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 힐 좀 해 봐.”
무엇에 저 사람이 그렇게 다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메스키트는 주변을 극도로 경계했고, 내가 그 사람 곁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난 드라이어드를 상대로만 내 기운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고, 하물며 저 드루이드는 나와 영혼이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 더욱 어려워.”
엘더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확실히 엘더는 드라이어드들에게 힐링을 제대로 꽂는 것에 비해 내겐 약간의 기운을 불어넣는 정도로만 힘을 사용할 수 있었지.
그건 그래도 드루이드는 작은 세계수라더니, 내가 아닌 드루이드는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지. 남남. 그래도 넌 드라이어드지만 나는 사람이라, 같은 사람이 저리 큰 부상을 입고 누워 있으니 어찌 내가 괜찮겠니.
내가 떠밀자 엘더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스태프를 겨누었다. 엘더에 비해 미약하지만 바곳도 스태프를 들어 주위에 산약초처럼 맑은 향을 내는 기운을 뿜었다. 흰빛이 넘실거리자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있던 그가 눈을 슬며시 떴다.
“도와주세요….”
“저기요! 제가 좀 괜찮은지 살펴보러 다가갈 건데요! 가만히 계셔야 해요! 혹시라도 허튼짓을 한다든가 하면 제 드라이어드들이 좀 과하게 저를 보호하기 때문에 강제로 가만히 계시게 만들지도 몰라요!”
무력으로 말이죠! 메스키트의 눈치를 슬쩍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흰 가운을 입은 거면 의료 계통 종사자 같은 건가? 아니면 연구원? 가까이 다가가서 물도 좀 먹이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내 주머니를 뒤져 보니 응급 구조 키트가 손에 잡혔다.
잡화점에 있는 것은 죄다 드라이어드들에게만 쓸 수 있는 포션 같은 것뿐이었고 유일하게 내게도 쓸 수 있는 아이템은 이것뿐이었다. 물론 대량 구매해 뒀다.
흰 상자를 열기만 했을 뿐인데 타깃을 지정하여 아이템이 자동 사용되었다. 다행이다. 붕대를 감는다거나 하는 의료 지식도 없고 안내서도 없던 아이템인데, 무작정 집어 오기만 했기에 걱정했는데 알아서 사용되네.
하지만 그를 완벽히 치유할 순 없었다. 아이템 이름 그대로 응급처치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핏자국은 여전했지만 다친 곳이 좀 더 깨끗해지며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한 흉터가 팔에 드러났다.
이 정도면 병원을 가야 하나? 드라이어드 말고 사람이 가는 병원도 테라리움에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테라리움에 가려면 거리가 좀 될 텐데.
“도와주세요….”
“제가 좀 치료를 하긴 했는데 병원을 가셔야 해요. 제 드라이어드들은 당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드라이어드를 찾아 주세요…. 위험해요. 그 아이를 빼앗기면 위험해요….”
“네? 드라이어드요?”
아티팩트로 부르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그의 손목을 봤는데 붉은 흉터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드라이어든데요?”
“위험해요…. 위험한 상황이에요….”
“어떤 드라이어드를 말하시는 건데요? 제대로 알려 주셔야지 제가 돕죠!”
“함부로 남을 돕는 거 아냐.”
엘더가 옆에서 툭 치고 들어왔다. 그건 맞긴 한데. 혹시 이거 퀘스트 같은 건가?
“카나비스예요. 그 아이를 노리는 사람들이 데려갔어요.”
“카나비스는 또 뭐야? 처음 듣는 식물인데.”
하지만 메스키트는 물론 엘더도 무슨 드라이어드인지 알아챈 것 같았다. 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아이는 나쁜 곳에 이용될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그는 갑자기 미치광이처럼 소리치다가 이내 힘이 달렸는지 풀썩 쓰러졌다. 모 게임처럼 도감이라든가 하다못해 백과사전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겠다. 주제는 식물이나 드라이어드 종류? 카나비스라는 드라이어드가 대체 뭔데?
다행히 다른 지성들이 활동했다. 메스키트나 엘더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자신들은 내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자 메스키트가 입을 열었다.
“내 주인, 제이. 아무래도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 같군요. 우리들이 세계수에 있을 때, 엘더는 아직 묘목 시절이었을 때, 드라이어드들에게 논란이 되었던 것이 있었답니다. 아주 오래전 모체들의 경험담에 따른 논란이었지요. 모체가 드루이드는 물론 사람들에게 위험한 종들은 많답니다. 여기 있는 바곳 아이라든가 얼마 전에 만났던 벨라돈나가 그러하죠.”
그 말에 바곳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독이나 산성 액처럼 생명에 위험을 주는 것 외에도 더 끔찍한 것들이 있다는 게 논란의 시작이었답니다. 영혼을 오랫동안 죽음의 기운으로 잠식시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종들이 있죠.”
그게 방금 들은 카나비스라는 드라이어드와 연관이 있는 거겠고?
“독은 해독시킬 수 있고 외부의 상처는 치유할 수 있으며 하물며 드루이드를 만나게 되면 그 힘들은 어느 정도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답니다. 하지만 영혼을 잠식시키는 힘은 그 대상이 작은 세계수라도 완전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 버린 자들은 온갖 그릇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이 영혼부터 파괴되어 가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힘에 의지하게 만들죠. 듣기론 먼 과거의 어느 테라리움의 인간들이 그 힘으로 인하여 완전히 괴멸할 뻔했다고도 해요. 테라리움끼리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도 하고….”
“어… 잠깐만. 나 뭘 말하는지 알 거 같은데. 계속 이야기해 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 드라이어드들은 우리의 작은 세계수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종들은 세계수의 밖으론 나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답니다. 물론 전 반대였습니다.”
“왜 반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필요한 곳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직접적으로 인간들을 치유할 수 없으니까요. 이건 엘더에게 여러 차례 들어서 알고 계시죠?”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힘들어하거나 아픈 기색을 조금만 보여도 엘더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엘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게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뿐이었다.
엘더의 치유의 힘은 같은 드라이어드들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지만 인간인 내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완전 치유가 가능했다면 저기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이름이 ‘마치’라는 드루이드도 어떻게든 해 줬을 것이다.
“인간이 아플 땐 같은 인간이 치료해 주어야 한답니다. 그 종들은 그런 상황에 필요했어요.”
“그렇습니다. 제가 그런 곳에 필요한 사람이죠. 저는 의사입니다.”
그는 정신을 차렸는지 틈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의사였다니. 흰 가운을 입고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자기 신분을 주장하고 있었네.
“저는 17번째 테라리움에서 응급 수술 요청이 와서 제 드라이어드와 함께 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제 드라이어드 카나비스는 진통과 안정 등 여러 의•료•적•인 효능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처럼 좋지 않은 곳에서도 아이를 찾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잠깐만…! 설마 진짜로 카나비스 그거… 마약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찾는 자들이죠. 카나비스는 다르게 불리기도 합니다. 대마초라고도….”
마약이라고 했지, 그 유명한 대마초인 줄은 몰랐는데요? 이거 갑자기 RPG 게임에서 범죄 영화라든가 미국 수사 드라마가 된 기분인데?
마약이면 막 마피아도 있고 갱도 있고 그런 거 아냐? 원래 이 게임 몇 세 이용 가능 게임이었던 거지? 물론 요즘 모바일 게임들이 다 벗고 나오고 피 튀어도 잘도 12세, 15세 달고 나오긴 하는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보다 FBI나 CSI, 그런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 거 아냐?”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그 아이가 마약으로 이용되기 전에 막아야만…! 그리고 저만 기다리는 응급 환자가…!”
왜 퀘스트를 강제로 떠맡기세요? 전 아직 수락한다고 안 했는데요! 그리고 님은 NPC가 아니라 저랑 같은 유저잖아요? 무슨 유저가 퀘스트를 주고 그러세요?
“아직 성목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라…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무슨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 하나만 데리고 이 험한 세상에 모험을 나오세요? 그리고 내가 애들한테 약한 건 어떻게 알고 막 동정심을 자극하시는 거죠?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니까 근방만 빨리 찾아보면….”
“도와주게? 그런 것치곤 표정이 탐탁지 않아 보이는데?”
엘더가 조금 하얗게 질린 날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물론 마약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엮이니까 좀 두려운데. 아직 어린 드라이어드라잖아.
날 처음 보는데 나의 약한 면을 무섭게 간파했어!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대로 지나쳐서 가 버리면 죄책감 때문에 잠도 못 잘 것 같아.
“빨리 끝내 버리자. 마침 우리에겐 수색에 도움이 되는 메스키트가 있으니까. 나쁜 놈들이면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때려눕혀 줘! 물론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연루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운이 팍팍 오지만 빠르게 치고 튀어 버리면 될 거야!
“카나비스와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들에 관한 논란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랍니다.”
메스키트는 굳은 표정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참담한 기운을 뿌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마지못해 그의 의뢰를 수락한 나를 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내 주인, 제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제이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메스키트마저 내 의중을 물으니 약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불을 상대하는 것처럼 게임적인 상황과 달리 인간이 엮이는 현실감 있는 상황이라서 겁이 났다.
“그럼 조금만 살펴보고 아니다 싶으면 차라리 18번째 테라리움으로 빨리 달려가서 신고를 하자!”
“그사이에 제 드라이어드가…! 위치만 알려 주신다면 저라도 혼자 가서…!”
“전 지금 파티도 없는 솔플이고 싸울 줄도 몰라서 최대한 도와드릴 수 있는 데까지만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이것도 제 콩만 한 용기를 쥐어짜 낸 거거든요? 그쪽도 드라이어드 하나 없는 혼자잖아요? 용케 살아남은 거에 감사하시고 차라리 그럴 힘이 있다면 먼저 근처 테라리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때요?”
안 가고 버틸 줄 알았더니 갑자기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그러죠! 그게 효율적이겠네요. 전 먼저 17번째 테라리움에 가 있겠습니다. 마침 응급 환자가 있는 곳도 그곳이고.”
그러면서 다리를 질질 끌며 말릴 새도 없이 길을 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 습격을 받았다면서 혼자 간다 해도 겁을 안 내고, 중요한 드라이어드라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덥석 맡겨 버리는 거지?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