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604)

좀 큰일 날 뻔하긴 했어도, 그만큼 직접적으로 저 애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비록 자신의 영토 내에서라곤 하나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내 드라이어드들을 궁지까지 몰고 갔었다.

적으로는 최악인 상대인데 아군으로는 또 저만한 인재가 없지. 방어, 공격, 회복, 이 완벽한 밸런스의 조합에도 틈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해 준 전투가 아니었는가. 아, 그런데 저 겁 많은 성격은 좀 걸린다.

내 말을 들은 메스키트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죠, 태어나기를 그렇게 선택한 자는 없죠.” 하며 혼잣말을 했다. 표정이 바뀌었다. 내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엘더는 여전히 꿍해 있었다. 영입도 전부터 삐걱거리네. 나 잘 선택한 거 맞을까?

“드루이드님! 그래도 제가 더 강해질 거예요!”

적으로 싸웠던 이를 팀으로 받자니 데이지 쪽도 살짝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후려쳐 주긴 했어도 오죽 몰렸어야지. 누구보다도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대단했던 아이라 못내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거기다 제 또래로 보이는 작은 아이니.

“에이, 우리 데이지가 더 강하지. 저 봐. 네가 후 불어도 쟤는 울걸?”

메스키트가 불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바곳 드라이어드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럼 이 설익은 열매를 어떻게 하면 돼?”

“제이가 마저 익게 만들면 된답니다. 영혼의 힘으로. 제이의 영혼으로 열매를 채우는 거예요. 우리들 모두는 열매에서 개화하기 직전에 제이와 영혼을 연결했죠? 그 과정은 드라이어드들에게 제 주인을 인식시키는 과정이랍니다. 마치 처음 마주한 영혼을 깊게 각인시키는 것처럼 말이죠.”

메스키트가 두 손을 포개는 시늉을 했다. 나도 따라서 두 손으로 열매를 감쌌다.

“제이의 영혼으로 익은 열매를 야생의 드라이어드에게 입혀 강제로 각인시키는 거예요.”

영혼으로 어떻게 익게 만들지? 하고 생각할 때쯤 열매의 이상을 깨달았다. 처음엔 얼음처럼 차갑던 열매가 단지 내 체온으로 따뜻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손난로처럼 뜨끈뜨끈했다.

문득 알 품는 에디슨이 된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떠올라 웃음이 나올 뻔했다. 유쾌한 상상은 가슴속 깊은 곳을 톡 건드렸다. 그곳에서 새어 나온 좋은 기운이 아주 천천히 열매에 스며들었다. 열매가 점점 샛노란 황금빛으로 익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열매가 잘 보이게 바곳 아이에게 향했다. 어쩔래? 나는 널 데려가겠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너도 그렇니?

바곳 드라이어드는 눈부신 황금빛 열매에 매료된 것처럼, 겁을 먹은 것도 잊고 입을 헤 벌린 채 열매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밤바다를 닮은 청보라색 눈이 지평선 일출의 노란 태양에 물들어 가는 것처럼, 열매의 금빛을 천천히 담아냈다. 그렇게 내가 든 열매에 모든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겐 그저 따뜻한 열매지만 아이에겐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작은 몸이 일어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미적미적 다가왔다. 바곳이 움직일 때마다 후드에 폭 꽂혀 있는 하얀 민들레 꽃씨를 닮은 스태프 조각도 흔들렸다. 갈망하듯 열매로 손을 뻗길래 슬쩍 거리를 두었다.

열매의 무언가에 홀린 것이 아니라 네 의사가 맞니? 꼭 다이아에 홀린 엘더처럼 군다.

“이런 따뜻한 느낌은 태어날 때 이후로 처음이에요….”

데이지처럼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좀 더 어린 티가 났다. 높고 째지는 미성이 물기를 머금고 귓가를 울렸다.

“그건 너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영혼의 힘이라서 그렇단다.”

메스키트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지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좀 더 자비로워졌으며 나름의 상냥함이 느껴졌다.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나를 위해 기꺼이 버려 주고 오롯이 어린 묘목 드라이어드를 대하는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전 이곳에 있었어요. 모든 것이 축축하고 춥고 어두웠어요.”

다시금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뿌리를 내리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오랜만에 물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죽은 냄새가 나는 물을 열심히 빨아 마셨어요. 그러다 이곳에 뿌리가 박히고 말았어요. 여기 오기 전에는 아주 뜨거운 것을 만났던 기억도 있고 정신없이 흔들려서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던 기억도 있어요. 함께 태어난 형제들과 새 땅에 가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만 남겨져 있었어요. 모두 함께하기로 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마치 그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아이가 보는 것은 그날의 텅 빈 주변인 것 같았다. 암울한 기억을 꺼내자 열매가 그 슬픔에 동조하듯 가볍게 떨었다.

이 울림은 열매를 직접 쥐고 있는 나만 느낄 수 있을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울고 있는데 어느 날 여기 이 빛과 똑같은 따뜻한 빛이 절 찾아왔어요.”

바곳은 두 다리가 생겼지만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밖은 커다란 불이 돌아다녀서 무서웠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따뜻하게 데워 줬던 세계수의 축복이 사라져 갔고, 그 빈자리를 두려움이 좀먹어 갔다고 했다.

홀로 남겨져 어둠 속에서 지내다 보니 메아리쳐 돌아오는 자신의 울음소리만을 벗 삼아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터.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이 상상이 되어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세계수의 축복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드라이어드들이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단델리온의 비호를 받는, 그녀를 포함한 민들레 군락지의 드라이어드들이 받아들이는 죽음과 홀로 남겨져 아무것도 모른 채 바곳 드라이어드가 받아들이는 죽음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었다. 겸허히 때를 기다리는 드라이어드들과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드라이어드.

아이가 늪지대에 자리를 튼 후 이곳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여 찾아오는 생명은 없었다고 했다.

본래는 비가 오면 간간이 물이 넘쳤다가 불의 훼방으로 건조되며, 죽은 식물은 흙으로 돌아가고 볕이 들어 죽음의 기운을 걷어 가는, 나름의 순환이 있는 땅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힘이 이곳의 사이클을 틀어 버린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몰랐기에 이 지형을 악화시킨 것 같았다.

아이가 곳곳에 뿌려 둔 나방과 같은 빛 무리는 자신들의 은신처를 위해 죽은 덩굴과 나뭇가지들을 더욱 꽁꽁 싸맸고, 풀어 놓은 독은 늪에 스며들어 땅이 물을 삼키는 것을 방해했다.

불은 입구를 태워 더욱 좁게 만들었고 덕분에 볕이 들 자리가 없었기에 모든 것은 순조롭게 악화되어 간 것이다.

더 이상 혼자는 싫다며 재차 눈가에 눈물을 매다는 아이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마음속에 어둠을 담은 아이를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민은 잠깐이었다. 아이가 “이 따뜻한 느낌은 마치 제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에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겁이 너무 많아 주변을 초토화시킬 정도인 데다 눈물도 많고, 데이지와 다르게 정말 묘목부터 키우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커다란 영혼에 저 아이 하나쯤은 뿌리를 내릴 곳이 있으니, 내가 찾아냈고 열매를 보인 이상 더 무를 것도 없었다.

나도 메스키트나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 가고 있으니 바곳도 함께 배워 가면 될 거야. 마음속의 어둠은, 내가 햇빛이 되어 주진 못해도 촛불은 되어 줄 수 있으니, 아이 스스로 작은 빛을 쫓아오다 보면 더 밝은 빛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제 주인 찾아가려고 열렬히 빛을 내며 존재감을 뿜던 금빛 열매는 결국 바곳에게 넘어갔다. 아이는 제 작은 손으로 허겁지겁 열매를 쥐려다가 들고 있던 스태프를 떨어뜨렸다.

열매는 아이의 손에 닿자마자 물 만난 각설탕처럼 녹아 내려서 사르르 흡수되었다. 뒤이어 내 마음속에도 따뜻하고 달콤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퍼뜩 놀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깊게 마주쳤다. 드라이어드와의 첫 영혼의 연결은 매번 색다르고 생소했다.

바곳이 열매의 색처럼 금빛으로 빛났고 더 이상은 위협적이지 않은 청보라색 꽃잎들이 풍선 속에서 터져 나온 색종이들처럼 흩날렸다. 강렬했던 존재감과 상반되는 은은하고 맑은 산약초의 향이 새벽안개처럼 가볍게 주위를 둘러쌌다.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채워진 왼손을 들자 바곳의 작은 손이 반사적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아티팩트가 새로 뿌리를 내릴 드라이어드를 환영하듯 가볍게 진동했다. 그리고 이전의 개화 때와 다르게 핸드폰이 울리며 반응했다.

테라리움 아티팩트로부터 데이터 전송을 받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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