를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죠. 개인 연구원을 후원하실 수 있는 자격은 그다음에 얻으실 수 있습니다.”

까다롭네. 만약 여기서 단독적으로 후원을 하길 중단하고 연금탑에만 기부한다면 그 돈이 절대 필라에게 가지 않을 거란 건 안다. 물론 명목상 소량의 금액 정도는 돌아가겠지만 대부분은 더 실력 있고 높은 연구원들에게 돌아가겠지.

그때 필라가 작게 속삭였다.

“어르신,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혹시라도 연금탑의 연구원을 돈으로 홀려 가로채 갈 수 있기 때문에 방비를 하는 것도 있습죠.”

“흠…. 그래요. 기부할게요.”

18번째 테라리움은 정말 여기도 돈, 저기도 돈이구나. 행정 관리원부터 어떻게든 뽑아 먹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데 새삼 놀랄 것도 없다. 보통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된다면 세계수의 가지 유지 비용을 벌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가 보네.

“감사합니다. 기부해 주신 다이아는 연금탑은 물론 테라리움의 번영을 위해 소중하게 쓰일 것입니다.”

그 말에 정해진 기부금의 하한가가 꽤 높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직원은 사무적으로 데스크로 돌아가 한 책자를 가져왔다. 휘리릭 페이지를 넘긴 후 기부와 관련된 부분을 내게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