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604)

묘목이라도 내게 공격을 가한 이상 자비를 둘 생각은 없는지 메스키트의 랜스가 로켓처럼 쏘아졌다. 그 순간 드라이어드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나방 빛 무리가 사방에서 뛰쳐나와 메스키트의 시야를 가렸다. 그 때문에 공격이 잠깐 주춤했다.

풍압에 화악 갈라져 나간 빛 무리 사이로, 같이 풍압의 영향을 받은 작은 드라이어드가 뒹굴 뒤로 구르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아주 운 좋게 랜스의 끝을 피했다.

드라이어드가 시끄럽게 울수록 나방 빛 무리의 공격은 거세졌으며, 급기야 검은 액체가 고여 있던 늪이 온천수처럼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껏 앞에 끌어다 놓았어도 이 주변이 오롯이 저 녀석의 영토라 우리 쪽 페널티가 너무 컸다.

나도 시들링이 했던 것처럼 아티팩트에서 내 드라이어드들의 자생지를 불러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건 왜 그래프트처럼 하는 방법을 단번에 깨달을 수 없는 거지? 이것도 레벨 때문이야?

파나케이아의 힘을 믿고 나아가려는 메스키트는 자잘하게 시야를 가리거나 행동을 저지하는 공격들에 혀를 찼다.

“겁에 질려 있네요.”

데이지가 부메랑을 날려 메스키트를 엄호하며 말했다.

“데이지 아이의 말이 맞아요. 겁에 질려서 되는대로 모든 공격을 쏟고 있어요. 공격이 너무 산발적이라 제게 어그로를 끌어 올 수가 없어요!”

메스키트는 차라리 자신보다 더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데이지를 보내려다가도, 민들레 꽃잎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지속시간 내에 틈을 만들려는데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 말은 저 애새끼가 우리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서워서 겁에 질려 발악하고 있단 것이었다.

주의를 좀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지속시간이 촉박하더라도 내겐 아직 파나케이아 반병이 남아 있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머리를 좀 굴려보자.

내 드라이어드들의 전투 센스에 모두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럴 때 하는 일 없는 주인인 내가 나서서 뭐라도 해야 한다.

저것도 결국 드라이어드니까 모체가 되는 식물이 있겠지? 사용하는 중독 디버프 스킬이나 오면서 봤던 것들을 조합해 보면… 어쩌면 모체가 16번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보내온 그 맹독초일지도 몰라.

진짜 극악의 확률로 마침 드라이어드가 될 그릇이었고 거기에 세계수의 꽃가루를 받아 용케 드라이어드가 됐네.

아씨,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 맹독초, 세계수의 가지를 좀먹어 가던 벌레를 퇴치할 용도로 쓸 예정 아니었어? 묘목이어도 강한 이유가 있었네. 아니, 강할 수밖에 없잖아? 짜증 나!

침착하자. 마냥 암울하게만 생각해 봤자 하나도 도움 안 돼.

그래서 그 맹독초라는 게 대체 종류가 뭐길래! 칼미아도 맹독초라고만 하지 말고 이름이라도 좀 알려 줬으면 좋았잖아!

드라이어드들은 모체로 삼는 식물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갔다. 외모뿐만 아니라 특수성까지.

데이지는 석판에 쓰여 있던 개량종 데이지의 특징처럼 생명력이 강했지만, 풀꽃의 특성상 메스키트의 지진을 견디지 못할 만큼 뿌리가 약했다.

메스키트는 거대한 모체처럼 우직하고 강한 공격력을 가졌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는 모체 나무의 특성상 데이지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엘더는… 모체처럼 예쁘지…. 흠….

외모? 그래! 드라이어드들의 외형엔 모체의 모습들이 특징처럼 남아있다. 모체를 나타내는 꽃이나 잎으로 장식을 하고 있기도 했고.

열심히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울어 재끼는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웃기게 생긴 후드가 특징일지도 몰라. 엘더의 후드에 촘촘하게 자리 잡은 꽃들처럼. 머리색과 눈 색이 청보라색인 것도 힌트가 되겠지.

눈에 쓴 커다란 안경도 힌트가 될까? 아쉽게도 데이지처럼 대놓고 보이는 곳에 꽃이 자리하거나 하진 않았다.

독초이고 청보라색이고 위로 길쭉한 후드…. 애초에 내가 아는 독초가 영화나 만화에서 나온 투구꽃 말고 아는 게…. 어라? 투구꽃? 바곳? 영어 이름이 수도승의 후드(monk’s hood)라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던 그 꽃?

헐,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아 아니 대충 찍은 거지만 꽃 색도 그렇고, 내가 아는 선에서 다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바곳의 약점이 뭐죠? 아놔, 알아맞히면 뭐해!

그때 파나케이아를 꺼내며 함께 딸려 나왔던 단델리온의 스태프 조각이 작게 떨었다.

단델리온의 또 하나의 꽃말의 힘이 담겨 있는 물건. 신의 계시의 힘이 담겨 있는 물건. 특별한 힘으로 또 하나의 힘을 깨울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전해 준 단델리온조차도 용도를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런데 지금이 바로 이 아이템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처럼 파르르 하얀 솜털이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힘을 깨울 수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 두 개의 힘. 양면성?

데이지에게는 반응이 없었던 이 아이템. 메스키트는 물론 엘더와 함께 있을 때도 반응하지 않던 아이템. 그렇다면 저놈? 멀리 있는 바곳 드라이어드와 스태프 파편을 번갈아 보았다.

바곳이 옛날엔 사약으로 사용되었던 독초긴 해도, 그와 반면에 유명한 한약재로 쓰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민들레 꽃잎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디버프를 걱정해야 될 때가 오고 말았다. 이제 이 파나케이아 반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아직 엘더가 중독에 걸리기 전이니 메스키트에게 메인을 돌려 방어를 굳건히 했다. 제발 모두가 버텨 줬으면!

입구를 보니 다시 불들이 몰려 있었다. 불은 바곳 드라이어드의 영토에 진입하면 지속적으로 디버프를 받아 작아졌고, 드라이어드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꺼졌다. 그런데 주의를 돌리는 데 마침 저만한 게 없잖아? 안 죽으면 되지.

“어딜 가려고?”

엘더가 이상 행동을 하려는 날 한 팔로 끌어안으며 말렸다.

잠깐 놔 보렴. 내가 다 생각이 있어. 어디 갈 건 아니고 네 큰 키가 좀 방해가 되어서.

불을 키우는 것은 내 주특기였다. 경험치 버프 대용으로 잘 이용해 먹었지. 지금은 목적이 좀 다르지만. 내가 살다 살다 불을 서포트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

주머니에서 다이아를 꺼내 팔을 크게 휘둘러 불에게 던졌다. 불들이 빠르게 달려와 떨어진 다이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꼭 모이 앞에 모인 비둘기 같았다.

이쪽이란다, 구구구구.

한 개로는 디버프에 깎여 나가는 것을 충당하기 힘들어 보여서 대여섯 개씩 막 던졌다. 엘더가 이 정신 없는 상황에서 아까운 다이아를 날리며 뭐 하냐고 조잘거렸다. 하지만 팀을 서포트하는 데 바빠서 잔소리가 오래가진 않았다.

불들은 더 끌리는 먹잇감인 다이아를 따라가느라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이아를 열심히 던지며 불 무리를 이끌었다. 어디로? 바곳 드라이어드가 있는 곳으로.

헨젤과 그레텔의 하얀 조약돌 이정표처럼, 불들이 다이아를 열심히 주워 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꽤 깊숙한 곳까지 진입했음에도 다이아의 서포트를 받은 불은 더 작아지기는커녕 훌쩍 커졌다.

이때다 싶어 메스키트의 방패 뒤로 몸을 숨기고 바곳 드라이어드가 있는 곳에 다이아를 왕창 뿌렸다. 그곳까지 도달한 불들이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다이아를 먹은 양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세계수의 가지와 좀 떨어진 곳이라 해도, 축복 때문에 저 크기가 한계겠지.

불들은 다이아 먹이가 끊기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바곳 드라이어드로 관심을 돌렸다.

이쪽에서 보낸 불입니다, 찡긋.

갑작스레 거대한 불 무리와 마주하게 된 바곳 드라이어드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격이 분산되었다. 틈이 생겼다!

그래도 생긴 것은 묘목인 데다가 디버프를 거는 것 외엔 메스키트의 모래 벽에 흠집도 못 낼 만큼 약한 공격이라, 불들을 상대로 저것이 오래 버틸 리 만무했다. 저 드라이어드를 먹은 불이 끔찍한 힘을 사용할 가능성도 높았다.

영혼의 연결을 데이지로 바꿨다. 그리고 스태프 조각을 데이지에게 주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날렵하고 빠른 데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행해 줄 수 있는 데이지.

아이가 스태프 조각을 쥐고 퍼뜩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연결 덕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곧장 데이지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메스키트! 지진을 사용해 줘!”

엘더에게 폴짝 매달려 소리쳤다. 메스키트는 내 요청에 반사적으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이지는 여봐란듯이 다시 한번 천장의 나뭇가지를 향해 줄기를 뿜었다. 줄기를 타고 데이지가 지상에서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메스키트가 랜스를 땅에 꽂았다.

그녀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지진이 지반을 뒤엎으며 순식간에 바곳 드라이어드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바곳 드라이어드도, 그를 막 공격하려던 불들도 모두 지진에 휩쓸려 크게 휘청거렸다. 튀어 오른 지반이 바곳 드라이어드와 불의 사이를 갈라놓은 순간, 철퇴처럼 나아간 데이지가 스태프 조각을 바곳 드라이어드에게 꽂았다.

아니… 갖다 대라고 했지…. 누가 보기에도 아플 정도로 그렇게 내리 꽂을 줄은…. 데이지, 화가 많이 났구나.

후드에 스태프 조각이 꽂힌 바곳 드라이어드는 빛을 내며 하얀 민들레 꽃씨에 감싸였다. 동시에 공중을 날아다니던 나방 빛 무리들이 파삭 깨지며 모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온천수처럼 튀어 오르던 늪의 물들도 훅 내려앉았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템이 효과가 있었다!

메스키트는 공중에서 내려온 데이지가 땅을 밟는 타이밍에 맞춰 지진을 멈췄다. 데이지는 재빨리 단도를 휘둘러 네 개의 불을 차근차근 모두 꺼 버렸다. 아이의 단도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지점에 바곳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잠깐! 타임! 지척에서 극적으로 단도가 멈춰 섰다.

민들레 꽃씨가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울음을 멈춘 바곳 드라이어드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도 울어서 붉게 짓무른 눈을 하고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안 죽여?”

엘더가 조심히 날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진짜 괘씸하긴 한데 아직 데이지 또래의 묘목이어서 찜찜하기도 하고 확인할 것도 좀 있어서.”

거의 확실한 것 같지만, 진짜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보내온 맹독초가 맞는지 궁금했다.

메스키트가 늪지대를 전부 뒤엎어 놓은 탓에 고여 있던 물들이 튀어 사방이 물바다였다. 밟아도 되나 망설이고 있는데, 메스키트가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독이 모두 풀렸어요. 공중을 날아다니던 힘들이 사라진 것도 모두 저 드라이어드에게 사용한 물건과 관련이 있는 거겠죠?”

그녀는 좀 걷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따라와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응, 맞아. 단델리온이 준 스태프 조각을 사용했어. 저 드라이어드의 또 다른 힘을 일깨웠나 봐.”

내 대답에 메스키트가 묘한 표정을 했다.

“나의 주인에게 했던 공격들로 따지자면 지금 당장 랜스로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거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제이?”

“야, 꼬맹이!”

그 이유를 지금 좀 찾아봅시다.

내 외침에 바곳 드라이어드가 퍼뜩 어깨를 떨었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겁이 많은 상태였다. 데이지는 여전히 단도를 거두지 않았다. 허튼짓을 하면 그대로 꽂아 넣을 기세였다.

바곳 드라이어드는 자신을 부른 나와 데이지, 메스키트의 위협적인 얼굴을 차례로 보며 코를 훌쩍였다.

“모체가 바곳, 투구꽃이 맞니?”

난 이미 널 바곳 드라이어드라고 부르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면 좀 쪽팔릴 거야. 그런데 내 질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도 데이지의 단도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공포심이 하늘을 찔러서 그런 듯 했다.

데이지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단도를 내렸다. 그제야 꾹 다물려 있던 입이 열렸다.

“네…. 정확히는 투구꽃에서 개량되었어요…. 제 모체는 인간들 손에서 인공적으로 태어났어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