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604)

나도 모른 새에 잠들었다가 눈이 확 떠졌다. 일찍 일어났다는 자각이 있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었다.

별일이네. 주위를 밝힐 등불도 없어서 까만 어둠 속에, 드라이어드들의 장비에 콕 박힌 보석의 빛만 별처럼 반짝이는 새벽. 내 기상을 느낀 드라이어드들도 자는 시늉을 멈추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저 사람이 웬일이람, 하는 눈치였다. 악몽을 꾼 것을 걱정하는 메스키트와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부담이라도 느꼈냐며 놀리는 엘더, 그리고 어쩐지 이유를 눈치챈 것 같은 28번째 테라리움 공무원 담당 데이지 드라이어드까지.

지진이 일어나도 푹 잘 정도로 잠귀가 어두운 나를 깨운 것은… 소박하게도 졸졸 흐르는 물소리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불 때문에 물은 생각도 못 했는데? 26번째도 가뭄이 심했으니 여긴 다 타 버려서 물 한 방울 안 남았을 줄 알았어.”

“아, 물소리가 들리시는 건가요? 사실… 이상한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이 있어요.”

“물?”

묻는 드라이어드들에게 이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 속에서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짚이는 곳이 있다며 지금 가 보겠냐고 물었다. 메스키트는 아침까지 푹 자지 못한 나를 걱정했지만, 지금의 나는 묘하게 머릿속이 상쾌했다.

“가자, 가자. 여기서 멀어?”

“아뇨. 일단 바로 근처에 하나 있어요. 과수원을 나가면 바로 보일 거예요.”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안내한 곳은 마을 중앙이었다. 그곳에 가까워지자 발밑이 물난리였다.

불이 가니 이젠 물이 왔다. 비라도 내렸나 싶어도 마을 중앙 부근을 빼곤 물기가 없었다. 침수 피해를 받은 것처럼 마구잡이로 물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의 기묘한 문양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의 땅이 갑자기 불쑥 올라왔거든요.”

철벅철벅 물을 밟으며 간 곳엔 땅이 불쑥 솟아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처럼, 내 허리까지 솟아오른 땅의 꼭대기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여기 수맥이라도 있는 건가? 왜 갑자기 지하수가 터져 나온 거야?”

“평범한 물이 아니에요.”

메스키트는 허리를 숙여 모아 쥔 손에 물을 받아 냈다. 그리고 날 바라보며 반대편 팔에 물을 흘렸다. 흑색의 건틀릿에 물이 닿자 물은 흘러 지나가는 길을 반짝반짝 닦아 광을 내 놓았다.

워씨… 의심 가는 곳이 있었다.

[주인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핸드폰을 깨우자 난장판이 된 <무한 다이아> 화면이 보였다. 이젠 숫자 28의 나무 분재를 다이아 수레 대신 쓰기로 한 것인지, 난쟁이들이 그곳에 퍼다 나른 다이아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왜 폭주한 거지…? 아니 얼마나 쌓였으면 세계수 가지가 빨대 꽂아서 빨아먹는 속도가 못 따라가고 있지? 넘쳤잖아?

난장판을 해 놓고도 난쟁이들은 해맑았다. 그들은 고정적으로 빠져나가는 다이아가 생기자… 그동안 수레에 다이아가 쌓여 일자리를 잃었던 난쟁이들도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무한 다이아>의 모든 콘텐츠를 끝까지 찍었었다. 하물며 고용 난쟁이 수도 MAX였다.

[주인님! 저거 하나 더 주세요!]

[주인님! 저렇게 다이아가 빨리빨리 사라지는 걸 더 주세요!]

난쟁이들은 숫자 28 분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재가 난쟁이들의 과한 보살핌 속에 어찌나 잘 자랐던지, 화면을 넘기고 넘겨도 뻗은 나뭇가지가 있었다.

[주인님! 오신 김에 다이아도 가져가세요!]

[주인님! 일꾼이 많아져서 다이아를 더 캘 수 있어요!]

“뭐야, 왜 더 많아졌어?”

난쟁이들은 내 질문에 일제히 어느 한 곳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곡괭이나 삽의 끝으로, 빈손의 난쟁이들은 손가락으로 콕콕. 그곳은 난쟁이들의 강화 정보를 볼 수 있는 탭 버튼이었다.

마치 <무한 다이아>를 처음 시작했을 때 튜토리얼에서 했던 것처럼 터치하라고 몸짓을 했다.

의심을 가득 안고 누르자… 놀랍게도 난쟁이 고용 수를 나타내는 곳이 MAX+1Lv로 바뀌어 있었다. MAX는 끝 아니야? 왜 +1따위가 또 붙는 거야?

“이게 뭐야?”

[주인님! 광산이 더 넓어졌으니 일꾼이 더 필요하잖아요!]

[주인님! 일꾼이 더 필요하세요? 다이아가 더 많이 필요하세요?]

광산이 더 넓어졌다는 말은…. 원래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핸드폰 안에 세로 모드로 한눈에 <무한 다이아> 게임 화면을 볼 수 있었지. 분재가 생기고 나서는, 핸드폰을 슬라이드 하자 수레를 끄는 철로와 함께 광산 화면이 연장되었다. 쭉쭉….

지금도 가진 다이아의 반은커녕 일부도 다 못 썼는데 여기서 생산 능력이 더 향상되면 어떡해? 적게 쓴다고 난쟁이들이 핸드폰을 깨울 때마다 가져가라고 난린데!

다이아 제국의 모든 난쟁이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겼다며 기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질릴 정도로 쌓여 가는 다이아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과수원에서 다 죽어 가던 세계수의 가지에 다이아를 밀어 넣을 때, 너무 과한 나머지 진물이 줄줄 흘렀던 것 같은데. 어쩐지 지금 여기 땅에서 솟아오른 물이 그와 같은 여파인 것 같았다.

“식물에 물을 과하게 주면 죽잖아? 이거 세계수의 가지를 내가 살려 놓고 내가 다시 죽이는 거 아냐? 세계수의 가지에 내가 과하게 다이아를 밀어 넣고 있나 봐! 어떡하지?”

아니, 따져보면 내 탓은 아니지. 적정 수준에서 빨대를 뽑든가 해야지, 멍청하게 다 빨아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 뭐든지 과한 것은 좋지 않다. 밥 많이 먹여서 죽이게 생겼다. 얼마나 많이 먹였냐면 땅이 터질 만큼!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이렇게 배출하고 있군요. 본래는 증산 작용으로 날려 보내야 하는데 너무 과해서 이렇게….”

“그런데 제이 님. 여기 한 곳만 그런 건 아니에요. 마을 안에 이렇게 솟아오른 곳이 몇 개 더 있어요….”

일단 바로 근처에 하나가 있다는 말은 그 뜻이었구나. 다른 곳도 여기처럼 물난리가 나 있겠네?

“혹시 테라리움이 물난리 나서 망했다는 소문 있어? 28번째 테라리움이 그 첫 번째가 될지도 몰라. 임시지만 행정 관리원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말아먹어? 난 망했어.”

“내 주인, 제이.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요. 이렇게 생겨서 그렇지, 한 자리 수의 테라리움들은 이런 식으로 물이 솟는 분수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거긴 주민들이 많아서 다이아가 많이 모이니까요. 테라리움이 건재하다는 것을 겉으로 보여 주고 수완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짓기도 해요. 물론 그렇게 지어진 분수대는 하나뿐이지만요. 여긴 제이 혼자서 분수대를 여러 곳 만들어 냈지만…. 일단 물을 가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 해야 할 일이겠군요.”

옆에서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맞장구를 치며 28번째의 명물이 되겠다며 좋아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방금 전까지 내가 말아먹은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그러고 보니 엘더가 조용하다. 여기 흐르는 물이 뭐 때문에 생기는지 알 텐데, 왜 조용하지?

“엘더… 울어?”

엘더는 세계수의 가지가 다이아를 배 터지게 먹고 뿜어내는 물을 붉어진 눈가를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이 아주 많이 커 보였다.

청초한 얼굴로 울락 말락 하고 있으니 심장이 아팠다. 저 예쁜 얼굴로 울면 유죄다. 내 심장에 해롭다.

“세계수의 밖으로 나온… 수액은… 증발이 빠른데….”

엘더는 땅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증발되지 못할 만큼 고여 흐르는 정도면…. 얼마나 많은 다이아가…. 거기다 여기 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도 이런 거면….”

울먹이는 엘더는 마치 이슬을 머금은 하얀 꽃가지 같았다. 한 떨기 꽃이다, 꽃. 나는 죄 많은 여자. 미남을 울렸어. 이로써 깨달았다. 미남의 눈물은 무기다. 나는 가진 걸 다 털어서라도 엘더를 달래 주고 싶어졌다. 물론 내 다이아가 다 털릴 일은 없지만.

손수건 대신 다이아를 한 움큼씩 쥐여 주며 이미 떠나간 다이아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달래고 있는 사이,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귀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곳은 물에 닿은 제 로브가 깔끔해지는 것을 보며 살짝살짝 물장구를 쳤다. 데이지가 안 그런 척 몰래 발로 물을 튀겨 바곳에게 뿌리고 있는 모습까지. 이게 다 근본이 다이아란 사실이, 스케일이 너무 커서 아이들은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걸까?

“물난리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저 드라이어드의 말처럼 수액은 증발이 빠르거든요. 물난리가 났다면 여기 오는 길이 전부 축축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주변 일대만 그렇잖아요? 그래도 역시 분수대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군요.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보다 더 크고 근사한 분수대를 짓는 거예요. 빨리 기술자가 이주했으면 좋겠어요. 돌을 깎는 석공도 좋겠죠.”

테라리움을 꾸밀 생각으로 들뜬 데이지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보며 메스키트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 주인, 제이. 증산 작용으로 뿜어져 나온 수액이 드루이드의 영혼을 만나면 다이아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응, 저번에 말했었어.”

“증산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에선 드루이드의 영혼에 맺히게 되는 다이아도 역시 많을 거랍니다. 다들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세계수의 축복의 영향이 커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도 있지만, 또 다른 이점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메스키트의 말은 데이지 드라이어드처럼 분수대를 짓는 것에 한눈팔지 말고 더 중요한 사실을 보란 뜻이었다. 즉, 28번째 테라리움에 버프가 생겼다는 것이다.

곳곳에 공짜 포션 역할을 하는 특별한 분수대가 터져 나오는 마을인 것뿐만 아니라, 다이아 생산 버프까지 있는 마을. 물론 그 다이아는 내가 퍼 주고 있는 거긴 한데….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보다 번호는 크지만, 이곳은 그에 못지않은 이점을 갖는 테라리움이 되었군요.”

메스키트는 내가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 추켜세워 주었지만, 그럴수록 엘더의 우울함이 커져서 말렸다. 그녀가 곧바로 멈추지는 않는 걸로 보아 반쯤은 엘더를 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았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일단 급한 대로 주위의 건물 잔해들을 모아 물이 솟는 주변에 쌓아 올렸다. 분수대를 만들어 줄 기술자가 방문할 때까지 하는 임시방편이었다. 틈새로 물이 줄줄 흘렀지만 이전처럼 바닥을 넓게 적실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응급처치를 하는 과정에서 마을 내에 물이 솟는 곳이 총 다섯 군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둑을 쌓다 보니 아침이 되어 곧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홍보할 것이 한가득이라며, 세금이 없는 것은 물론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진귀한 명소가 다섯 군데나 된다는 것을 어떻게든 어필하고 싶어 했다.

또한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온갖 분수대 디자인들을 생각해 놓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분수대를 다 지으면 그 주위를 레드 데이지 화분으로 장식해도 될까요?”

“네 마음대로 해.”

꼭 저도 모르게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에 대한 경쟁심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더 화려하게, 더 멋지게. 뭐, 나야 좋지.

손을 흔드는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뒤로 하고, 떠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엘더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우울함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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