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과 양옆으로 드라이어드들의 극진한 보호를 받으며 늪지대로 들어섰다.
거무죽죽하게 메말라 죽은 나무들은 지독한 냄새를 뿜었다. 땅에 고여서 순환되지 못해 썩은 물의 냄새도 고약했다.
불에 의해 다 타 버린 것들이 내는 향은 건조하고 텁텁하게 눈과 코, 피부를 자극한다. 반면 이곳은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게 콧속에 들러붙는 죽음의 향이 내려앉아 있었다.
“세계수의 28번째 가지가 힘을 잃었던 시기가 길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 습지대가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해. 벌써 불 때문에 메말랐어야만 해. 균형이 깨져 멀리 있던 26번째 테라리움도 가뭄의 피해를 받았으니까.”
“제이, 민들레 군락지엔 샘이 남아 있었죠? 민들레 포레스트의 왕이 그 지역을 비호했으니까요.”
“응. 꽤 넓은 군락지가 메마르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샘이 있었어.”
“엘더 꼬맹이의 말처럼 이곳에 비교적 수심이 얕긴 해도 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답니다. 어쩌면 불의 영향을 막은 어떠한 존재가 이곳에 있을 수도 있답니다. 하지만 불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어도, 그것과 우리가 아군일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어쩐지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다. 매번 불에 스테이크처럼 구워지는 끔찍한 열기만 겪어 왔지, 이렇게 온몸이 잘게 떨리는 냉기는 처음이었다. 소름이 돋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갑자기 엘더가 내 눈앞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장난감이 흔들어진 고양이처럼, 천천히 거두어지는 손을 따라 휙 고개를 돌리니 예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엘더가 보였다.
“뒤돌지 마.”
“왜?”
“네가 봐서 좋을 건 없는 광경이야.”
“뭐가 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잖아.”
“검게 썩은 시체 따윈 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당연하지. 내가 충고를 군말 없이 수행하며 엘더의 예쁜 얼굴을 명화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을 때, 메스키트와 데이지가 내 뒤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적뒤적 무언가를 헤집어 놓는 소리도 들렸다.
“이번엔… 16번째 테라리움의 문양이군요. 가죽 주머니가 있어요, 제이. 죽은 자의 소유물로 보이진 않는군요. 주머니가 거칠게 뜯긴 흔적을 보니 강제로 탈취한 것 같습니다. 안엔 습기를 머금은 흙이 조금 담겨 있고…. 전복된 마차의 그 상자에 있던 흙들과 같은 종류 같군요.”
그 말에 엘더에게 바짝 붙었다. 저건 또 왜 튀어나오는데? 그놈의 16번. 추리 게임은 쥐약이라 학생 때 유행했던 <블랙 룸>이란 게임도 안 해 봤는데.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포일러 포함된 공략으로 결말만 보고 싶다.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을 거란 판단에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빨리 확인하고 여길 뜨자. 비록 다 망가졌더라도 28번째 테라리움이 더 아늑했어.
잘 나아가던 메스키트가 별안간 멈춰 섰다. 그녀의 발 앞엔 한 끗 차이로 석유처럼 검은 액체가 가득 고여 있는 늪이 존재했다.
“…이건 엘더 꼬맹이만으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엘더는 메스키트의 말에 발끈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둘은 알고 지내 왔다. 엘더의 한계는 그녀가 제일 잘 알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에이스로 활약해 온 엘더가 못 하는 일이 있다고?
그녀는 방패를 세우고 천천히 검은 늪에서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 시선은 정면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린 거대한 벽이 되는 메스키트의 보호를 받아 조금씩 물러났다.
“내 주인, 제이. 엘더는 회복의 힘이 뛰어나지만 해독 능력은 없어요.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깎아 먹는 독의 힘엔 맞서기 힘들어요. 가장 우려하는 일은… 엘더 꼬맹이의 회복 능력을 웃도는 독의 힘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독의 힘이 무서운 이유는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깎는 것 외에도, 방치해 두면 힘이 배가 되는 것이라고 추가로 설명했다.
즉, 고정 대미지처럼 숫자가 100씩 꾸준히 깎이면 엘더가 지속 광역 힐을 깔면 되지만, 100이 시간이 지나면 200이 되고 300이 되는 식으로 결국엔 즉사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디버프 해제 능력이 없는 파티가 만나면 가장 쥐약이 되는 적을 만난 것 같다.
아놔, 독 타입엔 뭐죠? 땅인가요? 우리 메스키트가 사막 출신이라 어떻게 좀 안 되려나? 하고 보니 표정이 너무 심각하다. 이게 안 되네. 다음에 다시 와서 도전하겠습니다. 제가 아직 이 체육관에 도전할 준비가 안 됐네요. 좀 더 뽑기 해서 오겠습니다.
“빨리! 돌아가자. 좀 더 궁리해 봐야겠어. 엘더로도 안 된다면 진짜 심각한 상황이잖아?”
짱 센 힐러 믿고 보스도 잡고 승승장구하던 파티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해독 스킬이 있는 드라이어드는 뭐가 있을까? 열매를 개화한다고 해도 원하는 드라이어드가 나올까?
뽑기 하려면 다시 26번째로 돌아가야겠지? 그런데 여길 또 언제 오지….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금방 입구가 보였다. 그 근처를 작은 불들이 흔들흔들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돌아가려던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곧바로 작은 불들에게 인식 당했다. 어그로 속도가 역시 수준급이다. 서로의 수준 차이는 개나 주고, 불은 그저 탐욕스럽게 빛나는 먹이를 삼키기 위해 작은 몸을 화르륵 떨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사방에 늘어진 덩굴들이 그에 맞춰 파르르 떨었다. 곧바로 인기척을 쫓아 불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은 습기를 머금은 죽은 나무들과 덩굴을 태워 가며 진입해 오다가 늪을 건널 때쯤부터 점점 더 작아지더니,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는 완전히 꺼져 버렸다.
보통의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픽 꺼져 버렸지? 늪에 고여 있는 물이 보통 물이 아닌가? 썩은 물인 건 알겠는데….
그 이상한 광경을 지켜보며 고뇌에 빠졌을 때였다.
“이런….”
갑자기 메스키트의 기세가 달라졌다. 방패에서 터져 나온 금빛의 모래들이 그녀의 발밑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파도치듯 좌르르 튀어 올랐다.
이전에 데이지에게 걸어 준 적 있는 그녀의 지원 스킬이었다. 총 세 번까지의 유효타를 모래의 벽으로 막아 주는 스킬. 전에 봤을 때보다 더 거대하게 튀어 오른 그것이 전방에서 쏘아져 나온 검은 액체를 막아 냈다.
엘더가 곧장 연계에 들어갔다. 붉은빛의 방어막을 반구형으로 두르며 메스키트가 다음 기술을 사용할 시간을 벌었다. 데이지 역시 단도를 빼 들었지만 메스키트의 저지에 막혀 물러났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태도. 지금은 많이 강해진 데이지라도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릴 발견했군요.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떨어진 독들이 공기 중에 녹아들고 있어요.”
메스키트의 말에 땅을 보니, 진득하게 눌러 붙은 검은 액체 위로 스멀스멀 음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높이는 낮아 내 무릎까지도 오지 못하지만 저런 것이 사방에 깔리면 그야말로 지뢰밭이겠지.
“자기 영역으로 만들고 있어. 메스키트의 모래 벽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할 정도로 약한 공격이지만 지속적으로 조금씩 생명력을 깎아 먹으려는 거야.”
그 말은 벨라돈나가 당장 옆에 있는 것과 같은 효과라는 거네? 그 드라이어드는 필드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주위를 해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까.
“네가 제일 조심해야 돼.”
엘더의 말에 데이지가 바짝 내게 붙었다. 공격을 몸으로 막아서라도 날 지키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엘더의 말은 맞다. 내가 당하면 전멸이니까. 나와 영혼이 연결되어 내 상태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는 드라이어드들이기 때문에.
오죽하면 내가 피곤할 땐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드라이어드들까지 피로를 느끼게 될 정도였다. 여기서 내 드라이어드들이 아무리 독을 피하려고 애써도 내가 걸리면 체스에서 킹이 잡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임 끝.
그래! 내가 제일 조심할게! 어차피 출구까지 거리도 멀지 않겠다, 메스키트가 막는 동안 내가 잽싸게 이곳을 뛰어서 탈출하면 좀 나을 거야! 드라이어드들은 나보다 빠르니까 나라는 짐덩이가 먼저 탈출하면 좀 낫겠지! 하며 달려가려 할 때였다.
불이 이곳에 진입할 때처럼, 갑자기 덩굴들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욱 격렬했다. 그것이 징그러워서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분명 이 주변의 나무들처럼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이곳은 춥긴 해도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아니 다 죽은 덩굴이 어떻게 흔들려요?
먼지떨이 털 듯 세차게 흔들리던 것들 사이사이에서 팔랑팔랑 청보라색 꽃잎들이 떨어져 나왔다. 꽃잎들은 두 장씩 붙어서 행사장의 꽃비처럼 흩날렸는데… 자세히 보니 꽃잎이 아니었다.
저건… 나비? 아니… 날개가 아래로 향한 걸 보니 나방! 갑자기 웬 나방? 수십 마리의 나방들이 덩굴에서 뛰쳐나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닿으면 안 돼!”
“악! 여기에 나방이 왜 날아다니는데? 여긴 생긴 건 저주받은 죽음의 숲처럼 생겨서 왜 생명체가 돌아다녀?”
나비와 나방은 한 끗 차이라고 해도, 나비는 괜찮은데 나방은 싫어! 저렇게 한 뭉텅이로 날아오는 건 더 싫어! 나방은 어감부터가 틀려먹었다.
“드루이드님! 저건 나방이 아니에요!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데이지가 작은 몸으로 날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나는 열심히 그 작은 팔에 내 머리를 들이밀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엘더의 방어막에 부딪혀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져 내리는 것들은 자세히 보니 확실히 곤충 나방이라고 보기엔 묘했다. 그것들은 점점이 모여서 움직이는 청보라색의 빛 무리였다. 즉 시각화된 무언가의 힘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입구에 산발된 머리카락처럼 잔뜩 늘어져 있던 덩굴들이 떠올랐다. 입구 쪽으로 갈수록 그 기세가 심하여, 이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보라색 빛 무리들로 점거당한 상태였다.
도망갈 수도 없이 갇혀 버리고 말았다.
“여길 자기 영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추측은 틀렸어. 이미 그 녀석의 영역이야.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곳곳에 자신의 힘을 묻어 놓았어. 사방이 함정이야!”
덩굴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그곳에서 계속 나방처럼 보이는 빛 무리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엘더의 방어막에 몸을 부딪혔다.
하지만 불과 대적할 때 큰 힘을 받으면 엘더의 방어막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달리 끄덕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약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빛 무리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메스키트가 이를 아득 갈며 랜스를 휘둘렀다. 사방에 금빛 모래 벽이 튀어 올랐다.
빛 무리들은 엘더의 방어막에 닿기 전 메스키트의 모래 벽에 처박혔지만, 이전과의 전투와 달리 주변에 최루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금빛 모래와 청보라색 가루들이 함께 범벅이 되어 흩날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래는 검은 액체들로 인해 피어오르는 이상한 연기, 위에선 나방들이 부서져 뿜어내는 청보라색 가루들. 이 새끼 디버프를 동시에 두 개 깔았어!
“데이지 아이는 생명력이 강하고 저는 저항력이 높아서 괜찮지만, 엘더가 위험해요!”
메스키트의 외침에 엘더를 보니 어느새 눈 밑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붉은빛이 터져 나오는 손으로 제 가슴께를 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내게 방어막을 집중시키고 자신은 스스로를 힐링하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맹독 디버프에 결국 저항력이 가장 약한 엘더가 당하고 말았다. 힐러가 자힐까지 시전한다는 것은 파티 전멸의 첫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