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우리 파티를 옭아매면서 저쪽은 아직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엘더가 더 버틸 수 있도록 메인을 엘더로 바꿨다. 아티팩트로 들어갈 것을 권했더니 거절했다.
지금 아티팩트로 돌아가면 생명력이 깎이는 정도를 낮추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세계수의 힘으로 회복될 수도 있지만, 그 시간 동안 우리 파티는 힐러 자리가 공석이 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것 때문이다.
자신은 다 죽어 가면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맡은 바 의무를 다할 것을 주장했다.
미치겠네. 외상이 아니라 포션도 소용없고. 잠깐. 포션?
주머니를 탈탈 터니 기억 속에서 잠시 잊혔던, 단델리온이 주었던 파나케이아가 담긴 병과 그녀의 스태프 조각이 함께 튀어나왔다.
역시 왕의 선견지명! 분명 이거 줄 때 웬만한 병은 다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했어! 설마 이럴 때를 예견하고 준 건 아니겠지…?
“이거 빨리 마셔!”
뚜껑도 친히 열어서 건네주었다. 하지만 엘더는 거절했다.
아씨, 이걸 왜 거절해? 치료될지 안 될지는 마셔 봐야 아는 거 아냐? 아끼다 쓰레기 된다고! 지금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가 리타이어되게 생겼는데 만병통치약 따위….
“아직 버틸 수 있어.”
“아니 멍청하게 왜 버텨?”
내 물음에 엘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힘을 가늠하고 있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내 회복의 힘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아직까진 내 회복력이 우세해. 독의 힘이 내 힘을 능가하는 때를 알아야 해. 메스키트와 데이지도 독에 걸릴 것을 대비하여 전략을 짜야 하니까.”
그리고 병을 슥 밀어 내 입에 대었다.
“그리고 내가 굳이 마실 필요 없어, 네가 마시면 돼. 기왕이면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메스키트와 데이지까지 독에 당하고 말았을 때, 최후의 순간에 마셔. 영혼의 연결을 얼마나 간단하게 보고 있는 거야? 넌 우리의 작은 세계수. 네 영혼을 타고 흐르는 약의 힘은 우리에게도 흘러.”
엘더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의 사이를 다시 확인 받게 된 것과 날이 갈수록 다르게 느껴지는 엘더의 면모 때문이다.
무언가 내 머릿속에서 정립할 수 없는 이상하고도 어색한 기분이 불쑥 솟아올라 온몸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래,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이 기묘한 감각 때문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지?
하지만 급박한 현실은 당장의 이 기분을 모조리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파나케이아 병의 뚜껑을 다시 닫고 꼭 끌어안았다. 최후의 순간에! 내가! 마신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일단 희망의 빛이 한 줄기 존재했다.
불규칙적으로 전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액체는 메스키트가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지금은 가능한 디버프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
“데이지, 저 이상한 공격이 날아오는 곳으로 한 방 먹여 줘!”
적은 아주 멍청하게, 그리고 정직하게도 고정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공격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곳에 자신이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 애가 아직까지 근접 공격만 가능했다면 시도 못 할 일이었다. 운 좋게 데이지가 포레스트의 왕이 되며 또 다른 데이지의 능력까지 흡수하게 되었다. 단발성이지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지.
내 말에 데이지는 단도 두 개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메스키트가 슬쩍 방패를 비켜 준 틈을 타 부메랑을 던졌다. 반짝이는 투명한 빛으로 둘러싸인 그것이 빠른 속도로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꽤액, 하는 괴상한 비명이 들리며 우리를 향하던 공격이 중단되었다.
저거 사람 소리지?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회수된 부메랑을 쥔 데이지도, 그곳을 처음부터 끝까지 노려보던 메스키트도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메스키트의 표정은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더니 이내 불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매서운 눈이 되었다.
“감히….”
그녀의 분노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자에 대한 분노와 같았다.
“메스키트…?”
불을 향한 분노보다 한층 더 짙은 느낌이었다.
“설마 했는데… 드라이어드예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헐! 드라이어드? 설마 야생 드라이어드?”
“이곳에 드루이드의 기운은 없으니 야생이 맞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것이 드라이어드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세계수나 다름없는 제이를 공격했다는 거예요! 감히…!”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던 단델리온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드루이드들은 드라이어들의 희망이자 작은 신이라고 했지. 왕이라는 높은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낮은 자의 태도를 보였었다.
그녀도 야생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학습된 것처럼 행동하던 모습들.
앞서 겪었던 단델리온의 모습들과 메스키트의 분노에 의하면… 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야생의 드라이어드도 내가 드루이드임을 알아챘으면 공격을 멈췄어야 했다.
“좀 전에 접근한 불들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저 정도 거리라면 본능적으로 제이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야. 너의 영혼의 크기는 이제 결코 작지 않아. 멀리서도 드라이어드라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기운을 뿜고 있어.”
“주인도 없는 드라이어드가 본인의 의지로 드루이드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요!”
데이지가 메스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메랑을 꽉 쥐고 재차 몸을 틀었다. 괘씸하니 다시 한번 공격을 먹여 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울어? 누가? 우리 애들은 아닌데. 설마… 저기 숨어 있는 드라이어드가…?
부메랑이 데이지의 손을 떠나려 할 때,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중단되었던 공격들이 다시 전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나방 모양의 빛 무리가 해일처럼 덮쳐 왔다. 진짜 곤충 나방이 아닌데도 퍼덕이는 날개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메스키트가 당장 멈추라고 소리치며 모래 벽이 튀어 오르는 찰나의 틈을 이용해 랜스를 내질렀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모든 힘을 집중하여 내지른 기운이, 풍압만으로 날아오는 모든 빛 무리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강하기는 해도 메스키트는 근접 파이터이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적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스페셜한 메스키트가 나서려고 해도 상대가 저렇게 멀리서 죽치고 있으면 무리였다. 지독한 한계였다.
저 새끼 저거, 알고 저기서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여기 드루이드 있어요! 이 자식아!
단델리온 때도 그러했지만, 아직까지도 드루이드라는 직함만으로 드라이어드들에게 과도한 대접을 받는 것이 익숙지 않아 껄끄러워도 지금은 좀 피력해야겠다.
“세계수 알지? 내가 그 드루이드라고! 작은 세계수를 건드리면 죽 되는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공격이 더 거세졌다. 아니, 우리가 반격하면 할수록 더 발악하는 것 같았다. 답이 없는데? 지렁이를 밟은 것처럼 마구 꿈틀대잖아!
갑자기 데이지가 엘더의 모습을 한참 보더니 이윽고 내 눈치를 보았다.
“아직 가능한 것 같으니까…. 우린 나아갈 수 없는데 적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마냥 불리해요! 제가 끌어 올게요!”
자신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눈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차! 저 눈은 거대한 벌레 불의 어그로를 끌러 혼자 뛰어나갈 때처럼 위험한 일을 감행하려고 할 때의 눈이었다.
말릴 틈도 없이 데이지가 재빠르게 팔에서 줄기를 뿜어 올렸다. 쓰러져서 아치처럼 천장을 형성하고 있던 죽은 나무의 가지에 줄기가 빙글 묶였다.
줄기를 붙잡고 데이지가 붕 떠올랐다. 지상은 메스키트가 발길을 돌릴 정도로 위험한 것들이 포진해 있으니 공중으로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네가 생명력이 아무리 높아도 정통으로 맞으면…!”
엘더가 다급하게 스태프를 데이지에게 뻗었다. 줄기를 잡고 시계추처럼 포물선으로 휙 나아가는 데이지에게 행운 버프가 적중했다. 데이지는 쏟아지는 검은 액체를 날렵하게 피하며 우리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녀는 천장과 가까워질 정도로 높아졌을 때, 상대의 움직임이 잠깐 멈춘 틈을 타 다른 손으로 줄기를 쏘아 보냈다. 멀리서 또 한 번 오리 울음 같은 비명이 꽤액, 하고 들렸다.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는 나아갈 때만큼 매서웠다. 다시 데이지가 뒤로 돌아올 때 쏘아 보냈던 줄기는 전리품을 꽁꽁 묶어서 당겨 왔다. 그러나 끌려오던 전리품은 반동으로 바닥의 늪에 거하게 처박혔다.
공중에 포진해 있던 청보라색 빛 무리들은 결국 돌아오던 데이지에게 해를 입혔다. 공격을 받아 힘이 빠진 데이지는 줄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떨어지는 아이를 메스키트가 잽싸게 받아 냈다.
“데이지!”
독에 당한 것인지 데이지도 엘더처럼 눈가가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엘더가 다급하게 데이지의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갈수록 타격이 커지는 자신의 중독 디버프 탓에 데이지의 것까지 케어하기에는 점점 힘이 달리는 것으로 보였다. 회복의 빛의 세기가 계속해서 옅어지고 있었다.
“지금이 네가 말한 때가 맞지?”
엘더의 답을 굳이 들을 필욘 없었다. 파나케이아 병의 뚜껑을 열고 들이켰다. 민들레 군락지에서 맡았던 그 풀 내음이 씁쓸한 맛과 함께 훅 밀려들어 왔다. 병 속의 액체가 줄어들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온몸에 화한 기운이 돌았다.
반쯤 비웠을까. 갑자기 이때다 싶은 지점이 있어 마시는 것을 멈췄다. 심장을 중심으로 상쾌한 기운이 화악 퍼져 나갔다.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몹시 후련해졌다.
동시에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영롱한 진주색 빛이 아롱거렸다. 작고 노란 민들레 꽃잎들이 토성의 고리처럼 빙글 돌며 희미하게 꽃향기를 뿜어냈다.
엘더와 데이지의 눈가에 자리하고 있던 보라색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졌다. 힘겨워 보이던 얼굴도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파나케이아의 효과는 대단했다.
메스키트는 제 주위를 맴도는 꽃잎들을 보며 말했다.
“이 민들레 꽃잎들이 사라지기 전까진 파나케이아의 효과가 지속될 거예요. 그동안 독에 당해도 파나케이아의 힘으로 무시할 수 있다는 거죠.”
이 기회에 아예 끝장을 내 버리려는 생각인지 메스키트가 랜스를 들었다.
데이지에게 끌려 나와 늪에 처박혔던 드라이어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요정의 모자처럼 끝이 뭉툭하고 위로 길쭉한 후드를 쓴 얼굴이 보였다. 알이 아주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에서 검은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사이로 짙은 청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두 눈은 혼란을 담아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 저거 애새낀데?”
“묘목이라고?”
데이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앳돼 보이는 얼굴 때문에 당황했다. 어린 남성형 드라이어드의 눈에선 늪의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런 어린애한테 여태 고전했다고? 어쩐지 무척 열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