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604)

사실 난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허니메이트로 점찍어 둔 드라이어드가 이미 있었다. 데이지였다. 그때는 그랬지. 데이지에 대한 육성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란 건 아니고.

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발견한 후, 처음의 마음이 리셋되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나비를 굳이 붙이지 않아도 쉽게 발견되는 종인 것 같으니까. 현재는 어느 드라이어드에게 직접 나비를 붙일지 고민이 되었다.

메스키트는 이미 강하니 엘더를 강화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처음 생각대로 데이지를 더 강화시켜도 좋을 것 같고. 운에 맡길까? 솔직히 어느 드라이어드를 강화하든 다 좋아. 나비가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도 뭐….

엘더가 날 툭툭 치며 빨리 메스키트를 아티팩트로 보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욕심난다, 이거지. 하지만 데이지도 별로 포기하고 싶은 눈이 아니었다. 바곳은 나비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차마 직접 내 손으로 어느 드라이어드 하나를 고르지 못하겠어!

노인에게 채집통을 받아다가 냅다 뚜껑을 열어 버렸다. 메스키트가 아티팩트에 돌아가기도 전에 팔랑팔랑 나비가 해방되어 날아올랐다. 나비는 곧바로 내 드라이어드들의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이미 예상된 모습처럼 메스키트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오랜 시간 메스키트의 어깨 주변을 맴돌며 앉을 듯 말 듯 하더니….

“어라?”

간만 보다가 휙 떨어져 버렸다. 노인은 드라이어드의 어깨에 나비가 내려앉으면 그때부터 허니메이트가 된다며 설명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경우는 예상 못 했던 듯했다.

반대로 메스키트는 나비의 모습을 보더니 어쩐지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나비는 엘더와 데이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영입하여 한층 성장한 데이지는 나름대로 나비의 입장으론 향기로운 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더는 치사하게도 꼼수를 썼다.

자욱하게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엘더 플라워의 달콤한 향기. 에라이, 반칙이라고 할 새도 없이 나비는 냉큼 엘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엘더의 어깨에 내려앉은 신비로운 오팔빛 나비의 모습과, 엘더의 하얀 머리칼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에 살짝살짝 나부끼는 모습이… 기가 막히게 장관이었던지라 말을 잃었다.

엘더는 승자의 웃음을 입꼬리에 매달고 데이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데이지는 굉장히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나비는 꼭 엘더의 펫처럼 주위를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으며 맴돌았다.

“페어플레이 해야지! 보니까 데이지한테 갈 마음도 있었던 거 같은데.”

“노멀 필드 나비라서 둘에게 끌렸던 거지 어차피 등급이 더 높은 날 택했을 거야.”

엘더의 말투가 지나치게 당당했다. 그건 나비 입장도 좀 들어 봐야 될 거 같은데. 사람까지 홀릴 기세로 향기를 뿜어 놓고! 나비를 홀려 놓고!

“그 말은 좀 틀렸단다, 꼬맹아. 필드 한정 나비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지. 그 나비는 좀 특별하다네. 우리 26번째 테라리움을 구원해 준 자네에게 줄 나빈데, 보통의 나비와는 다른 더 특별한 나비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그냥 나비를 줬어도 난 좋다고 받았을 텐데. 제가 뭘 알았겠어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특별한 나비길래? 더 화려하고 신비롭게 생긴 점? 물론 룩은 중요하지. 그렇고 말고.

“다른 나비들은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 시기를 지난 필드를 각인한다네. 하지만 그 나비는 필드가 각인되지 않은 나비라네. 원인은 알 수 없지. 필드의 기운을 뿜는 특정 채집통에 구애받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녔으니까. 만약 나비가 선택했다면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아닌….”

“그래요. 절 선택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럴 순 없었을 거예요.”

노인이 챙겨 보내 주겠다던 테라리움 지분 소유에 대한 안내지가 핸드폰에 도착한 것을 보고, 방을 나서며 메스키트에게 물었다. 이유가 뭔데? 나도 알려 줘. 엄청 궁금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엘더를 따라 나비가 쪼르르 따라 날아간다. 그러다 특정 방향을 향해 앞장서서 날다가 멈춰 선다. 엘더가 다가가면 다시 일정 거리까지 포르르 날아오른다. 마치 나비가 자신의 위치로 엘더를 부르는 것 같았다.

아, 저거 그거구나. 허니메이트를 맺은 엘더와 같은 종의 야생 드라이어드가 있는 곳을 알려 준다고 했지.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했어. 그렇다면 나비는 지금 다른 엘더 플라워가 있는 곳을 안다는 건가? 엘더와 같은 다른 드라이어드라니! 그 드라이어드도 미친 엘더처럼 미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걸까? 설마 성격도…?

“내 주인, 제이. 나비는 저와 허니메이트를 맺어 봤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한 거랍니다. 힘을 얻을 모체가 하나뿐이니까요.”

“헐….”

잠깐만. 나 방금 엄청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곁으로 작달막한 두 드라이어드가 엉겨 붙는다. 뭐가 그렇게 놀랍냐는 눈치였다. 너흰 못 알아들은 거니…?

메스키트가 방금… 힘을 얻을 모체가 하나뿐이라고 했잖아. 그 말은…. 이 세상에 아직 벨벳 메스키트 야생종은 없대. 유일무이한 최강 드라이어드! 내 드라이어드!

“나비 먼저 따라가면 안 돼?”

엘더가 눈치 없이 묻는다. 갈 곳이 오만 군데이고 할 일이 태산인데. 다 미루고 제 포레스트나 섭렵하러 가잔다.

“넌 안 놀라워? 메스키트의 야생종이 없다잖아.”

“뭐, 나도 내게 동종의 야생 드라이어드가 있다는 건 놀라웠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대충 예상은 했어. 나도 묘목이었을 때부터 다른 벨벳 메스키트 드라이어드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어. 괜히 그 대단하신 스페셜 등급이겠어?”

그 끝은 얄미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기분 나쁠 법도 한데 메스키트는 엘더를 그저 잠투정하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저것이 엘더를 업어 키운 연륜….

“아! 볼일은 모두 끝나셨나요? 여기 부탁하신 설익은 열매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내원이 다가왔다. 그가 살짝 비켜서니 나무 상자가 두 박스나 쌓여 있었다.

저것이 가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개수로 꽉꽉 채운 열매 박스란 겁니까? 속이 텅텅 빈 유리 공 같은 열매가 과수원 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데 모여 빛을 받으니 그걸 담은 상자가 마치 보물상자처럼 보였다.

솔직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딱 두 개였다. 민들레 아이 둘을 담을 수 있는 열매. 나머진 내가 여행 중 혹시라도 만날 야생 드라이어드를 위한 것.

자주 테라리움에 들를 순 없으니까 준비를 해 두려고 했던 거긴 한데.

“가지에서 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래 보관하실 순 있지만, 그래도 적정 기한이 있다는 건 잊으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래, 저게 문제였지.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열매다 보니 보관 기한 같은 것이 있어서 영구 아이템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버리면 열매에 담긴 축복이 사라져버려서 평범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도 많은 내가 환불해 주세요, 라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얼마예여?”

“개당 100다이아고 상자당 20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두 상자죠. 4천 다이아면 그래도 일반인에겐 꽤 많은 액수일 건데.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준비해 온 당신이란 사람. 날 너무 잘 알아.

백화점 가면 진짜 VVIP들은 가격 태그도 보지 않고 고른 뒤에 카드만 준다며? 그런데 난 가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일반 열매는 300다이아인데 설익은 건 1/3로 가격이 떨어지는구나.

내가 드라이어드 열매 뽑기를 했을 때와 같이 숫자가 적힌 상자를 그가 들고 왔다. 핸드폰을 깨우고 있는데 엘더가 오만상을 하고 다가온다. 오만상을 해도 뒤따라 포르르 날아오는 나비만큼 예쁜 얼굴이다.

“그 많은 걸 어디에 쓰게? 다 필요도 없잖아.”

요지는 낭비라며 또 다이아를 쓴다며 찡찡거리는 거였다. 하지만 여기 핸드폰을 잘 보렴. 이렇게 작은 난쟁이들이 다이아를 쓰라며 난리를 피우지 않니? 아 넌 안 보인댔지.

상자에 다이아를 콸콸 쏟아 내고 있는데 찌푸린 얼굴이 풀릴 줄을 모른다. 모처럼 테라리움으로 돌아왔는데 쇼핑이나 할까?

나 장비도 새로 맞춰야겠고, 지금 입고 있는 건 쪼렙 장비니까. 아티팩트 공방도 또 방문해 줘야지? 바곳도 새로 영입했으니 아티팩트를 꾸며 줘야 할 거 아니겠니.

맛이 구린 비상식량은 죄다 버려 버리고 사람이 먹을 만한 걸로 새로 구하자. 그러고 보니 요리다운 요리도 다시 먹고 싶어졌어.

하루는 테라리움에 머물러 피로도 풀고 느긋하게 쇼핑도 할 거라며 예정을 말하고, 원하는 건 다 사 주겠다고 하니 그제야 얼굴이 풀린다. 다루기 너무 쉬운데 또 속이 너무 훤하게 보여서 얄미워. 저 예쁜 얼굴은 분명 저 성격에 대한 대비책일 거야.

값을 모두 지불하고 인벤토리에 설익은 열매를 모두 챙긴 후 과수원을 나왔다.

활기가 가득한 거리를 눈에 열심히 담았다.

내 테라리움에도 저런 곳이 생겼으면 좋겠다. 여관도 굳이 3층이 끝일 필요 있어? 호텔처럼 몇십 층을 위로 쌓아 버리는 거야. 먹거리 골목도 만들까? 공원 좋지. 나무랑 꽃도 많이 심고.

“드루이드님, 당장 폐자재를 치울 인력도 없어요.”

잘 봐 둬. 내가 경영 게임을 하면 매번 준비된 건물만 세워 봤지, 주관적으로 뭘 만들어서 세워본 적이 없단 말이야.

병원을 엄청 많이 세우고 치료를 다 무료로 해 줄까? 그럼 우리 테라리움은 의료로 엄청 유명해지지 않을까?

“드루이드님, 사람과 드라이어드가 부족해요….”

이곳에 고아들이 있는데 고아원은 따로 없다고 했지. 예전에 데이지가 말했던 것처럼 잘 곳이 따로 없어서 마을 공동 회관에서 지냈다고 했던 것 같아. 그럼 우린 고아원을 지을까?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해….

“드루이드님, 아이는커녕 사람도 없다고요.”

일전의 경험으로 메스키트에게 찰싹 달라붙어 내 몸을 가리고 돌아다니니, 여유가 생겨서 마을 이곳저곳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임시직이지만 행정 관리원 입장으로서 이곳과 28번째 테라리움을 투영해 보며 구경 중이었다.

데이지2가 심심해할까 봐 아티팩트를 링크하여 조잘조잘 떠들다 깨달았다. 나 방금 좀 외근 나가서도 업무를 닦달하는 지독한 상사 같았어. 아주 지독한….

“그건 아니에요, 드루이드님. 전 즐거워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즐거워요. 민들레 묘목들은 아직인가요? 드루이드님의 꿈을 최대한 실현시켜 드릴 테니 어서 일손을 보내… 큼큼, 아닙니다. 자라나는 묘목들을 올바른 길로 빨리 인도할 수 있도록….”

엘더 다음으로 속이 뻔히 보이는 데이지2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는 새 상가가 즐비한 광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내겐 쇼핑의 본능 같은 것이 있는 걸까? 아니 사실 난 다른 데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앞에 팔랑거리는 엘더의 하얀 로브만 좇아서 걸었을 뿐이고….

그래, 내 본능이 아니라 너의 본능이었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