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니 새의 깃털은 주머니에 곱게 넣어 두었다. 그 뒤로 이곳저곳 살펴보았지만 타 버린 잔해에서 더 이상 그럴싸한 흔적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헛수고는 그만하고 마차를 땅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메스키트가 살짝 발을 굴려서 지반을 흐물거리게 만들고, 힘주면 산사태 날 수도 있으니까, 엘더가 꽃가지를 이용하여 마차를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그 후론 가는 길에 일부러 요란법석을 떨며 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쪽을 알아차리고 휙휙 튀어나온 불들은 데이지의 빠른 몸놀림에 죽어 나갔다.
전투로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없어서 오후가 될 때쯤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밤이 되기 전 넘으려고 했던 일정도 맞췄고 산의 불 개체 수를 줄여 놓는 일도 완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 민들레 군락지가 보였다. 실제로 다녀간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단델리온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당신의 파나케이아가 우리 팀을 구한 일과 신의 계시를 담은 스태프 조각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게 영입하게 된 바곳 아이도 소개하고.
군락지의 경계를 넘자 아담한 노란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처음에 만났을 땐 경계의 하얀 꽃씨를 보냈지. 우리가 적인 줄 알고. 내 정체를 알았더라면 환영의 노란 꽃잎을 보냈을 거라고 했는데, 다행히 알아봐 주었나 보다.
유달리 튀는 민들레 아이 둘이 보였다. 둘은 무리에서 이탈하여 뛰어나와 노란 꽃잎에 섞여 우리를 반겨 주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경계심 없이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가 복구되어 균형을 되찾은 것과 관련되어 있겠지.
온 김에 군락지 주변을 한 번 더 청소하려고 했는데 위협이 되는 불은 없어 보였다. 민들레 군락지에도 평화가 찾아와서 다행이다.
“하루만 더 신세 질게요!”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지만 길을 걷다 맞이하는 것보단 낫지. 유독 튀는 행동을 보였던 민들레 아이 둘은 군락지의 중심에 오자마자 데이지에게 찰싹 달라붙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뭐가 저렇게 할 말이 많을까?
“편히 쉬다 가세요. 드루이드님의 방문은 오히려 이쪽이 환영할 일입니다. 특히 저 아이들에게.”
단델리온이 가리키는 아이들은 역시나 그 둘이었다.
“안정된 기운이 느껴지네요. 건조했던 공기는 수분을 머금고 기세가 날뛰던 불들은 잠잠해졌어요. 덕분에 불안정했던 이곳 포레스트도 활기를 되찾았답니다. 드루이드님은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대외적으로 내보일 사건들만.
“대단한 일을 하셨군요. 이건 28번째 테라리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20번대 테라리움과 그 주변 지역들이 감사를 표해야 될 위대한 업적이랍니다.”
단델리온이 스태프를 쥔 손을 가슴께에 두고 허리를 숙였다. 근처에 쪼르르 모여 있던 민들레 묘목들이 그녀의 행동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그 태도에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다 돕고 사는 거죠!
작은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을 볼 땐 신기한 눈을 하고 볼을 붉혔던 바곳은, 단델리온과 대면할 땐 울상이 되어 내 뒤에 숨었다. 작은 아이들은 제 또래라 괜찮았겠지만 포레스트의 왕인 그녀의 포스는 바곳이 겁에 질릴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아, 주셨던 스태프 조각 기억나세요? 얘 머리에 꽂혀 있는데.”
등 뒤에 숨어 있는 아이의 두 어깨를 잡고 앞으로 끌어왔다. 스태프 조각을 원래 정수리에 꽂는진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코스튬처럼 이리 되었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의 하얀 솜털도 갈대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신의 계시는 어떻게 나타났죠?”
“드라이어드의 또 다른 특성을 깨울 수 있는 물건이었나 봐요. 지금은 얘가 회복형인데 이 스태프 조각을 뽑으면 공격형이 돼요.”
완전 사기 템이죠. 단델리온의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지 않았다면 얻지도 못했을.
무려 민들레 포레스트의 왕이나 되는 자의 스태프에서 1회 한정으로 똑 떼어 내야 얻을 수 있는 희귀 템인데, 갖다 팔면 값 좀 나갔겠지? 어쩌면 캐시로만 살 수 있는 급의 아이템이었을 지도 몰라. 물론 팔 생각은 없지만.
“정말 신기한 힘을 가진 물건이었군요. 적재적소에 쓰이게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그 묘목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어떤 식물인가요?”
“어… 음… 좀 복잡한데 어쨌든 각시투구꽃에 가까워요.”
그 말에 단델리온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가 잠시 침묵한 사이 바곳의 근처에 우르르 모여 있던 아이들이 주춤주춤 단델리온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에게 멀리 떨어지라는 텔레파시라도 보낸 걸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것을 뽑는 건 좋지 않아 보이네요.”
물론 나도 아직 공격형 바곳은 통제 불능이라 스태프 조각을 뽑을 생각은 없었다.
“드루이드님의 영혼에 연결된 드라이어드들에겐 영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와 제 아이들은 다르답니다. 강한 위력을 가진 맹독초가 모체군요. 아주 여린 제 아이들에겐 위험할 수도 있겠어요. 저 드라이어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시들링 팀의 리더인 벨라돈나가 떠올랐다. 그녀도 존재 자체가 아군을 제외한, 필드의 모든 이들에게 위험한 영향을 끼친다고 했지. 확실히 본성은 울보 겁쟁이에 불과한 어린아이지만 공격형일 때 위력만큼은 대단하니까.
하지만 디버프를 주는 공격을 걸 줄 알뿐, 벨라돈나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인 것 같은데. 스태프 조각을 꽂기 위해 데이지가 근처까지 갔을 때, 근접한 거리에 따른 특별한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단델리온의 오해를 당장 풀어 줄 순 없었다. 벨라돈나와는 다른 케이스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선 스태프 조각을 뽑아서 보여 주어야 하는데, 아이가 만들어 낼 돌발 상황을 내가 제어 불가능하니까.
언젠간 바곳과 친밀도를 가득 쌓아서 통제가 가능하면 그땐 오해를 풀 수 있겠지.
“뭐… 지금은 안전해요. 회복형이니까요. 엘더보단 약하지만 힐링도 할 수 있고. 얘의 스킬에 대해 다 알진 못하지만 디버프를 걸 줄 아는 아이니까 반대로 해제 스킬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좀 복잡한 사정 때문에 이 아이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거든요. 회복 특성도 스태프 조각을 이용해서 강제로 깨운 거라….”
“어쩌면 이 묘목 아이는 우리와 비슷한 특성의 회복형 드라이어드일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우리의 힘은 저 엘더 플라워 드라이어드가 사용하는 힘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안전하다는 내 변호에 단델리온은 경계를 풀고 바곳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바곳의 입장으론 좀 섭섭할 수도 있는 상황 같지만, 그녀는 민들레 아이들의 보호자. 그녀의 태도 역시 이해가 갔다.
단델리온은 포레스트의 왕에게 계승되어 내려지는 지식을 이용하여 사용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식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양날의 검 같은 특성은 바곳을 영입할 때 핸드폰이 띄웠던 정보창에서도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자신의 지식이 맞다면, 바곳은 민들레 드라이어드들과 같이, 기운을 회복시키는 힘보다 좋지 않은 기운을 물러가게 해 주는 힘에 특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디버프 해제 전용 드라이어드일 확률이 매우 커졌다. 또한 바곳이 더 성장하면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이 파나케이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했다. 물론 먼… 아주 먼 훗날….
회복력이 별로인 건 괜찮다. 우리 팀엔 이미 아주 우수한 힐러인 엘더가 있었다. 무엇보다 디버프의 위험은 한 번 겪어 봐서 매우 잘 알기에 이를 풀어 줄 힘은 중요했다.
바곳은 공격 쪽으로나 회복 쪽으로나 정말 우리 팀에 꼭 필요했던 인재였던 것이다. 아직 제구실을 못 해서 그렇지…. 어쨌든 열심히 키워 보자!
그러고 보니 만약 시들링과 한판 붙게 되었다면, 그것도 바곳을 얻기 전이니 벨라돈나의 존재만으로도 많이 위험했겠네.
바곳의 허술한 공격보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 벨라돈나가 지능적으로 공격해 오면…. 그쪽 팀에는 힐러가 없다는 약점이 있지만, 장기전으로 본다면 우리가 매우 불리했을 거야.
걔는 주둥이가 험해서 그렇지 태도까진 험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새삼 적으로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나저나 민들레 아이들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 같네요. 전에 봤을 땐 마냥 천진난만하게 웃고 뛰어다녔던 것 같은데.”
단델리온은 내 말에 조금 피곤한 표정을 했다.
“자극을 받았어요.”
“자극?”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엔 데이지가 있었다. 듣자 하니 데이지의 모험담을 들은 몇몇 민들레 아이들이 자극을 받았다고.
“타이르고 한계를 깨닫게 해 주어도 소용이 없었답니다. 아이들은 군락지 밖으로 나가길 원해요.”
“제가 헛바람이라도 들게 한 걸까요…? 이거 좀 미안한데….”
“이 또한 저 아이들의 운명이겠죠. 드라이어드의 근본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드루이드와 함께한다면 모를까 절대 혼자 나갈 순 없습니다. 물론 이 주변의 균형이 되돌아와 많이 안전해졌어도.”
하긴 우리가 이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해 주고 가도 언제 다시 불이 생겨날지 모르니까. 더구나 아이들은 공격형도 아닌 회복형, 그것도 디버프 해제에 충실한…. 불을 상대하기엔 단일로 놓고 보면 좋지 않은 특성이었다.
“또한 드루이드가 구태여 저 아이들과 영혼의 연결을 맺으려 하진 않겠죠. 아이들의 영혼의 크기로 영혼의 한계를 채우기엔 더 효용이 높은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있을 테고, 심지어 덜 자란 아이들은 매우 약하니까요. 또한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을 아이들은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꿈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구나. 데이지 곁에 꼭 붙어 있는 두 아이는 아직 현실을 맛보지 못한 몽상가나 다름없고. 데이지는 나를 만날 기회라도 있었는데, 저 두 민들레 아이들이 꽤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애매하지. 내가 뭐 어떻게 해 주려고 해도, 지금 내 최우선 육성 순위는 데이지와 바곳이었다. 애가 둘이라 더 이상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내 두 드라이어드 외에 관심을 더 분산시킬 순 없었다.
이어지는 단델리온의 가벼운 하소연을 포함하여, 도란도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되었다.
나는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꺼내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데이지2와 이야기를 나눴다. 잘 지내고 있지? 엄마 없다고 울고 있는 건 아니지?
“…이런 일이 있었어.”
“26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길엔 민들레 군락지가 있군요. 민들레라. 확실히 열매에서 개화한 것이 아닌 야생의 아이들은 특별히 드루이드에게 도움이 되는 드라이어드는 아니죠. 물론 전투에선요.”
노골적이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군락지를 나가 좀 더 넓은 곳을 경험하고 싶은가 봐. 하지만 난 아직 바곳과 데이지만으로도 좀 벅차거든. 관심이 분산될까 봐. 단델리온은 아이들이 포기하게 만들겠다고 했는데….”
바곳은 심지어 친밀도도 신경 써 줘야 하지.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럼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는 건 어떠세요?”
“응?”
“제이 님의 영혼의 한계에 여유가 되신다면 아이들이 죽지 않게 연결을 하여 아티팩트에 넣어두시면 되잖아요. 안에서도 밖의 경험치는 습득할 수 있고, 꼭 전투를 통해서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롤 모델이 되어 줄 성목 드라이어드가 있으면 교습도 가능한데.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시면 제가 가르쳐 볼 수도 있겠네요.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한 드라이어드는 야생 때보다 빨리 성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