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604)

범위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이거 또 한바탕 다이아를 때려 넣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더는 제 스태프에 맺힌 물방울을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메스키트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대단한 광경이라며. 데이지도 열심히 날 추켜세웠고 바곳은 데이지가 말하는 리듬에 따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다이아가 들어가긴 했어도 엄연히 엘더와 함께한 그래프트인데…. 쟤도 좀 칭찬해 봐. 물론 지금 생명의 비에 소모된 다이아의 양을 가늠해 보고 지독한 현실을 곱씹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뭐 대단하다고 막 칭찬해도 이쪽은 조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통행 길을 정리해 놓았으니 28번째 테라리움에 많이 방문해 주세요. 오시는 길에 양옆을 보시면 맑은 물이 가득 찬 웅덩이에 작고 귀여운 개구리밥이 동동 떠다닌답니다. 운이 좋다면 다른 부평초들도 자리를 할 날이 오겠지요.

생명의 비를 양껏 뿌려 놨으니 이제 식물들이 폭발적으로 번식하지 않을까요? 녹음 속에서 오시는 길, 쾌적한 여행길 되십시오. 제이투어.

이름도 지어 줄까? 아직 있는 식물이 개구리밥뿐이니까 이제부터 여긴 개구리 늪지대야. 본래 이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도에서도 그냥 늪 지형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내가 속으로 부르는 죽음의 숲 같은 것보단 훨씬 친근감 있고 귀여운 이름이잖아? 무해하고 누구든 방문하기 좋은.

개구리밥이 많으니 진짜 개구리들도 막 몰려오려나?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28번째 테라리움의 영향권에 속한 이 지역의 이름이 임시 행정 관리원의 권한으로 ‘개구리 늪지대’로 변경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아니… 저는 생각만 했을 뿐이고요….

이게 정식 지형 이름으로 채택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쪽팔렸다.

***

일을 마무리하고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는 길. 그곳에 있을 또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통해 연락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이쪽이 전해 줄 이야기가 한가득이라 연락은 끝이 없었다. 그는 건물 잔해를 치우다 말고 그 위에 걸터앉아, 내가 전해 주는 이야기들을 놀란 눈을 하고 받아들였다.

29번째로 가는 길에 생명은 물론 불도 얼씬 못하는 죽음의 늪지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감탄사 남발이었다.

엘더와 함께 그래프트를 썼던 장면이 전해졌을 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것처럼 극도로 흥분한 얼굴을 했다.

그 비를 내리는 장면은 실제로 보지 못해서 정말 아쉽습니다, 그나저나 제이 님은 그냥 다이아가 많으셨던 거군요, 엄청. 하면서, 설마… 진짜로… 세계수의 가지를 자비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래전, 28번째 테라리움에 갈 예정이었던 바곳이 드라이어드가 되어 함께 가고 있다고 했을 땐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메스키트는 테라리움 아티팩트만 들여다보며 걷는 내가 행여나 넘어질세라 찰싹 붙어서 걸었다.

도착할 때까지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아 정신 팔다 보니 어느새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해 있었다. 엄마 왔다! 방은 다 치웠니?

날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도 밤은 여기서 보낼 수 있겠구나.

그 잠깐 사이,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과수원의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방에 쓸만한 기자재들을 끌어모아다가 살뜰하게 잠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금방 이곳에 돌아올 것이라 했던 내 말을 믿고 있었던 듯했다.

“혼자 고생했어.”

“별로 고생할 것도 없었어요. 다만 빨리 실력 있는 기술자가 이곳에 이주하여 널브러진 잔해들을 수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기술이 없어 옮겨 놓는 데에 그치지만 쌓아 두는 것도 한계거든요. 외벽은 불에 많이 탔지만 잘 뒤져 보면 쓸만한 것들이 많을 거예요. 지반이 약해져 있을 수도 있으니 초기에는 층이 낮은 건물만….”

내가 올 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전했다면, 이젠 데이지 드라이어드의 차롄가. 배턴 터치! 한정된 공간에서도 저렇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아마 같이 여행을 다녔다면 엄청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세탁은 못 해도 먼지들은 열심히 팡팡 털어 냈다고 한 뭉텅이로 쌓아 둔 이불 위로 점프했다. 오랜만에 푹신한 곳에 눕는다. 사실 어디든 눕기만 해도 휴식이 되고 잠도 잘 자지만 그래도 역시 푹신한 게 좋지.

퀴퀴한 먼지 냄새와 희미한 재 냄새가 났지만, 내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드라이어드들의 향기에 집중하면 많이 희석되었다.

배는 안 고프냐는 메스키트의 말에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이렇게 망가져 버린 마을에서 그럴싸한 음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죽을상을 하며 비상식량을 입 안에 털어 넣고선 데이지 아이와 함께 세계수의 가지를 구경하고 돌아온 바곳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상황이 악화되기 전, 드라이어드가 아닌 모체가 이곳에 도착했어야 했지. 지금은 시기를 넘어도 한참 넘어 28번째 테라리움이 한 번 파괴되고 난 후에야 도착했지만.

만약 제때 바곳의 모체가 도착했다면 최악의 상황까진 가지 않았을까? 우리를 위기로 내몰았던 바곳의 능력을 보면 모체의 힘도 대단하여 어쩌면 벌레를 박멸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어땠어?”

“굉장했어요…. 따뜻한 빛이… 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뿜어져 나오고….”

바곳은 세계수의 가지를 만나고 느꼈던 감정을 주춤주춤 나열했다. 한참 테라리움의 주변에 담벼락을 세우고 해자를 파는 것이 어떠냐는 주제까지 넘어가던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바곳 아이에게서 조심히 터져 나온 이야기에 배턴을 넘겨주었다.

작은 세계수인 내가 아닌, 진짜 세계수의 일부분을 만난 아이는 모든 것이 감동의 그 자체였나 보다. 막 만났을 때부터 떠날 때까지의 감정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인자한 웃음이 배어났다.

세계수의 힘을 배반하고 금지된 힘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수를 숭상하고 있었다. 물론 세계수는 나에게 아이를 떠맡길 만큼 가엾게 여기고 있었고.

바곳의 말을 잔잔히 듣다 보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는 종종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는데, 그 결여된 부분에 존재해야 될 것이… 나였다.

그러니까 아이는 나를 뭐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메스키트나 엘더는 날 제이라고 부르고, 데이지는 드루이드님이라고 부르니 헷갈린 건가?

“난 제이야. 제이라고 부르면 돼. 그냥 물어보지 그랬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마이 네임 노노 닉네임 이스 제이. 이런 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늦었네. 바곳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렵니? 뭐가 어렵니? 내가 너에게 메스키트처럼 ‘내 주인’을 붙이라는 것도 아니고.

“쩨이 님…?”

“큽….”

조용히 듣고 있던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황급히 웃음을 삼켰다. 덕분에 바곳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알고 울상을 지었다.

“다시… 다시 불러 봐.”

“쩨이 님….”

“크흡….”

“웃지 마! 애 울잖아! 당신이 얘 달래 봤어? 얘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독이 내리거든?”

물론 안전핀을 뽑아야 공격형으로 전환되지만.

아이 특유의 미성에 높고 째지는 톤 때문에, 나는 제이가 아니라 쩨이가 되어 버렸다. 쩨이는 내 부캐 닉네임인데…. 아이는 분명 제이라고 말했어. 그런데 입 밖에 나온 소리가 지읒 하나 더 붙어 있을 뿐이지!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웃음을 터뜨린 바람에 바곳은 울먹울먹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맞아. 그렇게 부르는 거 맞아. 틀린 거 아냐. 저 드라이어드가 좀 유별날 뿐이야. 울지 마! 아이 잘했어요!”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애를 달래고 있는데 이쪽을 보는 엘더의 표정에 장난기가 돌았다.

“너는 하지 마라. 너는 덩치는 산만 해서 뭐 그런 걸 따라 하려고 그래?”

“왜? 쩨이라고 부르는 거 맞다며.”

“하지 말랬지! 얼굴 예쁘다고 봐줄 줄 알아?”

엘더와 왁왁 싸우는 사이… 난 보았다. 메스키트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것을. 언니는 그러면 안 되져….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메스키트가 잠자리를 재촉했다. 26번째로 가는 길은 못 해도 하루를 건너뛸 수 있으니 일찍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살짝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금세 풀었다.

모처럼 드라이어드들은 아티팩트로 들어가지 않았다. 28번째 테라리움 전체가 내 아티팩트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내 드라이어드들과 옹기종기 한 장소에 모여 누워 있으니 꼭 수련회에 온 느낌도 나고…. 어느새 수가 이렇게 많아졌네.

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제이, 잠이 오지 않는 건가요? 평소엔 눕자마자 잠들었는데.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나요?”

메스키트가 내 머리 언저리를 푹 누르며 말했다. 그 바람에 고개가 데굴 돌아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호박색 눈이 수련회 밤의 캠프파이어 앞 촛불 의식을 떠오르게 했다. 모든 것을 고하게 만드는 고백의 눈.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정신을 온통 나에게 쏟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걱정되었나 보다.

29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할 때까지 날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여기 세계수의 가지에 대한 전 행정 관리원의 일지.

드라이어드들에게, 특히 메스키트에게 쉽사리 그 일지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29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며 얻었던 단서들을 조합하여 내린 결론을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계수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그 태도들 때문이다.

굳게 믿고 있던 최강의 세계수가 약해진 이유가 한낱 병충해 때문이라고. 또한 누군가 일부러 28번째 테라리움을 고립시키려 했던 것 같다고.

29번째로 향하던 전령들을 죽이고, 이곳에 벌레의 대항마로 오던 맹독초 바곳을 가로채고. 마치 세계수의 가지가 병들어 죽으라는 것처럼.

병충해는 오히려 이야기가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위대한 세계수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좀 어려웠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한다고 화낼까 봐 솔직히 두려웠다. 물론 딱 늪지대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지금은 전부 말해 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혹시나 내가 비약한 것은 아닌지.

왜냐면…. 바곳 아이를 영입하기 전, 드라이어드들이 내게 보인 태도 때문이다. 세계수가 떠맡긴 열매라고 할지라도 원치 않으면 부숴 주겠다던 엘더, 세계수의 일방적인 태도를 내 걱정에 못마땅해하던 메스키트, 세계수가 맡기든 말든 아무런 중요성을 두지 않던 데이지.

그때 깨달았다. 세계수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세계수인 나.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나.

나는 메스키트의 눈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냈다. 일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땐 긴 침묵이 이어지다 “그랬군요.”라고 말했다.

내가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간결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메스키트는 내 주저함을 알아차리고 그 이유까지 유추한 것 같았다. 조심히 와 닿는 손이 마치 홀로 고민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반응은 저쪽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더 컸다. 하지만 분위기상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더 일찍 제대로 왔어야 했는데.” 하면서 바곳이 작은 머리로 자책을 하려 하길래 손가락을 튕겼다.

네 잘못을 묻는 게 아니잖니. 딱! 하는 소리에 화들짝 아이가 놀라며 침울한 표정을 지웠다.

29번째로 향하며 얻었던 단서들을 조합하여 내가 내린 결론을 이야기했을 땐, 드라이어드들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모든 걸 제쳐 두고 우선적으로 날 걱정했다.

위대한 세계수의 가지를 노리는 존잰데 하물며 그 존재들이 노리던 곳과 깊이 관여된 작은 세계수인 나까지 위협할까 봐.

내 결론이 비약이 아니라 타당한 것이라며, 왜 빨리 말해 주지 않았냐며 닦달했다. 역시 괜히 혼자 끌어안고 고민했던 것 같다. 입을 다물고 있던 큰 데이지 드라이어드까지 합세하여, 어쩌면 벌레도 그들이 몰래 들여온 것이 아니냐는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

심란하게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져 탁 트이자, 덩달아 기분도 확 풀렸다. 멍청하게 괜히 혼자 고민했잖아. 다음부턴 그냥 전부 말하자. 엎드려서 얼굴을 푹 묻었다.

메스키트가 풀어헤친 내 머리카락을 스르륵 감싸 쥐는 것이 느껴졌다. 혼자 고민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묻은 채 눈만 슬쩍 돌려 바라보았다.

“내 주인, 제이. 당신의 고민을 가장 먼저 알고 싶어요. 이럴 때는 그저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에 잠시라도 들를 걸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당신이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보는 동안은 생각이 여과 없이 모두 공유되어, 짧게 스쳐 지나가는 고민이라도 난 모두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빨리 당신의 고민을 알아차리지 못해 미안해요.”

사라락 모아 쥐었던 머리카락들이 반대 어깨로 넘겨졌다. 그녀는 어쩌면 나와 한 번 더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걷어 내기 전 내 머리카락들은 주위를 차단하는 커튼처럼 내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 행동이 마치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도록 하기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