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보지 말자 했건만…. 아냐, 간다고 무조건 만날 리는 없지.
“인공 개량이 그곳 테라리움에선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인지, 아니면 연금탑이 독단적으로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일인지 확인해야 될 거예요. 어찌 됐든 금지된 일이니 행위를 중단시킬 방법도 찾아야 할 것 같군요. 행위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 할 테죠.”
메스키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들으니 모 애니메이션의 비밀 조직이 생각나는데. 바곳을 얻음으로써 엄청난 비밀에 발 담그게 된 건 아닐까? 들키면 제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그나저나 턴 오버 형태는 또 뭐람? 바곳은 드라이어드들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방어형 빼고 죄다 가지고는 있는데, 공격형엔 잠금 표시가 되어 있었다. 현재 회복형과 지원형만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하긴, 드라이어드 하나가 특성을 셋 이상 가지고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사기지. 스페셜한 우리 메스키트도 특성은 두 개뿐인데. 그런데 이것도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막 온탕에서 노곤하게 몸을 풀고 나온 것처럼 발간 얼굴을 하고 있는 바곳에게 바짝 붙었다. 가슴께에 오는 아이를 이곳저곳 살피는데, 아이는 몸을 움찔 떨면서도 피하진 않았다.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울지 않았으니 참 잘했어요.
“다시 공격형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내 질문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는 눈친데. “아니 너는 지금 엘더처럼 회복형이란 말이야.”부터 시작해서 특성을 설명해 주는데 아이는 도통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아까처럼 네가 나방 닮은 빛 무리도 쏘고 독도 쏘는, 그런 공격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돼?”
그러자 이젠 대뜸 “죄송해요.”라고 울먹인다. 몰라서 죄송하댄다. 그냥 다 죄송하댄다. 그럼 자기 스스로 모드 변환을 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 울 건 없고. 왜 또 울어.
난 외동이지만 내게 어린 남동생이 생기면 이런 느낌일까? 독약의 왕이라는 굉장한 칭호를 달고 있으면서도 하는 짓은 먹이 사슬 최하위층의 초식동물처럼 군다.
바짝 움츠리고 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데이지가 과격하게 꽂아 넣은 단델리온의 스태프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또 하나의 힘을 일깨워 주는 아이템. 바곳이 자신이 의식하여 모드를 바꾼 것도 아니고 그 방법도 모르고 있다면…. 가능성이라면 난데없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힌 이 아이템이 스위치가 아닐까…?
스태프 조각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울어 젖히는 바곳 때문에 양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엄청난 성량이었다. 전투 때처럼 주변에 나방 빛 무리가 포롱포롱 생겨났다. 아씨, 이게 무슨 제어구도 아니고!
스태프 조각을 다시 후드에 꽂아 넣자 간신히 울음을 멈췄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이 아이를 공격형으로 써먹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잘 봐. 이건 수류탄 안전핀이야. 뽑으면 터지지. 뭐가 터지냐면 애새끼 울음보가….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왜 울어, 왜!”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확인은 했다. 스태프 조각을 뽑았을 때, 잠금 표시가 공격형에서 회복형으로 옮겨 가더라.
바곳은 스태프 조각이 꽂힘과 동시에 울음을 그쳤지만, 아직은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울먹울먹 “혼자 남을 때 기억이 떠올라서요….”라고 했다. 좋은 디버프 드라이어드를 얻었지만 이 트라우마를 극복 못 하면 써먹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를 어쩐다.
“아마 친밀도 문제야.”
인상을 잔뜩 쓴 엘더가 답했다. 저 예쁜 얼굴도 비상사태 사이렌급으로 울어 젖히는 것을 버틸 수 없었나 보다.
“형질이 바뀌었을 때 너와 영혼의 연결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태는 너에게 깊은 안정을 느끼지만….”
엘더는 스태프를 들지 않은 손으로 바곳 머리 위의 스태프 조각을 뽑는 시늉을 했다.
“반대 상태는 아직 여기 혼자 남겨져 있을 때의 상태와 같아.”
“그래, 친밀도! 널 처음 뽑았을 때도 안내원이 그런 소리를 했어. 너는 다이아로 어떻게 됐는데 혹시 이 애도 어떻게 안 되려나?”
친밀도는 오랜만에 듣네. 엘더를 개화했을 때 안내원이 그런 소릴 하자 좀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는데. 자존감 높은 드라이어드치고 공략법이 너무나 정직했던 엘더였지.
너도 혹시 돈 많은 주인 좋아하니? 다이아 어필 좀 해 줄까?
“내 주인, 제이. 친밀도는 드라이어드의 뿌리가 제이의 영혼에 얼마나 정착을 잘했는지를 뜻하는 것과 같아요. 처음부터 제이와 맞는 드라이어드가 있고, 낯선 환경에 몸서리치는 드라이어드도 있죠. 최상의 환경인 세계수에서 작은 세계수로 옮겨질 때, 엘더 꼬맹이와 같이 세상에 처음 나서는 드라이어드들은 특히 더 이질감을 느끼게 된답니다. 본능적으로 겁을 먹게 되죠.”
“난 겁을 먹은 게 아냐. 그때는 단지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야. 난 부자인 드루이드를 원했으니까. 그땐 제이가 꽤 후줄근하게….”
말하다 말고 내 눈치를 본다. 왜? 뭐?
“하여튼 지금은 아냐.”
“이 아이가 엘더처럼 속물적인 드라이어드면 좋겠는데.”
“난 속물이 아냐. 그냥…. 하, 됐다.”
엘더는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때의 기억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였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엘더를 지긋이 바라보는 메스키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자 같지만.
“이 묘목 아이는 아직 어려서 현재의 자신과 반대 특성의 자신을 다르게 여기고 있는 것 같네요. 보아하니 애초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드라이어드예요.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라난 드라이어드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동족의 드라이어드들이 모여서 포레스트를 형성했던 것도 아니죠. 흙에서 나고 자라 터득한 사회성이 아니면 같은 드라이어드들끼리 포레스트를 이루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도 있어요. 이 아이는 양쪽 다 하지 못했죠.”
“귀찮은 것을 맡게 됐어. 이미 영혼의 연결을 해 버렸으니 무를 순 없지만. 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야 될 상황이라고.”
엘더가 꾸중하는 투로 말했다.
“성장하면 묘목 아이가 느끼는 이질감도 극복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제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여태 얻었던 내 드라이어드들이 전부 내게 맹목적으로 잘해 주긴 했지. 이 아이는 나의 시련이요, 이겨 내야 할 과제이니라. 앞으로 또 내게 올 드라이어드가 어떨지 모르니 단련해야지. 나는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애정으로!
“어디 보자….”
바곳 아이의 길쭉한 후드를 슬쩍 잡아 들어 올렸다. 솜털처럼 복슬복슬한 청보라색 머리 위에 민들레 꽃씨의 아랫부분과 같은 스태프 조각이 둥실 떠 있다.
울음소리에 당황해서 힘을 줘 내리꽂긴 했는데, 끔찍한 형태로 관통되진 않아서 다행이다. 일정 부분 가까이 도달하면 알아서 멈추는구나. 스태프 조각이 아이의 머리와 맞닿는 부분에 옅은 금빛이 빙글 회오리 치고 있었다. 데이지가 옆에 바짝 붙어서 내가 하는 짓을 구경했다.
스태프 조각을 잡고 아주 조심히 올리니 금빛이 사라질락 말락 하는 부분이 생겼다. 결론은 조금만 힘줘도 뽑히는 이것을… 아이가 준비가 되기 전까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야 된다는 건데.
“데이지, 어쩌면 좋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 데이지와도 친밀도 걱정은 안 했는데. 메스키트도 그렇고.”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드루이드님은 좋은 분이니까 저 애도 그걸 곧 알아볼 거예요! 드루이드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요!”
데이지는 화사하게 웃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마치 이미 준비되어 있던 대답처럼 막힘이 없었다. 절로 데이지의 결 좋은 붉은 머리에 손이 갔다.
데이지가 보내오는 무한한 애정에 벅차오른 마음을 가득 담아 쓰다듬고 있는데, 아이는 해맑게 웃더니 스윽 바곳에게 눈을 돌렸다. 그 웃음이 진하게 청보라의 아이에게 향했다.
‘그렇지? 그래야만 한다?’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웃는 얼굴로 하는 협박은 아니지…?
바곳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다가 내 눈치를 힐끔 보며 어깨를 폈다. 그러곤 눈을 열심히 굴리며 데이지의 머리와 그 위에 얹어진 내 손을 바라보았다. 슬쩍 들어 올린 작은 손이 제 머리 언저리를 떠도는 것을 보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귀여움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나는 작은 생물에 약한가 봐…. 헉헉, 저거 데이지를 부러워하는 거 맞지?
메스키트가 넌지시 저와 같은 크기인 데이지를 롤 모델 삼은 것 같다고 말해 왔다. 또한 좋은 징조라고 했다.
묘목 드라이어드는 자신보다 강하거나 큰 성목 드라이어드를 본능적으로 롤 모델로 삼아 성장하니, 저런 모습을 보아 금방 아이가 드라이어드의 정체성을 찾아갈 것이라고.
“더구나 부러워하는 모습이 제이가 보이는 호의를 받는 데이지 아이의 모습이니, 어렴풋이 작은 세계수에 대한 숭상이 느껴져요. 영혼의 연결까지 했는데 작은 세계수도 못 알아보면 어쩌나 했는데….”
못 알아보면 어쩌려고 했는데…?
“저 묘목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제이의 칭찬인 것 같네요. 옳은 일을 했을 때, 지금처럼 데이지 아이에게 하듯 해 보세요. 금방 반응이 올 거예요.”
전환된 분위기를 살리듯 메스키트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엘더는… 맞으면서 컸다고…. 데이지는 메스키트를 보고 성장하고, 바곳은 데이지를 보며 성장한다. 그 흐름이 뿌듯해서 새삼 내가 드라이어드들을 정말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인, 제이.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모두 마무리되었나요? 29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나 보고 싶어 했잖아요? 이제 다른 데이지가 있는 테라리움으로 돌아갈 건가요? 아니면 29번째 테라리움을 마저 방문할 건가요?”
“응, 확인했어. 확실히 겁쟁이 바곳이 무차별 공격을 해 오는 이곳을 다른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저쪽 데이지랑 약속했으니 빨리 돌아가자. 29번째 테라리움도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다른 일들이 너무 많아.”
무차별 공격이라는 말에 다시 움찔 떨던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이에겐 이 행동이 무척이나 안정이 되는지 맑은 눈을 하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길 이대로 두기엔 좀 그렇지. 늪은 다 뒤집어져서 사방이 끈적한 진흙이고, 퀴퀴한 물비린내도 나고. 나무 썩은 냄새도 나고.”
“확실히 이곳은 스왐프 필드가 자생지인 드라이어드들도 살기 힘들 곳이긴 해.”
엘더가 거머리처럼 늘어진 덩굴 뭉텅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법은 있어요. 그렇게 탐탁지는 않은 방법이지만….”
메스키트의 제안은 불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죽은 것들을 확실히 태워서 땅의 숨통을 터 주자고.
우리가 올 때의 입구 쪽은 불의 씨가 마른 것 같아서, 그대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반대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