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는 좀 더 아티팩트 공방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온종일 상자만 열었더니 배가 고팠다. 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빨리 내가 입을 장비를 마련하고 상가 쪽 볼일을 마무리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여관에 들러 맛있는 것도 먹고 푹신한 침대에 좀 누워야지.
밖을 나서는데 잔뜩 쌓인 빈 상자들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티팩트 공방 직원들이 보였다. 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 세상에! 데이지니?”
근사한 식당이나 여관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간 곳은 내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여관이었다. 데이지를 살뜰히 챙겨 주셨던 친절한 주인분이 계시는 여관.
그때 데이지와 함께 먹었던 음식들도 전부 좋았지. 이상한 세계로 떨어져 조금 혼란스럽고 겁도 났던 마음이 평안을 누렸던 곳.
주인은 금방 우리를 알아보았다. 특히 너무나도 달라진 데이지를 보고 놀라워했다. 여관 주인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가득 짓고 데이지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정말 데이지가 맞니? 몰라보겠구나!”
그녀는 여전히 드루이드가 아닌지라 데이지와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키가 좀 컸나? 아니 많이 컸구나! 얼굴도 좀 더 성숙해진 것 같고. 예쁜 꽃이로구나. 그래 이게 너의 꽃이란 말이지?”
데이지가 성장함에 따라 머리에 달린 예쁜 레드 데이지 꽃도 활짝 폈고 탐스러워졌다. 그녀는 데이지의 머리에 달린 꽃을 한 번, 잘 차려입은 데이지의 장비들도 한 번, 기분 좋게 열이 오른 볼도 한 번 살뜰히 살피며 연신 칭찬을 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얼른 음식을 준비해 올게요.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이니….”
테라리움이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된 이후로 절대 무료는 안 된다!
“제 지갑이 열리는 날이죠! 제가 쏠게요! 전부! 에브리 원! 다 같이 먹어요!”
물론 내 드라이어드들은 음식 섭취가 필요 없지만, 여관의 사람들 전부 다를 위해서 골든벨을 울려 주지. 난쟁이들에게도 기분 좋은 날이 되겠네.
모처럼 데이지의 성장을 맘껏 자랑해도 들어 줄 사람이 생겼다. 빨리 와서 데이지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스탠바이입니다!
새로 맞춘 장비는 아직 몸에 완전히 적응이 되지 않아 답답했고, 온갖 과일 맛과 디저트 맛이 나는 특별 주문 비상식량들은 포장을 뜯지 않고 상자째 인벤토리에 들어가 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둘이 앉았던 테이블엔 이젠 다섯 명이 앉아 있고 아는 것이 없어 답답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마음속엔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대신 자리했다.
같은 장소였지만 모든 것이 새로웠다. 새삼 내가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잘 좀 집중해 봐.”
“난 노력하고 있는데 네가 자꾸 그 예쁜 얼굴을 들이밀면서 내 집중을 방해하잖아. 여기 투명한 열매에 네 얼굴이 비치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그것 때문은 아니잖아.”
애가 셋이다. 좀 큰 데이지와 작은 바곳과 좀 삐진 엘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민들레 군락지로 향했다. 데이지2의 장엄한 연설이라 하나, 그 내면에 숨겨진 징징거림이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티팩트 공방에서 과하게 넘겨 놓은 가구들을 28번째 테라리움이 감당하기에는 복구도가 떨어져서 당장에 일손이 매우 급했기 때문이다.
제이 님, 이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내 보았는데 몹시 쾌적했어요. 가구에 담긴 효능이 제가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라서 그대로 통하나 봐요. 이 점을 이용한다면 좋은 효과를 창출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일손이 필요하죠. 저 혼잔 무리에요. 엄청 무리예요. 재잘재잘.
엘더의 나비는 그에겐 불행히도 우리가 가려던 방향과 좀 멀었다. 당장 18번째 테라리움, 그리고 바곳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16번째 테라리움, 이 두 개와 완전 상반되는 30번대 테라리움들이 있는 방향으로 날갯짓을 했다.
운이 나쁘다면 40번대 테라리움일 수도 있겠지. 엘더를 달래고 달래서 민들레 군락지에 겨우 도착했는데 또 다른 난관이 존재했다.
바곳과 나는 어쩌면 어떠한 운명적인 힘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으로 야생의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하려 했을 때 바로 성공했던 것을 보면. 하나 지금 민들레 아이들과 영혼의 연결을 하려는데 그게 어쩐지 쉽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과수원에서 가져온 설익은 열매가 잘못된 걸까?”
마음의 준비는 물론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아이들을 보낼 마음을 다잡은 단델리온도 조금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상황을 모르는지 무감각한 건지 모를 민들레 아이 둘만이 해맑게 날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내 레벨이? 아니 메스키트는 내가 충분히 저 아이들을 수용할 만큼 영혼의 그릇이 무척 커졌다고 했어. COST는 문제가 아니었고.
바곳을 영입했을 때를 열심히 떠올려 보았다. 차가웠던 열매는 차츰 따뜻해졌고 내 영혼의 힘으로 샛노란 황금빛으로 익게 만들었지.
그런데 따뜻해지기는 해도 좀처럼 익을 기세가 안 보였다. 거기에 조금 삐진 엘더가 툴툴거리니 집중도 잘되지 않았고.
“너무 어린아이들이라 그럴까요?”
바곳도 똑 닮은 크기일 때 영입을 했는데….
원인을 이것저것 제시해 보던 단델리온이 문득 날 바라보았다. 어쩌면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 내면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작은 세계수님, 무엇이 걱정인 거죠? 잘 집중해 보세요.”
그녀의 두 손이 열매를 쥐고 있는 내 손을 포개어 쥐었다.
머릿속에 단델리온의 온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제게서 묘목들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묘목들에겐 충분히 지혜를 전달해 주었답니다. 아이들이 자란다면 분명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당장도 아이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대체 뭐가…. 아….
포개어진 두 손이 떨어져 나갔다. 단델리온은 무언가 크게 깨달은 얼굴이었다. 내게 받은 다이아가 숨겨진 품에 닿은 손. 그리고 바곳을 잔잔한 호수의 수면 같이 바라보는 눈.
“묘목들은 물론 열매에도 문제는 없었답니다. 작은 세계수, 드루이드님께도 문제가 있으셨던 것이 아니에요. 제게 있었군요. 저의 작은 불안함을 아이들이 알아차린 거예요. 아이들은 절 걱정하고 있어서 떠나지 못했던 거군요. 이곳 포레스트의 왕인 제 생각을 아이들이 공유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불안도 알아차려 버린 거예요. 아이들이 저 때문에 마음을 다잡지 못하니 영혼의 연결이 어려웠던 거랍니다.”
단델리온은 두 민들레 아이들의 작은 어깨를 끌었다. 셋은 오랫동안 눈을 마주했다. 셋에게 어떤 교감이 오갔을까? 다시 아이들이 내게로 돌아왔을 땐 드디어 열매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남은 일말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포부를 밝혔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라도 된 것처럼 허황된 공약부터 데이지2의 생각을 빌린 성장 계획까지. 하지만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눈은 다시 푸르게 파도를 치고 있어서 헛된 걱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잠깐 사이 아티팩트로 살펴본 바,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아이들을 보내면 바로 부려먹을 줄 알았던 데이지2는 의외로 멘토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뿌리를 건실하게 해야 해!”
어디서 들어 본 조언 같긴 한데 의욕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두 민들레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잘 지도해 줄 거야.
“내 주인, 제이. 이제 세계수의 가지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장소에서 좀 벗어난 곳을 향할 거예요. 1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기 전까지 축복에 억눌리지 않은 위협적인 불을 만날 수도 있으며, 또한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그 위험에 혹시 삐친 엘더가 툴툴거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 쟤가 자꾸 내 신경을 좀 건드려. 스트레스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잖아.”
엄마가 일 다 끝나고 간다 했지? 나비도 가진 녀석이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 내 리스트에서 야생 엘더 플라워를 찾는 건 좀 아래쪽에 있단 말이다.
“꼬맹아, 혹시 조급한 거니? 데이지 아이가 너보다 더 강해질까 봐?”
메스키트의 말에 엘더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좀 조용해진 것이… 설마…? 좀 놀리면서 괴롭히고 싶지만 입을 다문 것이 마음에 들어 참았다.
1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길에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을 넘었다. 사람이 오갈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암벽 등반을 해야 했으면 내적 갈등이 길어졌을 거야. 억센 나무들이 바위를 뚫고 자리하고 있었다.
풀밭 위보다 불에 타기 힘든 바위 위에 자리한 것이 그것들의 생존 방식이라고 했다. 나무들은 거대한 바위를 피해 햇빛을 받기 위해 몸체가 뱀처럼 구불거렸다. 바위를 뿌리가 인형 뽑기 집게처럼 통째로 감싼 것도 있었고, 구렁이처럼 휘감은 것도 있었다. 자연의 신비가 다른 필드에 오게 된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었다.
많이 발전한 나는 예전과 달리 틈만 나면 지도를 보지 않았다. 어디쯤 왔는지 애써 가늠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육체를 더 힘들게 하니까. 물을 입에 머금고 갈증을 해소하며 효율적으로 휴식 시간을 줄이는 법도 터득했다.
이렇게 팀에서 가장 약한 내가 힘을 내면 순조롭게 18번째 테라리움에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핸드폰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전까진.
약한 신호음이 잡히고 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메스키트, 잠깐….”
내 말에 무언가를 느낀 메스키트는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네트워크 신호를 잡는다며 원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모드를 바꿔 가며 오락가락 정신없이 굴었다.
아티팩트 네트워크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