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은 휴식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하루가 지나기 전에 산을 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곤 이미 한 번 지난 길이라 거리를 안다는 것 정도인데, 쉬지 않고 걸어도 좀처럼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게임처럼 내게 체력 스탯이라도 붙은 게 아닐까? 레벨이 오르면 증가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왕이면 지력 쪽도 좀… 그럼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을 텐데.
산에 진입했을 때부턴 일부러 왔던 길로 향했다. 두 갈래 길 중 경사는 심하지만 장애물 없이 탁 트여 있던 곳. 올 때도 불을 죄다 해치워 놓긴 했지만 가는 김에 완전히 정리해 둘 생각이었다.
지금은 개구리 늪지대란 이름을 갖게 된 지역처럼, 2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모든 경로를 정리해 놓아서 이주자의 유입을 늘려야지!
“이쯤에 마차 불이랑 보스전 했던 곳이 있을 텐데….”
“저쪽이에요.”
가는 김에 기억나는 장소들도 한 번씩 방문해 주고. 마치 랜드마크처럼. 메스키트가 가리킨 쪽에 마차 불이 난리를 피워 둔 만큼 난장판이 되어 있는 공터가 보였다.
불의 장벽이 둥글게 솟았었고 전투의 피해가 컸던 탓에 주위의 나무며 바위들이 쓰러지고 박살 나 있었지만, 땅엔 파릇파릇한 풀들이 돋아나고 있어서 미묘한 모순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엘더의 그래프트로 양껏 다이아 비를 퍼부어 놓은 덕에 불로 타 버린 땅이 생명의 힘을 되찾게 된 것이다. 비가 내린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잡몹처럼 등장하던 불의 개체 수도 줄였고 이 일대를 휘젓고 다니던 마차 불도 없앴겠다. 여기도 내 관할 지역이라면 공원 같은 것을 조성해도 좋을 텐데. 하지만 지도상으론 27번째 테라리움에 좀 더 가까워 보여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조금 더 가니 진짜 마차가 전복된 곳이 나왔다. 바곳이 보게 해도 되는 걸까? 조금 망설여졌다. 아이가 홀로 동떨어지게 된 사건의 시초가 어쨌든 마차의 전복이었으니까. 그곳엔 자신과 같은 출신의 투구꽃들이 죄다 타 버린 곳이기도 하고.
“마차는 치워 놓는 게 어때?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났던 일의 숨겨진 사항들은 우리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주인, 제이. 저도 엘더의 말에 동의한답니다. 제이의 안위가 걸려 있으니까요. 비록 불에 많이 탔지만 제이가 그곳에서 많은 단서를 얻은 만큼 다른 이들도 그럴 수 있어요. 바곳 묘목 아이의 모체가 있었던 상자도 포함해서요.”
“음, 그래. 28번째로 오는 길에 저런 흉물이 있는 것은 좀 그렇기도 하고.”
고민은 짧았다. 이게 숨긴다고 숨겨지겠는가. 이미 들켰다. 아이는 이미 우리가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방향에 잔뜩 어그로가 끌려 있었다.
바곳의 손을 잡고 전복된 마차로 향했다. 우리가 다녀간 이후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아예 이곳을 지나간 사람 자체가 없었던 것인지, 그곳의 모습은 내 마지막 기억과 동일했다.
해골 그림의 상자는 여전히 입을 쩍 벌리고 까만 흙을 쏟아 낸 채로 있었다. 그 속에 섞인 불에 타고 바짝 마른 식물로 보이는 것들까지.
바곳에게 혹시 저것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무려 네가 택배처럼 실려 있던 곳이었다고. 아이는 좋지 못한 꼴의 마차를 보고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 안에 무언가를 알아본다거나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순전히 무서워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모체일 때의 기억을 전부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디론가 실려 가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엘더가 꽃가지를 사용하여 마차를 묻을 준비를 하길래 잠시 말렸다. 그땐 자리를 바삐 피해야 해서 시간을 두고 오래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쩌면 28번째 테라리움의 사건과 관련된 단서를 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뭐 찾아?”
“29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던 길에 발견했던 물건들 기억나지? 자세히 보니 불과의 전투가 아닌 사람이나 드라이어드들끼리 전투를 일으켰던 흔적이 남아 있었잖아. 데이지가 물건을 뒤집어서 28번째 테라리움의 문양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고.”
내 드라이어드들은 금방 내 의도를 알아챘다. 아주 심하게 훼손된 마차였지만 그때처럼 여기저기 꼼꼼하게 살피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도 해골 그림이 그려진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바곳 아이를 질질 끌어왔다.
“자, 넌 나와 같이 움직이자. 넌 나보다 키가 작으니까 더 아래에 있는 것을 잘 발견할 수 있겠지? 잘 봐. 나는 제일 먼저 이 정도 높이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바곳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넌 이 정도 높이의 것들이 눈에 먼저 들어오지 않겠니? 나 말고도 메스키트나 엘더는 키가 훌쩍 커서 더 발견 못 할 거야. 할 수 있지?”
바곳이 주춤주춤 내 눈치를 보았다. 아니 못 한다고 혼내지는 않는데.
“와, 완전 이건 너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엘더 쟤는 다이아 주울 때 말고는 무릎도 안 굽힌단 말이야.”
“내가 언제?”
엘더가 신경질적이게 톡 쏘아붙였다. 기억 안 나는 척하는 건지 아예 기억 못 하는 건지. 전자의 이유라면 다시 기억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마침 주머니 속의 다이아가 데굴 굴러다니는 느낌이 났다.
“넌 정말 잘할 거야. 난 작은 너의 도움이 필요해.”
아이 니쥬. 내 밀어붙임에 바곳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땡그란 눈을 비장하게 반짝이며 소매에 푹 쌓인 손으로 코끝까지 내려온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리고 허리를 푹 숙였다. 그 반동으로 기다란 후드가 훅 내려와 아이의 머리를 완전히 덮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꼭 거대한 후드가 입을 벌리고 애 머리를 잡아먹는 것 같지 않은가. 소리 내어 웃지 못해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분명 웃긴 표정이 됐을 거야.
그때 메스키트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슬쩍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내 귓가에 작게 말했다.
“칭찬 거리를 만들고 있는 거군요?”
정답이다. 메스키트가 내게 했던 조언대로 바곳에게 열심히 칭찬을 해서 친밀도를 좀 높여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 때나 칭찬을 하기엔 좀 그렇고. 대뜸 ‘넌 머리가 정말 청보라색이구나! 완전 청보라색이야!’, ‘넌 정말 안경이 크고 동그랗구나! 대단해!’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 놀려 줬다고 꽁해 있는 엘더를 보았다. 물론 쟤는 아무 때나 칭찬해 줄 수 있다. 얼굴이 아무 때나 잘하니까. 엘더는 눈이 참 잘하네! 코도 참 잘하네!
어쨌든 바곳에게 쉬운 임무를 주고 달성하면 칭찬해 줄 생각이었다. 그 임무라는 것을 왜 자신에게 맡겼는지 아이가 납득할 이유를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죄다 월등해서 특성을 제외하곤 딱히 바곳 아이를 들먹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작은 몸집이긴 한데.
데이지가 주춤주춤 내 곁에 서서 ‘저는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팀에서 제일 작은 드라이어드는 이제 바곳이 되었구나. 만날 때도 아이의 모습이었고 메스키트나 나나 매번 습관처럼 아이라고 부르곤 하니까.
혹시 막내의 위치를 뺏겼다는 것에 질투가 생기… 지는 않는구나, 표정을 보아하니. 뭐 팀에서 제일 작은 애라는 포지션을 맡고 있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니.
“데이지는 성장했잖아. 키가 나와 비슷해졌으니 아래쪽을 살피는 건 바곳에게 맡기자.”
바곳이 들릴 수 있도록 좀 크게 말했다. 아이가 허리를 더 숙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후드가 시야를 다 가리고 있는데 뭐가 보이긴 하니…? 아랫입술을 다시 꾹 깨물었다.
“저번에도 물건을 뒤집어서 28번째 테라리움의 문양을 발견한 것도 데이지였으니까, 이번에도 감을 잘 살려서 한 번 살펴 주면 좋겠어. 이미 망가진 마차니까 좀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어.”
“네! 열심히 할게요!”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콰드드득!
설마 마차를 통째로 들어 올려서 뒤집을 줄은 몰랐지.
그 바람에 바곳 아이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나는 재빠르게 메스키트의 뒤로 피신했다.
“그걸 그렇게 들어 올리면 어떡해?”
“드루이드님이 잘 살펴봐 달라고 하셨는걸요!”
어이 상실한 엘더가 소리쳤고 데이지가 해맑게 되받아쳤다. 족히 사람 6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마차가 작은 아이의 두 손에 의해 번쩍 들려 불판 위 고기 뒤집듯 뒤집혔다. 우수수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잿가루 속에서 데이지는 평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쉽게 하는 거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영차 힘을 줘 보다가 포기. 애가 공격형이라 힘이 센 걸까, 아니면 드라이어드는 다 저렇게 괴력을 가진 걸까?
“어… 쩨이 님!”
높은 미성이 날 부른다. 웃으면 안 된다… 웃으면 안 된다…. 오늘 아랫입술이 여러 번 고통 받는다.
바곳은 그 와중에도 무얼 발견해 냈는지 내게 우다닥 달려왔다. 사탕 껍질이 벗겨지듯 감싸고 있던 소매가 쑥 내려가고 작고 하얀 주먹이 드러났다. 나는 아이의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 내 주며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칭찬을 쏟아 낼 준비를 했다.
“이걸 찾았는데요….”
아이가 찾은 것은 새의 깃털이었다. 색이 좀 바래긴 했지만 노란 색깔에 끝이 짙은 밤색인 예쁜 깃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깃털이라니? 불이 마차를 활활 태우는 와중에도 용케 모양을 보존했네.
내가 깃털 끝을 잡고 빙글 돌리며 궁금해하자,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찾긴 찾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자신감이 하락한 것이다. 아차!
“신기한 걸 찾았네? 어디서 발견했어?”
“마차가 뒤집힐 때 훅 튀어 올랐어요.”
“잘했어! 완전 작고 예쁜 깃털이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거야!”
열심히 바곳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엘더가 이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깃털이잖아? 여긴 적지만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어. 그중에 저 깃털을 가진 새도 있겠지. 무슨 도움이 되겠어?”
어, 듣고 보니 또 그렇네. 마침 데이지가 부메랑을 휙 던져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형상의 불을 맞혀 꺼뜨리는 것이 보였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진 데이지는 이전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불에 애먹지 않았다. 지금처럼 사격 게임에서 인형을 맞히듯 단도를 휙휙 던져 불을 잡아 냈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엘더의 어깨에 메스키트의 손이 내려앉았다.
“틀린 것은 너란다, 엘더 꼬맹아. 저건 평범한 새의 깃털이 아니잖니?”
“뭐가 틀렸는데?”
“내 주인, 제이의 말처럼 아주 작고 예쁜 깃털이란다.”
왜? 뭐가 다른데? 하지만 메스키트의 말에 엘더는 뭔가 알아차린 듯한 얼굴을 했다.
“여기에 살기엔 새의 깃털 색이 아주 튄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제이. 제 자생지에선 좀처럼 새는 보기 힘들어서 그에 대한 지식은 적지만.”
메스키트는 주위를 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불에 의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짙은 색의 바위와 검은 나무들이 많아요. 그렇게 튀는 색의 새가 살아남기엔 힘든 환경이죠. 그런 색을 하고선 금방 포식자들의 타깃이 될 거예요.”
“그 말은… 이 깃털은 외부에서 마차와 함께 딸려 왔다거나….”
“이 마차를 공격한 자에 대한 단서일 수도 있다는 거죠.”
메스키트는 창끝으로 뒤집힌 마차의 문 부분을 가리켰다. 반대편은 불에 의해 탄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문 쪽에 마치 톱 같은 것으로 거칠게 찍힌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과의 전투를 치른 드라이어드의 흔적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죠.”
전과가 있으니까. 28번째 테라리움의 전령을 공격한 것처럼, 누군가 이 마차를 공격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