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604)

쟤가 뭐라는 거야, 지금?

“그리고 애초에 민들레는 전투 말고도 쓰일 곳은 있어요. 좀 더 키워서 파나케이아를 만들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이 님이 가지고 계신 것처럼 대용량이 아니라 소량이라도 말이에요. 예전에 28번째를 방문했던 여행자의 경우 일부러 약초가 되는 드라이어드를 뽑길 바랐던 자도 있어요. 그 리스트에 민들레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만약 그곳 민들레 군락지를 들렀다면 다 뽑아 갔을 수도…?”

“잠깐만.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는 건 어떠냐는 제안 뒤에 왜 아티팩트 이야기가 나와?”

“제이 님의 아티팩트는 지금 28번째 테라리움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28번째 테라리움도 아티팩트나 다름없어요. 아티팩트 안에서의 이동은 자유로워요.”

그걸 그렇게 이용해 먹을 수 있었어? 왜 빨리 말 안 해 줘?

“이거 알고 있었어? 메스키트?”

“글쎄요. 행정 관리원의 드라이어드가 되는 것은 처음이라서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메스키트가 알았으면 바로 나에게 알려 줬을 거야. 이건 미리 알려 주지 않은 데이지2가 나빠.

“여기에서 솟아나는 물은 바크를 복구시켜 줄 뿐 속의 생명력이나 디버프까진 해제할 순 없으니, 그 아이들이 와서 회복의 힘을 깨우게 되면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치유사가 따로 상주할 필요가 없겠어요. 근처를 지나가던 여행객은 반드시 28번째 테라리움에 들러야만 하겠네요. 방문객이 늘어나면 상권이 활성화되고 또….”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아직 꼬꼬마인 민들레 아이들을 데리고 아주 먼 훗날의 모습까지 그려내느라 입이 쉴 틈이 없었다.

“너 설마… 테라리움 치울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냐? 과하게 열정적인데.”

“에이, 무거운 것 들고 그러면서 근력도 늘고….”

정곡을 찔렀는지 말수가 줄었다.

단델리온과 아이들을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상의해 보았다. 그 전에 먼저 메스키트에게 내가 민들레 아이 둘을 감당할 만큼 영혼의 한계가 넓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볼 수 없으니까.

쑥쑥 성장한 내겐 충분하다곤 했다. 다만 작은 목소리로 단델리온의 말처럼 영혼의 자리를 낭비할 필요가 있냐는 물음을 던졌다.

뭘 모르시네. 카드 게임의 꽃은 수집입니다!

아이들은 비록 28번째 테라리움 내에서 지내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곳은 군락지보다 넓고 안전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공격형, 만일을 대비하여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서포트해 줄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롤 모델은 우리 데이지와 같은 종인 데이지2가 맡게 되겠지만.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두 아이 중 하나가 포레스트의 왕이 된다거나 하진 못해요.”

단델리온은 좀 전의 내 제안에 대해 얼마든지 무를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내가 주의해야 할 상황들을 열심히 피력했다. 아직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흔쾌히 떠맡으려 하는 모습이 걱정이 되었나 보다.

“그렇다면 다 크면 포레스트의 왕이 될 수 있겠네!”

마침 근처에 군락지가 있으니 두 아이 중 하나가 준비가 된다면… 내가 단델리온 급의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내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으로 보이자 단델리온은 태도를 바꾸었다. 차라리 아이들이 내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 바곳 묘목 아이는 우리 민들레와 특성이 비슷하니, 어쩌면 민들레 아이들이 힘을 일깨우게 되면 바곳이 보고 응용할 수도 있을 거예요. 야생의 드라이어드들을 데려가려면 필요한 준비물에 대해선 알고 계시나요?”

“넵! 설익은 열매가 필요하죠! 당장은 없지만 26번째 테라리움 과수원에 가서 사려고요. 혹시 모르니까 많이 쟁여 둬야겠네. 어차피 1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려면 여길 한 번 더 경유해야 되는 것 같고.”

“그럼 그 열매를 가지고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가 아이들을 가능한 많이 가르쳐 두고 있겠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힘든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힘든 결정은 무슨. 어차피 COST가 남아돌고 있다고 하니 써먹어야지.

군락지를 떠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두 민들레 아이는 내게 갖은 아양을 부렸다. 미래의 주인이 될 나라서. 아직 우리 사이에 유대 같은 건 없지만.

이번에도 아침 일찍 떠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잠자리에 들려는 차, 단델리온이 품에서 푸른 다이아를 꺼내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애써 그쪽이 보이지 않게 몸을 틀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태초 마을로 귀환하는 한 모 씨가 된 기분이다.

내겐 태초 마을이나 다름없는 26번째 테라리움에 가까워지자 어쩐지 피부에 닿는 공기부터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26번째 세계수의 가지가 내리는 무형의 축복이 여실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경계를 기점으로, 그 축복은 주위를 둘러보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축복에 한껏 짓눌려 기가 죽은 불들이 빨빨거리며 굴러다녔다. 마치 아이들 다 떠난 운동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그만한 것들이 우리 쪽의 드라이어드들의 기세에 겁이라도 먹었는지 못 본 척 스윽 주위를 돌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본래는 선공 몹이지만,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가 지나가면 비선공 몹인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태워 먹으려던 초반 모습을 알고 있어서인지 지금 모습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컬처 쇼크.

그러고 보니 테라리움들이 균형을 찾고 저 정도 크기의 불이 본래의 초보자 사냥터용 몬스터였다면, 나는 시작부터 하드 모드로 플레이한 유저였던 것이다. 그냥 하드도 아니고 불지옥 모드 정도?

데이지가 2번은 잘라 내야 나오는 크기잖아, 저거. 생각해 보니 너무하네.

막힘없이 목적지를 향해 걷던 우리를 메스키트가 가볍게 멈춰 세웠다. 주변에 소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달리 경계할 필요도 없는 사안 같아 보였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다는 것.

그저 온갖 것에 기웃거리고 호기심이 왕성한 날 위한 배려였을까. 스윽, 그녀가 고개를 내려 날 바라보았다. 저 소란에 대해 궁금하니? 눈빛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가까이 다가가자 드디어 내게도 소란이 소리로 잡혔다.

“좋아! 잘하고 있어!”

하이 톤의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명랑한 성격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만큼 목소리는 통통 튀었다. 뒤이어 후웅, 하고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들렸다.

와, 드루이드인가 봐! 시들링 이후로 밖으로 나온 드루이드를 만나는 것은 또 처음이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지어 같은 여자야! 괜히 그래서 더 반가워! 급박한 소리는 불과 전투 중인 건가?

“좋아! 묵사발을 내 버려! 개박살을 내 버리는 거야! 사정 봐주지 마! 갈기갈기 찢어버려!”

거침없는 언어에 엘더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이뤄지고 있을 공터에 다다르자 저 멀리 럭비공만 한 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 드루이드가 주먹을 내지르며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르는 중이었다. 자주색 머리카락을 가진 드라이어드는 자신의 몸뚱이만 한 톱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불과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전기톱에서 날만 뚝 떼어 낸 것 같이 생긴 위협적인 무기였다.

우리 데이지가 검을 던져 원 킬을 낼 수 있을 만큼 약한 불이었지만, 대하는 당사자들은 흡사 보스 레이드라도 하고 있는 것만큼 진지했다.

“크흡….”

“왜 그러세요?”

입을 막고 오열하는 내게 데이지가 걱정스레 물었다.

“뉴비… 뉴비다….”

물론 나도 며칠 안 된 유저지만. 이건 ‘부심’ 따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게임 플레이어들이 갖는 기묘한 감정 같은 것이 있다.

감정의 대상은 자신의 게임 진도보다 뒤처지는 플레이어이다. 여기에 한국인의 오지랖이 붙으면 더욱 극대화가 되는 것이고, 초보 유저의 발길이 드문 고인물 게임일수록 폭발하게 된다.

가령 모 게임들의 기존 유저들은 신규 유저를 발견하면 재화, 장비 등 온갖 아이템을 털어 쥐여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간이든 쓸개든 다 빼 줄 것처럼 굴기도 한다.

이 행위를 ‘소매 넣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신규 유저의 입장은 필요 없다. 갚을 필요 없으니 잔뜩 받고 제발 게임에 남아 있으라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다만 이 게임은 그만큼 오래된 게임이 아닐뿐더러 내가 뉴비의 유입에 목마른 고인 물도 아니었기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다른 갈래였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고 흐뭇한 그런 마음이었다. 작은 불을 상대로 열심히 톱을 휘두르는 저 드라이어드를 보니 고군분투하던 우리 데이지가 오버랩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팀이야. 힘내라고 다이아라도 좀 줄까? 기분 나빠 하면 어쩌지? 그래도 드라이어드 육성하는 데 돈이 꽤 많이 필요할 거고….

잠깐 고민하는 사이 전투가 끝났다. 데이지가 불을 쪼개 상대하며 해답법을 찾았던 때와 다르게, 마구잡이로 불을 두들겨 결국 리타이어시킨 것이었다.

“대단해! 진짜 강하잖아? 여기서 조금만 더 잡으면 우리의 영혼 교감이 더 높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빨리 강해져서 27번째 테라리움으로도 가 보자. 거기서 무료로 열매를 더 푼다는 소문이 있어. 동료를 더 만들고 뒤 번대도 가볼까?”

등장할 타이밍을 고민하고 있었으나 헛된 고민이었다. 우뚝 선 메스키트와 엘더가 드루이드에게 금방 포착되었다. 우리를 발견한 드루이드는 입을 ‘O’ 자로 만들고 경직되었다.

“허접한 드라이어드네.”

어김없이 엘더가 비아냥댔다. 입, 입! 이놈의 예쁜 입! 생긴 건 예쁜데 나오는 말은 구린 입!

내가 흘겨보자, 왜? 저건 노멀 등급이야, 라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 참 실례야. 너 저 드루이드 앞에서 그런 말 하면… 그래, 시들링이랑 다를 바 없어.”

꽤 잘 먹히는 조언이었나 보다. 엘더의 예쁜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고 입이 꾹 다물렸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반가워.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단지 지나가는 유저1이야. 모 게임처럼 마주치자마자 ‘결투다!’하고 소환수를 꺼내지는 않아.

“와 드라이어드들이… 넷이나 되네. 엄청나다…. 다 멋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드라이어드에게 “너도 할 수 있어!” 하고 소리친다. 좋은 자세야.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를 홀대하던 드루이드만 보다가 저렇게 잘 대해 주는 드루이드를 만나니 동질감도 느껴지고 기뻤다. 잘 키우면 좋은 드라이어드로 성장하는 본질을 알아본 드루이드구나!

“테라리움 밖에서 드루이드를 본 건 진짜 오랜만입니당.”

님이 두 번째죠.

“아 진짜요? 이 주변에 저 말고 드루이드들이 더 있어요. 원래는 저처럼 혼자 나오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세 명 이상씩 파티를 맺고 나오거나 27번째 테라리움 방향을 아예 피하는데.”

그녀는 다른 드루이드들이 있을 법한 위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갑자기 주변 환경이 변해서 불의 크기도 작아지고 위력도 줄어서 상황이 좋아졌어요. 다들 지금이 모험을 떠나기에 적기라고 해서 뛰쳐나왔거든요.”

역시나 28번째 테라리움이 회복되어 주변이 균형을 찾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보통은 파티를 맺고 나온다고? 단신으로 나온 나는 얼마나 겁대가리가 없는 인간이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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