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604)

마을로 들어서기 전, 그가 건넨 까만 로브를 카나비스에게 씌웠다. 혹시 모르니 위장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교습소 쪽으로 가는 건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오늘 습격 때문에 경비가 삼엄할 겁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눈여겨 두었다. 경비가 삼엄하다면 당연히 가야지.

“이쪽으로….”

그는 좀 더 외진 곳으로 날 안내했다. 이미 내 드라이어드들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으므로 두려울 건 이제 없었다.

“여기 이 건물은 오랫동안 비어 있습니다. 들어가셔서 뒷문을 통해 빠져나간 후, 상점가를 우회하여 숙박비가 비싼 큰 여관으로 가신 뒤 사나흘 정도 오래 지내시면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일찍 테라리움을 빠져나오면 걸릴 겁니다. 아직 카나비스의 드루이드가 죽지 않아 아티팩트로 회수할 수 없으니 대놓고 데리고 다니면 눈에 띌 겁니다.”

“아 그쪽은 괜찮아. 그 드루이드 쪽엔 다른 놈을 보냈거든.”

카나비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이미 우리 쪽에서 마중 나왔거든.”

골목에 지나다니는 아무 사람들이나 눈짓하며 말했다.

“멀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꼬리 자르기에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신은 실력이 꽤 출중한 것 같으니 우리 보스에게 잘 말해 둘게.”

“감사합니다. 저 완수금은….”

“줘야지. 당연히.”

그가 보낸 수레에 7천 다이아를 털어 넣으며 말했다.

“연락 수단은 바꿀 거야. 이전 같은 방식은 아무래도 보안이 너무 안 좋아.”

“아… 네. 뭐 그렇죠. 그럼 어떤 방식으로…?”

“알잖아. 그거. 다음에도 만 다이아가 걸린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내가 뭘 알겠어. 그럴싸한 것 좀 먼저 말해 봐.

“아, 혹시 말벌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 세계의 나비는 드라이어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펫쯤인데 벌도 내 상식과는 다르겠지. 그런데 왜 하필 말벌이냔 말이지. 꿀벌도 아니고.

“그래, 그거.”

“네, 그럼 제 월렛에 벌집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오늘 자정까지만 제게 한 쌍 중 아무 놈이나 보내 주시면 됩니다. 전 이제 배신자로 찍혀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금방 여길 뜰 생각입니다.”

“그래…. 그래, 벌집.”

벌집은 또 뭔데.

“건투를 빌겠습니다. 다음에 또 꼭 찾아 주십시오.”

그가 빠르게 사라졌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라고 했지. 빈 건물의 문을 살짝 밀자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열렸다.

내부는 기이했다. 세로로 길었다. 인위적으로 통행의 방향을 강제하려는 것처럼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서 피하며 걷다 보니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문을 나왔을 때, 왜 그가 굳이 이 경로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던 골목과 완전 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내 주인, 제이. 현재 당신이 아주 위험한 상태란 건 알겠어요. 이제 어쩌실 생각인가요?”

18번째 테라리움으로 온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지, 아니면 카나비스를 주인에게 데려다줄지. 참 고민이 되네.

“과수원으로 가자. 행정 관리원을 만나야겠어.”

나무를 숨기려면 일부러 숲으로 가라고. 인파가 붐비는 곳에 섞여 들어갔다.

확실히 26번째 테라리움과 달리 번호가 십의 자리부터 다르다 보니 훨씬 더 번화한 느낌이 들고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쯤 되니 1부터 9까지의 한 자릿수 테라리움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과수원은 26번째의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해 보였다. 마을의 중심에 떡 하니 자리 잡은 그것은 마치 지붕이 거대한 유리 돔으로 된 잠실 운동장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인파에 치이며 간신히 안내 데스크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행정 관리원을 만나러 왔는데요.”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음…. 아마 그럴걸요?”

안내원은 잠시 데스크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거리더니 난처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행정 관리원님껜 공식 일정이 없으신데, 민원 때문이시라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주시겠어요?”

와… 나 26번째에선 VVIP대접 받는 몸인데. 거기 과수원은 들어가니까 바로 대접해 주던데. 그곳에선 내가 급이 높은 가드너라서 그런 건가?

“그럼 28번째 테라리움의 임시 행정관 ‘제이’가 관련 업무 때문에 방문했다는 것만이라도 좀 전해 주시겠어요?”

“아! 그런 거라면! 잠시만요!”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데스크를 휘젓는 손짓도 빨라졌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다른 안내원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 이래야지. 권력이란….

계단을 타고 3층으로 향했다. 층을 오를수록 돌아다니는 사람 수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탁 트인 로비와 외따로 마련된 방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신분 검사를 받았다. 간단했다. 월렛을 잠깐 건넸다가 다시 받았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제이 님께 소속되지 않은 드라이어드가 있어서 따로 대기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안내원은 검은 로브를 푹 쓰고 있는 카나비스를 보며 말했다. 보안이 참 까다로웠다.

“마침 관련 일도 있어서 대동하고 행정 관리원을 만나야 할 것 같네요.”

“지침상 어렵습니다.”

흠,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애매한데. 행정 관리원한테 카나비스 문제를 아예 떠맡겨 버리려고 했는데.

“뭐, 그럼.”

카나비스의 로브를 벗겼다.

“얜 카나비스예요. 그렇게 말하면 될걸요?”

닫힌 문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셔 오게.”

반응은 바로 왔다. 안내원이 뭐라 말하려고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안은 거대한 회의실처럼 보였다. 가장 멀리 끝에 한 명, 저 남자가 행정 관리원일 것 같다. 그리고 듬성듬성 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 뭐 회사의 경영진급 사람들인가?

“죄송하지만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에 대해서 먼저 들어야 할 것 같군요. 당신의 신분 보증이 확실하여 보류되고 있지만 본래라면 바로 체포되어 구금실로 향했을 겁니다.”

“아, 교습소가 습격당했다고 했지.”

들어왔는데 인사나 앉으라는 말도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낸다.

“구해 왔어요. 사례는 됐어요. 그것보다 얘 주인부터 찾아 주실래요? 카나비스의 말로는 이곳 테라리움에 주인이 있다는데.”

“네, 맞아요. 가까이에 드루이드님이 느껴져요.”

카나비스가 내 말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좀 상황이 안 좋아요. 여기 밖에 얘를 노리는 사람들이 아직 잔뜩 있거든요.”

행정 관리원이 나와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러곤 내 양손을 잡아다가 휙 뒤집고 손목을 살폈다.

“없습니다.”

“보이는 곳에 있으면 말단이겠지. 그렇다고 내 관리망을 통과했으니 높은 쪽도 아닐 거고.”

“이 드루이드님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정말 절 구해 주셨어요!”

카나비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 마음껏 의심하세요. 찔리는 것도 없어요. 전 그저 제가 카나비스의 힘에 더 중독되기 전에 빨리 주인이 찾아갔으면 하니까요.”

그 후로 테라리움 밖으로 순찰을 보내겠다거나 카나비스의 드루이드 쪽에 연락하겠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교습소 습격의 피해로 진짜 주인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데다가 아티팩트에 특수한 공격을 받아서 카나비스를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라고 했다.

카나비스는 후에 방으로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제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말에 카나비스는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여기까지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 장하다.

“교습소와 의료 협회를 대신하여 감사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습격 사건으로 많이 날이 서 있던 상태라 정중히 대하지 못한 점도 사죄드립니다. 카나비스는 저희 테라리움의 귀중한 재원입니다. 저희 테라리움에선 카나비스를 구조해 오신 것에 대하여 합당한 보상을 드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18번째 테라리움의 6급 가드너가 되었다는 알림을 받았다. 기본 9급에서 3단계나 올랐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는 이제 식상했다. 그것보다 내 임시 딱지를 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 할인이라든가 이런 거에 별 관심이 없어서요. 그래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겐 더 중요한 게 있지요. 임시 딱지 떼러 왔어요.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카나비스가 멀어지니 슬슬 약 기운이 떨어지는 것 같다.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엄숙한 태도로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살짝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아까 그 배짱은 대체 어디 갔나 싶다. 마음껏 의심하라니…. 그런 말을 내가 어쩌자고….

내 볼이 화끈거리든 말든 저들은 서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절차에 대해 안내드리겠습니다. 먼저 28번째 테라리움은 경매에 들어갑니다. 행정 관리원 희망자로 개인이나 단체, 다른 테라리움에서 입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초기 경매가는 현재 28번째 테라리움을 제이 님께서 인수하신 금액부터 시작됩니다.”

뭐? 내가 주인 아니었어? 갑자기 경매에 들어간다고? 그냥 서류에 사인하는 정도를 예상했던 것과 다른 절차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벌써 상상 속의 테라리움에 백화점도 짓고 병원도 짓고 그랬는데? 김칫국만 시원하게 들이켠 기분이다. 내가 비록 임시지만 행정 관리원이란 것 하나에 얼마나 으스대고 있었는데!

절대 못 뺏겨! 도전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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