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에 메스키트는 흠, 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데이지도 개량종인데!”
개량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엘더가 고개를 저으며 좀 다른 의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데이지 꼬맹이도 개량종이 맞지만,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났다는 건 모체가 다른 식물과의 접목을 통한 돌연변이 개량종일 확률이 커. 거듭하여 태어나며 하나의 종으로 굳어진 거지.”
“쟤랑 뭐가 다른데?”
“대부분 자연에 맡긴 것이란 거지. 결국은 세계수에 있는 모체들의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거니까.”
“그래서 드루이드인 제이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군요. 이제 알겠어요.”
메스키트가 엘더의 말에 긍정하며 이어 말했다.
“연금탑에서 금지된 일을 했군요. 투구꽃 모체와 연금술을 결합해 유전자를 비틀어 개량종을 만들어 냈어요. 결국 저 아이는 인간의 손에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에 세계수에 저 아이의 모체 정보는 없을 거예요. 작은 세계수를 알아보는 것은, 세계수에게서 태어났던 모체의 선조들의 영혼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은 것. 어쩌다 드라이어드가 되어 버렸으니 후에 저 아이가 죽어서 세계수의 품으로 가게 되면 새로 정보가 쓰여지겠죠.”
“저 꼬맹이는 존재 자체가 세계수의 힘을 위반하는 것과 같아. 모든 식물은 세계수의 축복이 닿는 땅에서 태어나 자라며 자연의 순리를 배워야 해. 그건 자연이 가르쳐 주는 드라이어드들의 사회화나 다름없어. 저런 녀석들이 많아지면 방금처럼 너와 같은 작은 세계수를 몰라보고 감히 공격을 해 오겠지. 그건 절대 드라이어드가 아냐. 죽여서 세계수의 품으로 보내자. 세계수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결론은 죽이자 이거니? 죽이자는 말을 뭐 그리 길게 하니. 인공 개량은 흔한 건 줄 알았는데, 연금술이라는 판타지가 가미되니 금지나 위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네.
메스키트도 엘더의 말에 동의하는지 언제라도 숨을 끊어 놓을 수 있도록 랜스를 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2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한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이라고 죽이는 걸 잠깐 고려라도 해 줬는데. 바곳 드라이어드는 세계수의 꽃가루만 받았지, 아예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도 안 해 주는 건가요?
하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데이지의 또래처럼 보이는 것이 더욱. 아니 쟤는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들어보니 날 공격했던 것도 뭣도 모르고 한 행동들이고. 정확히는 겁에 질려서 본능적으로 행동했겠지.
정말 세계수도 쟤가 죽어서 자신의 품으로 오는 것을 바라고 있을까?
그때 난데없이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빛을 내며 진동했다. 살피려 왼손을 들었을 때였다. 머리가 울리며 아찔한 기분과 함께 갑자기 시력이라도 잃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놀라서 소리 지를 새도 없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을 내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그것은 둥근 유리 구슬이었다. 아니 투명한 열매였다. 저도 모르게 들린 왼손이 열매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불현듯 꿈속에서 보았던 검은 나뭇가지가 내게 주었던 열매가 떠올랐다. 그게 이거네.
“제이?”
“갑자기 왜 그래?”
어깨에 따뜻한 손이 내려앉아 흔들리자 어둠이 확 개어지며 비로소 시야가 온전히 돌아왔다.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메스키트와 눈이 마주했다.
그리고 들어 올린 왼손에 쥐어진 투명한 열매와도 눈이 마주쳤다. 모두들 내 왼손의 열매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갑자기… 왜…. 미친, 꼭 내가 손으로 열매를 맺은 것 같잖아.
투명한 열매 너머로 왜곡된 땅이 보이고 메스키트의 검은 갑옷이 보이고 토끼 눈을 한 바곳 드라이어드의 얼굴이 보였다.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열매가 볼록렌즈처럼 구겨 놓으니 더 웃기게 생겼다.
“오해하지 마. 내가 손으로 다이아는 뿜어도 열매를 맺는 것까진 못해. 아니 애초에 다들 날 작은 세계수라고 불러도 인간이거든?”
열매를 보는 데이지의 눈이 반짝반짝 별처럼 빛났다. …마술인 척이라도 할까? 짜잔!
“그건….”
메스키트가 알아본 눈치길래 손을 쭉 뻗어 열매와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그녀는 이도 모자라 허리를 숙였다.
모래 빛 머리가 쏟아져 내리자 강한 스모크 향이 훅 풍겨 왔다. 이곳의 축축한 냄새를 단번에 물러가게 만드는 아주 강렬한 향이었다.
“확실히 양분 열매는 아니고.”
응응, 속이 하얗게 꽉 차 있지 않으니까.
“드라이어드의 열매도 아니지만 세계수의 열매는 맞군요.”
드라이어드의 열매면 황금색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 하지만 세계수의 열매는 맞다. 정확히는 드라이어드 포트에 올리기 전, 세계수의 가지에서 막 딴 상태의 생 열매. 아직 양분이 될지 드라이어드가 담겨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열매.
“생명이 느껴지지 않으나 축복이 느껴지는…. 그래요. 설익은 열매네요.”
응? 이게 덜 익은 열매라고? 하긴, 가지에서 맺히는 열매다 보니 익는 과정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 꿈까지 찾아와 준 열매가 설익은 열매라니. 갑자기 생각해 보니 좀 그렇네.
동작 그만! 밑장을 뺐어! 아니 줄 거면 다 익은 걸 줘야지! 그래야 열매로 쓰든지 드라이어드를 개화하든지 할 거 아냐? 기껏 준 게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이런 덜 익은 열매라니!
차가웠던 열매는 내 체온을 옮겨 받으며 점점 따뜻해졌다.
“그럼 다 익지도 않은 걸 왜 줬지?”
“줬다고요? 이걸 언제 누가 제이에게 준 건가요?”
“언제 줬다고 말하긴 좀 애매한데, 여기 오기 한참 전의 꿈속에서 처음 줬고… 실제로 내가 이렇게 만지게 된 건 방금? 아, 세계수의 가지가 줬어. 꿈속에 까만 가지가 나타나서 끝에 이걸 매달고 있었거든. 마치 따 가라는 듯이 눈앞에 얼쩡거리길래 냉큼 땄는데.”
메스키트와 엘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헉! 혹시 준 게 아니라 내가 멋대로 따 온 거라면…? 미친 완전 도둑 아냐? 그러고 보니 그때 딱히 내게 따 가라고 말을 안 하긴 했어. 배드 제희, 도둑 제희.
제가 그래도 일평생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좀 도덕적으로 살았는데… 다이아로 보상 되나요? 댁네 28번째 가지가 실시간으로 제 다이아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걸로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설익은 열매는 보통 가지에서 따지 않아. 좋지 않은 인식이 있거든. 아주 오래전에 세계가 멸망할 때 세계수의 가지에서 다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어.”
헐! 내게 대체 뭘 준거야? 아니 난 대체 뭘 딴 거야?
“물론 소문일 뿐이지요. 내 주인, 제이. 엘더 꼬맹이의 말은 어린 묘목들을 겁주려고 성목들이 하던 괴담이랍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보다 근본적으로 다 익지 않은 열매는 따지 않는 게 맞답니다. 그곳에서 어떤 드라이어드가 개화할지 모르니까요.”
“그럼 내가 한 드라이어드의 꿈을 짓밟은 거야…?”
열매를 훔친 것보다 좀 더 고약한 짓을 한 것 같은데….
“생명은 없으니 그렇게 울상 지을 필요는 없어요. 아직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배정받기 전의 열매니까요. 어쩌면 양분 열매가 될 수도 있었겠죠?”
손발이 덜덜 떨릴 뻔한 것을 메스키트가 다정하게 내 볼에 손을 대며 달랬다. 그녀의 인자한 눈을 보니 정말 큰일은 아니구나, 하고 곧바로 안심되었다.
“설익은 열매는 세계수의 가지 가장 끝부분에 맺힌 열매들이에요. 드라이어드의 정보는 안쪽에서 가지 끝부분으로 흐른답니다. 또한 성장 속도도 안쪽이 가장 빠르고 가지 끝이 가장 느려요.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받지 못한 채로 익어 버린 열매는 양분 열매가 되는 거랍니다.”
나는 손에 든 열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땄던 열매들과 크기는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사과처럼 덜 익은 표시가 껍질의 색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들고 있는 손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기만 했다.
“엘더 꼬맹이의 말은 괴담이 맞는 이유가… 사실은 과수원에서 설익은 열매를 따기도 한답니다. 익는 속도가 느려서 개화 철을 놓쳐 버린 열매는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열매 안에서 개화하지 못한 드라이어드는 열매에 담긴 축복의 힘이 사라지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답니다.”
썩는다는 건가…? 아니 이렇게 표현하니 좀 기괴한데.
“그렇다고 처리를 위해 값을 낮추거나 무상으로 나눠 주게 되면 다들 일부러 개화 철이 지나서 과수원을 찾게 되겠죠. 그래서 열매가 익기 전, 드라이어드의 정보가 담기기 전 수확을 한답니다.”
“그럼 설익은 건 어떻게 처리하는데?”
“익지 않은 열매는 얼핏 보면 쓸모가 없어 보여도 그것 자체로 세계수에서 태어나 축복의 힘을 가진 것. 쓰이는 곳이 있답니다. 바로 야생의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을 때 사용해요.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드루이드들에게 따로 판매한답니다.”
메스키트는 그렇게 말하며 바곳 드라이어드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바곳 드라이어드가 깜짝 놀라 튀어 올랐다.
“세계수가… 저 묘목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곤 눈을 길게 감았다 천천히 떴다.
“그리고 세계수의 힘에 위반하여 태어난 존재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품어 주기로 결정했나 보군요. 그것도 내 주인, 제이. 당신의 꿈속을 찾아와 부탁할 정도로요. 어째서 세계수는 나의 작은 주인을 위험하게 만드는 존재를 기꺼이 맡아 주길 바란 걸까요?”
“거절해. 어차피 세계수가 멋대로 내린 결정이야. 네가 꼭 따라야 할 필욘 없어.”
엘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저게 다이아를 달란 손은 아닐 테고….
“그 열매, 원치 않으면 줘. 내가 부술게. 저게 작아서 죽이기 망설여진다면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둬. 어차피 세계수의 축복이 다하면 순리에 따라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세계수는 너희 드라이어드들한테 엄청 대단한 존재 아냐? 이건 말 그대로 신과 같은 세계수란 존재가 내린 계시와 같은 건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대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스키트는 내 손에 쥐어진 열매를 발견했을 때 이외에는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뭔가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엘더는 불쾌하단 표정을 했다. 데이지는 고요하게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평소의 얼굴을 했다. 마치 그랬던 거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전부란 것처럼.
그건 세계수보다… 작은 세계수인… 주인인 내가 더 중요해서.
“괜찮아. 아니 까짓것 디버프 드라이어드도 생기면 좋지! 팀에 도움이 될 거야!”
“제이….”
메스키트가 다시 재고해 보는 것은 어떠냐는 물음이 담긴 목소리로 날 불렀다.
“뭐, 세계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그런 거창한 마음을 먹은 건 아냐. 그냥 단지 저 애는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잖아? 저렇게 태어나기를 선택한 건 아니잖아.”
태어나기를 낮은 등급으로 선택하여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없는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오며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데이지를 보며 결심한 것.
데이지가 가장 낮은 등급인 노멀 등급으로 태어났어도 아이의 한계까지 낮지 않다. 누구도 아이가 노멀 등급이라고 업신여겨선 안 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금지며 위반이란 단어로 판단되어 버리는 바곳 드라이어드도, 첫 만남이 다소 불쾌했을 뿐 이후의 생까지 잘못될 것이라 규정될 순 없다.
내겐 저 바곳 아이의 탄생 배경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