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에겐 메스키트보다 감지 능력이 더 뛰어난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불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기운을 교란시키며 보초병이 묻힌 곳에서 튀어나와 기습한 드라이어드가 눈깜짝할 새에 엘더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범죄 조직을 너무 얕봤다.
내 목숨이 저당 잡히자 내 드라이어드들은 빠르게 항복했다. 메스키트는 야차같이 무서운 얼굴을 했지만 기세에 밀린 자가 실수로 내 목에 상처를 내자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었다.
전투로 밀리지 않을 상황이었어도 나라는 약점이 너무나 컸다. 이자들은 드라이어드들의 약점을 간단하게 간파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네놈들의 드루이드는 죽는다!”
“내 주인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네놈들을 모두 박살 내 버릴 것이다!”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이상한 고리가 끼워지고 메스키트, 데이지, 엘더가 거칠게 끌려갔다. 반항은 무의미했다. 놈은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보란 듯이 칼로 내 목을 누르고 있었다.
묘목 취급을 당한 바곳만이 나와 함께 묶여, 쓰러진 카나비스 옆에 앉혀졌다. 겁에 질려 울고만 있어 위협이 되지 않아 보였던 데다 바곳의 종을 알아차리는 드라이어드들이 아무도 없어서 그냥 넘어가게 된 것이다.
내 처분을 두고 온갖 말들이 오갔다. 월렛은 주인의 의지 없이 손댈 수 없으니 내 앞에서 내 드라이어드들을 상처 내며 다이아를 꺼내게 하겠다거나, 목격했으니 죽여 버리겠다거나, 좋은 드라이어드들을 가지고 있으니 노예처럼 쓰겠다거나.
카나비스가 당하는 모습을 볼 땐 몸서리치게 소름 끼쳤는데 막상 내가 인질이 되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쩐지 멍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내 뇌가 현실을 회피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목에 난 상처가 따끔거리며 점차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뭐야, 왜 별로 안 무섭지?
“쥐새끼처럼 몰래 보고 있으면 안 들킬 줄 알았냐?”
“쥐새끼 소굴이라 안 걸릴 줄 알았지.”
그 순간 눈앞이 반짝였다.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아픈 순간이었다. 카나비스를 지독하게 때리던 놈이 이젠 내 뺨을 때렸다. 머리가 둔탁하게 땅에 부딪히고 입 안이 얼얼했다.
와 진짜 세게 때리네. 엄청난 불과의 전투에서도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는데, 새삼 난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정말 애지중지 보호받고 있었구나. 바곳이 비명을 지르며 작은 몸으로 애써 날 그들의 시야에서 가리고 있었다.
내가 시들링처럼 강했다면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약점이 될 일도 없었는데. 드라이어드가 없는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저 애새끼 좀 치워 봐. 시끄럽게 빽빽 울기나 하고. 다른 놈들과 달리 보잘것없는 드라이어드 같은데 저건 그냥 죽여 버리자고.”
바곳은 두 팔이 묶였어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
그런데 얻어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섭긴커녕 자꾸 정신이 뚜렷해졌다. 여기 오기 전만 해도 정말 두려웠고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때도, 카나비스가 당하고 있을 때도 무섭고 끔찍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겪게 되니까 ‘뭐야, 생각보다 별거 아니잖아. 뺨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아프긴 해도.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는데. 이 정도야, 뭐.’ 하면서 마치 내 상황과 정신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미친 건가?
소리도 안 지르고 눈도 깜짝 안 한다며 독한 년이란 소리를 듣자 비로소 시야가 다른 풍경을 잡았다. 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리는 바곳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울어서 붉어진 눈으로 날 보는 카나비스가 보였다.
설마… 너…?
“아니야. 이 녀석의 드라이어드들을 좀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죄다 높은 등급이었어! 엄청난 녀석도 있었다고! 혹시라도 풀려나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럼 녀석들이 보는 앞에서….”
또 손가락을 자르네 마네 하고 있었다. 카나비스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때 카나비스가 날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 내게 뭔가를 하고 있는 거지?
제 주인과의 약속도 어기고 스스로 힘을 쓸 정도면 저 드라이어드는 나를 자신의 마지막 희망쯤으로 여겼나 보다. 확실히 메스키트에게 들은 것처럼 위험한 힘이긴 하네. 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면.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 될 것 같아.
카나비스가 간절하게 유지시켜 준 내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닌 걸까? 아니,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다 데려가지 않았잖아. 웃기게도 바곳을 옆에 두었어. 얘가 어떤 애인 줄 알고? 솔직히 따지고 보면 어쩌면 메스키트보다 얘가 더 위험할 수도 있는데.
우리 복병. 우리 귀염둥이. 갑자기 헤실헤실 웃는 날 보며 바곳이 울음을 그치고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우리 귀염둥이는 할 수 있어? 그치? 너 완전 쩔잖아. 너한테 팔 좀 묶인 게 무슨 소용이겠니?”
“이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내가 얘 데려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우리 파티 힐러는 디버프 해제를 못 하거든. 너넨 디버프 해제 있어?”
“뭐라는 거야? 머리를 부딪쳐서 맛 간 거 아냐?”
나는 어깨와 다리로 땅을 밀어 꿈틀꿈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바곳의 후드에 꽂힌 그것을 왕 물었다. 고개를 틀자 쉽게 뽑혀 나왔다. 잠깐 움직인 것으로도 힘들어서 머리를 땅에 뉘었다. 그리고 잠시 뒤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바곳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날 죽음의 늪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푸른빛의 나방들과 끔찍한 독의 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바곳은 혼자서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만큼 능력이 광범위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때보다 파워가 업 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 엘더 정도나 되는 힐러가 간신히 버텼는데, 여긴 그 정도 되는 힐러가 있을까?
바곳의 공격이 맹렬해서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슬쩍 틀어 높이 바라보니 저마다 중독되어 눈가가 파랬다.
비록 방심했지만 엘더를 단숨에 무릎 꿇게 했던 마비 능력은, 우습게도 바곳에게 내성이었다. 너무 강한 독이라 그 어떤 독도 아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쪽의 소란에 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격리되었던 곳도 소란이 일어났다.
바로 잠깐 사이에 내 몸이 누군가에게 풀썩 안겨 들어 올려졌다. 묵직한 금속의 소리. 메스키트였다. 지금은 메스키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든 가슴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나 완전 괜찮아.”라고 말해 줬다.
주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내가 안전하게 있는 한 내 드라이어들에게 약점은 이제 없었다. 중독 디버프를 받은 적들은 분노한 내 드라이어드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나른해지는 정신과 몸에 눈이 감겼다. 잠깐 감았다 떴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던전처럼 덩굴이 우거진 곳에서 벗어나 사방이 탁 트인 곳을 이동하고 있었다.
줄로 꽁꽁 묶여 있던 손발은 자유로웠고 이상한 고리를 채워 놨던 아티팩트도 멀쩡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내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처리해 준 것 같았다.
“제이… 괜찮아요?”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오히려 완전 기분 좋은데.”
바곳이 우는 소리도 안 들리네. 제어 장치가 다시 꽂혔나 봐.
“카나비스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오히려 카나비스가 무사하다는 것에 놀랐다.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은 바곳과 영혼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바곳이 디버프를 해제해 준 건가?
“저는 어려 보여도 존재 자체로 약인 몸…. 독에 내성이 있는 몸입니다. 물론 당신의 드라이어드가 더 강했더라면 저조차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그리 답했다. 그리고 아마 바곳이 더 강했다면 자신의 힘도 내게 통하지 않았을 거란 말도 덧붙여서.
카나비스는 어쩐지 구해진 것치고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외톨이처럼. 혹시나 우리 드라이어드들이 저 아이 때문에 내가 위험해졌다고 생각해서….
“아직 영향권이네. 더 떨어져야겠어.”
그 말에 카나비스가 더 멀리 물러났다.
“그런 건 아냐. 저 드라이어드가 너에게 힘을 쓴 후부터 저 녀석의 존재만으로도 계속 네가 영향을 받고 있어서 그래. 주인이 곁에 없어서 힘이 제어가 되지 않는 거야.”
난 입을 안 연 것 같은데 어떻게 내 생각을 찰떡같이 알아맞혔지?
“평소와 다르게 네 생각이 우리들에게 줄줄 새고 있어.”
헐….
“내 주인, 제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의 힘에서 풀려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지금은 무척이나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가 되어 드라이어드들과의 영혼의 교감이 높아진 상태라서 그래요.”
와… 이거 진짜 위험한 힘이네. 마치 중독될 것 같아.
“그래요. 과거 이러한 힘을 이용해 광적으로 전쟁에 내몰렸던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통과 두려움도 잊게 만들죠. 하지만….”
“응. 약쟁이가 되고 싶진 않아.”
엘더가 도움이 될 거라며 기운을 계속 불어넣어 주었다. 약 기운이 밀려나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바곳을 얕잡아 봐서 다행이야. 큰일을 해내 줘서 고마워. 이제 그거 네가 스스로 제어만 할 수 있으면 딱인데.”
칭찬은 잊지 말고. 엄청 울었는지 기진맥진해 있는 바곳에게 말했다. 바곳은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엘더가 속 편한 소리를 잘도 한다며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냐고 잔소리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찾았다! 여기야!”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우릴 뒤따라 온 다른 잔당인 건가? 또다시 바곳의 제어 장치를 뽑아다가….
“안심하세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도와드리려는 거예요.”
조심히 다가온 남자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계속 누워있을 수만은 없어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스키트가 재빠르게 부축해 주었다.
“아… 그 의사의….”
“네, 맞습니다. 속히 저희가 안전한 18번째 테라리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는 어딨죠?”
“저어기.”
카나비스를 가리키니 그가 화색이 되어 달려갔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잔당의 위치를 묻길래, 왔던 길을 모르는 나 대신 데이지가 알려 주었다.
“어떻게 이 드라이어드를 구출하신 건가요?”
“어… 그게….”
“몰래 데리고 도망쳐 나왔다. 아마 우릴 쫓고 있을 수도 있어.”
엥? 바곳 덕에 모두 전멸시킨 거 아녔어? 우리 도주 중이었어? 엘더의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 하지만 엘더가 눈짓을 하길래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알려 준 위치로 몇 명이 향했다.
“자, 어서 네 주인이 있는 1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자.”
“제 드루이드님은 무사하신가요?”
“그래,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18번째라…. 근데 응급 환자가 있어서 17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던 길이라고 안 했나? 내가 헷갈린 건가? 난 17번째 테라리움에 미리 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은 또 줄줄 샜고 드라이어드들의 표정도 바뀌었다.
그리고 난 보고 말았다. 카나비스의 팔뚝을 잡고 이끌려는 그 남자의 손목을. 어디서 많이 본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화상을 입었는데 모양이 완전 똑같을 우연이 없다면…. 우리가 구해 준 의사, 이 일의 시작이 된 그 의사 ‘마치’라는 자의 손목에도 같은 흉터가 있었다.
얼핏 보면 문양처럼 생긴 똑같은 흉터가. 둘은 확실히 같은 사람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