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들러붙기 전에 황급히 과수원을 나왔다. 26번째 테라리움과는 비교도 안 되게 휘황찬란한 과수원을 좀 더 구경해 보고 싶긴 했지만.
그나저나 다이아가 엮이면 피곤하게 구는 엘더가 조용했다. 모두의 얼굴에 핏기를 가시게 한 액수의 다이아였는데, 못해도 엘더의 머리색만큼 제 피부가 새하얗게 탈색됐을 거라 걱정했다. 슬쩍 살피니 의외로 평온했다. 이상하네. 못 봤나? 안 보였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인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것인가.
“메스키트는 말벌이 뭔지 알아?”
후자를 택했다. 내 질문에 메스키트는 잠깐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흠, 제가 아는 지식이 맞다면 ‘벌’에 대해서는 설명드릴 수 있답니다. 하지만 보통은 꿀벌이라고 하지요. 꿀벌이 먼 거리를 나와도 꽃가루나 꿀을 싣고 벌집을 잘 찾아가는 습성을 이용하여 드루이드들이 우체부로 쓴다고 알고 있답니다.”
다리에 편지를 묶어 보내는 비둘기 같은 역할인 건가? 아니 그런데 벌은 편지를 묶어 보내기에는 너무 작지 않아? 제 몸집보다 배는 큰 편지 봉투를 매달고 가는 작은 꿀벌을 상상하니 이마가 절로 주름을 만들었다.
“저는 말벌에 대해 들은 적 있어요!”
메스키트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데이지가 폴짝 뛰며 말했다. 내 시선이 훌쩍 솟은 메스키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높아져 있던 탓에 자신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한 것 같았다. 그 귀여운 행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는 드루이드님을 만나기 전까지 마을 회관을 이용해서 행정 관리원님을 만났던 때가 많았는데, 그때 말벌을 이용해서 보내야겠다는 말을 했어요!”
“흠, 힌트가 되겠어.”
데이지의 빨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생각했다. 메스키트의 정보와 데이지의 정보를 조합해 보자면, 일반 드루이드들은 꿀벌을 쓰지만 행정 관리원급의 사람들은 말벌을 쓴다는 건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내 주인, 제이. 행정 관리원에 대한 건이라면 좀 더 정보를 알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지 않나요?”
메스키트가 가볍게 웃으며 월렛을 든 손을 바라보았다. 아, 데이지2! 메스키트가 보편적이면서도 다방면으로 지식이 넓은 반면, 데이지2는 메스키트가 잘 모르는 류의 지식을 알고 있었다.
민들레 아이들이 잘 적응하고 있는지 겸사겸사 볼 겸, 아티팩트로 28번째 테라리움을 불러왔다.
잠깐 사이에 내가 임시가 아닌 정식 행정 관리원으로 임명되었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내 테라리움의 상권은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탓에 여전히 세계수의 가지는 내 월렛에 빨대를 꽂고 다이아를 쭉쭉 흡입하고 있었다.
“제이 님! 18번째 테라리움엔 잘 도착하셨나요? 여긴 민들레 묘목들이 제때 잘 도착해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활발하고 의욕도 넘쳐서 제가 잘 가르친다면 좋은 성목이 되겠어요!”
28번째 테라리움을 내려다보니 막 교육을 진행 중이었던 듯, 데이지2의 앞으로 민들레 아이들이 옹기종기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옷차림이 제법 번듯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간 일어난 전투로 꾸준히 아이들의 경험치도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드라이어드들이 모여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이 깨끗했다. 테라리움을 청소하고 보수하는 작업도 잘 진행되고 있네.
“나 이제 임시가 아니라 정식 행정 관리원이야. 과정은 별거 없었어. 쉽더라고.”
“제이 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걱정했습니다. 제이 님이 없는 28번째 테라리움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데이지2는 좀 더 발전한 테라리움 건설 계획을 늘어놓더니 내가 아니면 이 꿈을 실현시켜 줄 드루이드가 어디에도 없을 거라며 열심히 주절거렸다. 수다스러운 것도 여전하고.
데이지2의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강한 애착을 계속 들어 주기에는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말벌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아, 벌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그럼 거미줄은요?”
“벌은 알고 거미줄은 또 뭐야?”
산 넘어 산이었다. 벌은 그냥 꿀이나 따는 곤충이고 거미줄은 거미가 친 거미집 아니야? 왜 이렇게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난 것들이 많담.
“꿀벌들은 값이 싸고 벌집만 놓아두면 여러 마리를 한 번에 보낼 수 있어서 간편한 반면 아주 약하죠. 과거 저희 테라리움에도 거미줄은 있었으니 웬만한 테라리움들에도 거미줄이 있을 거예요.”
테라리움 곳곳에 흰 거미줄이 늘어져 있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으니 데이지2가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눈에 보이는 그런 거미줄이 아니에요. 메시지를 싣고 가는 벌들을 캐치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미줄이에요. 테라리움 내에서 블랙리스트가 된 드루이드나 어떤 특정한 조건을 걸어 둔 벌들을 가로채기 위해서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안이 약하다는 거구나.”
민간인들의 사적인 SNS도 통제하는 그 국가가 떠올라서 헛웃음이 나왔다.
“말벌은 길들이기 어렵고 무조건 암수 한 쌍이 필요해서 값이 비싼 반면, 강하기 때문에 거미줄이 막아 낼 수 없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보낼 때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정말 중요하고 복잡한 메시지면 전령을 보내는 것이 더 낫긴 해요. 벌들이 보낼 수 있는 메시지는 단편적이니까요. 말벌이 자신의 다른 짝을 찾아가는 습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 짝을 소유한 자와만 1:1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요. 말벌을 쓰실 거면 암수 한 쌍과 그것들이 묵을 벌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구하는 방법은 잘 몰라요. 모든 테라리움들이 표면적으론 말벌 사용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물론 다들 암암리에 사용하긴 하지만….”
칼롱이 벌집을 마련해 둘 테니 한 쌍 중 아무 놈이나 보내라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그나저나 말벌 사용이 불법이라니. 그런 것 치곤 좀 전의 회의실에선 행정 관리원 앞에서 대놓고 보내는 것 같던데. 눈감아 주는 건가.
말벌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이젠 구할 곳이 막막했다. 일단은 불법이니 대놓고 파는 가게도 없을 거고. 양봉업자를 찾아가 뒷돈이라도 찔러 주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야 하나….
답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데이지2와 통신하며 내가 답변을 생각 반, 육성 반으로 했던 탓인지 주위의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18번째 테라리움 안에 사람들은 많았고 우린 그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이야기 중이었던 탓에 주위에 누가 오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음침하게 대화를 엿듣는 것도 몰랐다.
음식이 들어 있던 종이봉투를 부스럭거리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방금 말벌이라고 하셨나요?”
알이 두껍고 커다란 안경을 쓴 남자는, 적당히 긴 머리를 반묶음 하고 잔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얇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시험 기간에 밤샘하는 날 보는 것 같았다.
초췌한 모습과 다르게 얼굴에 엄청 환한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이.
뭐지, 나쁜 놈인가?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다가오다가 내 드라이어드들의 기세에 멈춰 섰다.
“이런 우연이! 제게 마침 좋은 물건이….”
내가 말벌이 필요했는데 마침 그걸 이뤄 줄 사람이 나타난다고? 이게 무슨 정해진 퀘스트처럼 착착 진행되는 말도 안 되는 경우야. 수상한 새낀데.
카나비스를 납치하려던 조직들과 만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내 타인에 대한 의심은 맥스 상태였다.
“아,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신분증도 있습니다.”
그는 꾀죄죄한 외투의 깃을 올려 보이며 말했다. 왼쪽 가슴팍에 달린 것을 보여 주었다. 카드만 한 크기의 명찰에 그의 얼굴과 ‘18번째 테라리움 연금탑 소속 5급 연구원’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16번째에도 바곳을 만들어 낸 연금탑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도 있었구나. 좀 나가는 테라리움들은 다 연금탑을 가지고 있는 건가? 우리 28번째에도 하나 놓아 줘야겠네.
“비록 아직 연금술사라는 타이틀을 따지 못했지만, 제 실력은 이미 그 수준을 웃돌고 있죠. 18번째 테라리움의 5급 연구원 ‘필라’입니다. 제가 마침 연구 중인 슈퍼 말벌이 있는데 보통의 말벌들과는 차원이 다르거든요. 아, 물론 아직 시험 단계긴 하지만 제 연금 지식을 모두 집결시킨 최고의 결과물로….”
삐쩍 말라서 내가 쳐도 쓰러질 것 같이 약하게 생긴 그 남자는 마치 ‘도를 아십니까?’처럼 굴었다. 주절주절 말은 하는데 내가 알고 싶은 말벌에 대해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언급했다. 그리고 그 장황한 수다의 결론은 자신의 연구에 투자를 해 주라는 뜻이었다.
“난 그 말벌의 연구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은 없는데여?”
아, 도 같은 건 안 믿어요, 딴 사람 알아 보세요. 이런 류의 사람은 그냥 무시가 답이다. 자리를 뜨려고 하니 그가 대뜸 무릎을 꿇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드라이어드들이 공격하려 하자 그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제발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이번에도 결과를 내지 못하면 강등되는데 6급부터는 연금탑에서 쫓겨난단 말입니다! 5급이라고 연구비도 쥐꼬리만큼 지원해 주면서 1번째 테라리움에 대서특필될 만큼 초대박 결과물을 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연금탑에 오셔서 제 연구물을 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지금 투자해 주시면 7:3의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지분? 나 그런 단어 좀 좋아하는데.
“8:2.”
뭔지도 모르지만 일단 던져 본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으십시오! 연구비도 모자라서 제 사비까지 쓰는 바람에 밥도 상점 폐기 상품으로 때우고 있는데!”
“나 돈 많아.”
“어르신!”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의 신도가 된 것처럼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재밌네.
“제이, 이만 가도록 해요. 이상한 사람이군요.”
“마침 말벌을 가지고 있다니까 한번 봐 보기라도 하자. 연금탑도 좀 궁금하고.”
연금술사라는 사람들, 포션도 만들고 단델리온의 파나케이아 병도 만들어 내는 신기한 사람들이잖아.
이 게임의 서브 직업 같은 건가? 뭐하는 직업인지 구경 좀 하자. 테라리움 내부에 있고 공공기관 같은 느낌이 나니 위험한 곳은 아니겠지, 뭐.
그가 모시겠다며 연금탑으로 가는 길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