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604)

“어… 좀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좀 많이 힘들어서.”

“네? 하지만 뒤쫓기는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그쪽 분들이 뒤를 봐주러 가셨고. 제가 이대로 걸으면 짐이 될 것 같아서. 조금만 회복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러죠. 이 드라이어드를 구하는 힘든 일을 하셨으니까.”

“그리고… 아직 안심이 안 되는데 망 좀 봐주시겠어요? 불안하면 회복이 더디잖아요.”

카나비스의 힘 때문에 풀려서 늘어진 얼굴이 오죽 불쌍해 보였는지, 아니면 잠깐이면 된다는 말 때문이었는지 궤변에도 그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카나비스를 향해 손짓했다. 곧 자신의 주인을 만날 수 있는데 시간이 지체되자 안달이 난 건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얘, 몇 가지만 묻자. 네 주인 의사 맞니?”

“네, 맞아요.”

괜한 걱정이었나?

“응급 수술이 있어서 17번째 테라리움에 가야 하지 않아? 18번째로 가도 괜찮겠어?”

내 질문에 카나비스는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고 있었냐는 얼굴보다는…. 마치 황당하다는….

“네? 저는 아직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기엔 힘의 조절이 형편없어요. 정식 수술에 참가하기엔 자격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아직 수습 기간이에요. 제 드루이드님이 의사는 맞지만 저를 수술에 참가시킬 목적으로 데려가신 건 아니에요. 갑자기 교습소가 공격을 받아서 저를 대피시키던 중….”

“뭐? 그럼 그 남자가 구라 친 거야? 널 응급 수술에 데려가던 중이었다고….”

“네? 제 주인님은 남자가 아니에요.”

누가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럼 저기 우릴 구하러 왔다는 놈들도 나쁜 놈들이고…. 카나비스를 납치하던 중에 나쁜 놈이 또 다른 나쁜 놈 팀에게 공격을 당해서 이중 납치라도 당했다는 거야? 당한 놈은 우릴 이용한 거고.

“왜 그러세요…? 설마 제 드루이드님이 아직 위험한 상태인 건가요…?”

네 주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시 위험해진 것 같은데. 내가 그놈한테 뭐라고 씨불였더라. 파티 없는 솔플에 난 전투력도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적에게 시작부터 나불나불 다 불었던 거네.

이번에도 강행 돌파 해 볼까? 하지만 그땐 다들 모여 있어서 좋았지만 지금은 잔당 확인하러 간다고 좀 흩어진 상태인데. 가는 길에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저쪽은 아직 내가 이상함을 눈치 못 챈 걸로 알고 있겠지?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바곳의 능력이 제대로 먹힌 건 어쩌면 내 운이 따랐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 난 운이 나쁘니 내 운보단 내 드라이어드들의 운이었을 수도 있어.

카나비스가 자신은 바곳의 능력에 내성이 있다고 말했을 때, 어쩌면 이 무리들 중에도 카나비스와 같이 내성이 있는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다 싶었다.

가진 건 돈뿐인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드라이어드는 주인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넌 괜찮아?”

“멀긴 해도 아주 먼 거리가 아니라 아직은 괜찮아요. 저와 주인님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져요. 어쩌면 주인님은 18번째 테라리움에 계실지도 몰라요. 어째서인지 절 아티팩트로 불러들이지 못하고 계시지만….”

“18번째에 있단 말이지…?”

엘더에게 행운 버프를 걸어 달라고 했다. 전투에 직접 나서지도 않으면서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길래 그저 부적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에 엘더가 자신의 꽃가지를 부적으로 쓰기도 한다고 했으니까.

“충분히 쉬셨나요?”

머리를 맹렬히 굴리는 동안 시간이 좀 흘렀나 보다. 망을 봐 달란 핑계로 자리를 피한 건 넷이었는데 온 건 한 명뿐이었다. 나머진 어디 갔지?

내 생각을 읽은 내 드라이어드들이 그를 경계하려 하길래 진정시켰다. 아직 들키면 안 돼.

사람은 술김에 행동이 대담해지는 때가 많다. 마침 내 주사도 겁대가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술이 아니라 카나비스의 힘에 취해 있는 상태지만.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지금 입금하면 돼?”

“네?”

“그러려고 혼자 온 거 아니었어? 당신 맞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요.”

“주위에 듣는 사람도 없고 이제 연기할 필요 없는 거 아냐? 내가 신호를 주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혼자 오기로 했잖아.”

시종일관 내 헛소리에 어이없는 얼굴을 짓던 그가 표정을 굳혔다.

“선수금은 이미 보냈고 카나비스를 따로 빼돌리면 중간 비용을 정산하기로 했지. 그리고 내가 안전히 카나비스와 함께 1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여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면 마지막 금액을 주기로 했잖아.”

곧잘 대답하던 남자의 입이 꾹 다물렸다. 무슨 생각을 할까? 조직에 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돈에 약해질 정도로 탐욕적일까? 아니면 돈에 굴복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결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금액을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이 녀석을 보호하고 있던 여자를 죽여 그대로 튀려고 했는데 당신들에게 들켜 버렸지 뭐야. 그래서 아쉽지만 거래를 재개해야지. 선수금은 다이아가….”

섣불리 단위를 제시하면 안 된다. 난 아직 여기 다이아 시세에 약했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손가락을 한 개 펼쳤다. 1은 뭐 아무 의미 없다. 그냥 수표 한 장, 이런 느낌이었다.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하는 것은 저쪽이겠지.

“1… 100….”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걸로 보아 가슴 한편에서 탐욕이 약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100은 그 정도 떨림밖에 안 된다는 거지?

“백이라니? 천이었잖아?”

“천….”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엘더도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눈치껏 열심히 입을 닫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어쩔 거지. 선수금은 보통 주기로 한 돈의 몇 퍼센트 정도의 극히 일부분밖에 안 되잖아? 일부분이 천인데 중간금도 있다 했고 완수금도 있다 했는데 얼마나 클까? 응?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할까? 아니면….

“그랬죠. 천이었죠….”

넘어왔다!

“중간금은 선수금의 두 배였지. 2천. 기억나?”

곁에 붙은 엘더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럼요. 연기… 그래, 연기를 했을 뿐입니다. 혹시 주위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잠시만요.”

그는 황급히 고개를 휙휙 돌리다 망을 보겠다던 자리 쪽으로 빠른 걸음을 했다.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을까 하고.

“2천이라니? 뭐 하는 거야!”

결국 참다 못한 엘더가 소리쳤다.

“2천이면 껌값이지.”

“‘그래서 18번째 테라리움 쪽을 고집했던 건가….’ 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 주인, 제이는 거짓말에 능숙하시네요. 완전 다른 사람 같았어요.”

“평소의 나라면 꿈도 못 꿨을 거야. 목소리가 덜덜 떨렸을 거 같아. 그런데 내가 좀 취한 상태라.”

메스키트가 카나비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빨리 나와 떨어뜨려 놓고 싶다는 눈빛 같았다.

그사이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이제 괜찮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내가 아무 의심 없이 믿는 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꽤 거액이 오가는 거래인데 내가 무턱대고 믿으면 좀 그런 느낌이겠지. 쉬운 함정을 파 줘야겠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맞는 건 확실해? 수상한데. 선수금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것 같고…. 만 다이아가 걸린 일인데.”

엘더를 슬쩍 밀어서 메스키트의 등 뒤로 보내 가렸다. 자꾸 낚아 올린 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면 곤란하다.

“만…. 선수금 천에… 중간금이 2천… 나머지 7천….”

목소리가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제가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우리 암호가 있었잖아? 당신이 맞다면 알겠지?”

“암호요…?”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완전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암호 따윈 없다. 그냥 이렇게….

“성냥은?”

“성냥… 성냥은 마치….”

“자네가 맞군.”

뭘 대답하든 내가 다 맞다고 해 주면 되니까.

“마치…? 마치 이 자식….”

“응? 뭐라고 그랬어?”

겸사겸사 내부 분열도 일으켜 주면 좋고. 일이 잘못되더라도 날 물 먹였던 가짜 의사는 어떻게든 되겠지. 일부러 못 들은 척 굴자 그가 크게 헛기침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것 보세요. 제가 맞잖아요.”

“그래, 중간금을 지금 주도록 하지. 저번에는 입금이 아닌 전부 현물로 달라고 했는데 이번엔?”

“이번엔 제게 바로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상대가 핸드폰을 꺼내길래 나도 핸드폰을 꺼냈다. 수레가 탈탈 오자 2천 개의 다이아를 넣어 보냈다. 난쟁이들이 뭐라고 떠들어 댔지만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 이름이 칼롱이었구나.

2천 다이아만 먹고 꿀꺽할 것을 대비해서 일부러 완수금을 크게 잡았다. 완수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18번째 테라리움에 날 데려갈 건데, 마을이니까 날 어떻게 할 순 없지 않을까?

내가 꽁꽁 묶여 있을 때 들은 바로는, 주인의 의지에 반하여 월렛에서 다이아를 강제로 갈취하진 못하는 것 같고.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는 그의 눈이 미친 듯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금액에 엄청 동요하고 있었다.

“자, 서두르도록 해. 우리 보스는 참을성이 없거든. 이번 거래를 잘 터야 다음도 있을 거 아냐? 도주 비용까지 요구하길래 만 다이아씩이나 줬는데 말이야.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잘 숨어 있으라고?”

그의 태도가 매우 공손해졌다.

“네, 당연합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아까처럼만 잘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그 뒤로는 그가 알아서 잘 행동해 주었다.

그는 아주 많은 돈 앞에서 의리를 버릴 만큼 무척이나 탐욕적인 사람이었다. 동행하는 일행들에게 핑계를 들어 자리에 남기고 점차 수를 줄이더니 급기야 팀킬을 했다.

동료에게 아무 의심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뒤치기를 시전할 때 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했다. 예상했던 척…. 물론 좀 거들어 주기도 했다.

먼저 내게 말을 걸길래 리더급이 아닌가 했는데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는지 실력도 좀 되는 것 같았다.

***

세계수의 축복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이 곧 마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곧 합류하기로 한 지점입니다.”

아뿔싸. 테라리움 안에서 만나기로 했던 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행정 관리원이 핸드폰 하나로 마을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그런 범죄 행위를 대놓고 할 순 없겠지.

“여기 잠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저 중엔 감지 능력이 좋은 드라이어드가 있으니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그건 조금 고민되는데. 날 지킬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아티팩트로 보내라고? 메스키트나 엘더가 절대 안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그가 자신의 드라이어드 중 하나를 아티팩트로 돌려보냈다.

“카나비스는 제 드라이어드인 척 숨길 수 있지만 당신의 드라이어드들은 기운도 강해서 무리입니다.”

“그래.”

“너…!”

엘더가 화를 내길래 가만있으라고 속으로 열심히 말했다. 한 번 믿어 보자. 돈으로 산 믿음을. 팀킬도 했잖아.

거의 강제적으로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냈다. 제일 마지막에 남은 메스키트가 내 어깨를 가볍게 쥐고 눈을 마주했다.

마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올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눈빛 같았다. 오히려 아티팩트로 돌아가 달라고, 괜찮을 거라고, 어르고 달래야 할 건 나 같은데 상황이 반전된 것 같았다. 마치 내 선택에 내가 최대한 안심할 수 있도록.

메스키트는 너무 나만을 위해 사고했다. 모든 행동과 생각의 중심은 나. 그래서 과한 그 애정과 충성에 정말로 내가 안심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메스키트가 아티팩트로 들어간 것을 확신한 그가 음침하게 몰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일이 틀어졌다. 마치가 배신자야. 다른 조직이 더 있어.”

설마? 나 또 함정에 빠진 거야? 몸을 숙이고 있던 곳에서 풀을 꽉 쥐었다. 아티팩트가 잘게 떨렸다. 그래도 아직 기다려 줘.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일행이 당했다. 도움이 필요해.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난 전투로 체력이 많이 빠졌으니 대신 보고를 드리러 가겠다.”

그의 말에 몰려 있던 자들이 우리가 왔던 길로 우르르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멀어지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그가 나를 향해 고갯짓했다. 돈이… 이겼다.

“금방 들통날 겁니다. 지금쯤 남겨 놓은 놈들도, 뛰어간 놈들도 이상을 눈치챘을 거예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다급히 뛰어 겨우 18번째 테라리움에 입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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