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604)

“사실 시들링의 눈을 마주하며 오래 이야기하는 드루이드분은 오랜만이라 저희가 과하게 기대했던 것 같아요. 모처럼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 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시들링도 같은 마음이라 자꾸 나섰던 것도 있고요. 저 애는 따라붙는 위명 때문도 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꽤나 험악한 인상을 주는 외모인 것 같고…. 그래서 보자마자 겁을 먹고 피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겨우 피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그건 공적인 일이거나 아시다시피 말투 때문에….”

“험악이라…. 쟤는 그냥 덩치만 큰 놈인데여. 내가 옆에 엘더를 끼고 다녀서 그렇지, 아마 엘더를 안 봤으면 쟤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어… 그러니까 호감을 주는 외모?”

쟤는 주둥이가 문제인뎅. 얼굴에 전투로 인한 상처가 좀 있긴 해도 저 얼굴은 한국에선 보기 힘든 외모니까.

하지만 나는 엘더를 봐 버렸지. 이 세상에 엘더만큼 잘난 얼굴은 없을 거야. 엘더 때문에 내 미남 기준치가 천장을 뚫어 버렸어. 이젠 어떤 잘생긴 얼굴을 갖다 대도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거야. 큰일 났어.

“어쩌면 드루이드님의 기준이 다른 분들과 다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조언은 감사해요. 어쨌든 저흰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다시 돌아갈 거랍니다. 드루이드님이 10번대 테라리움으로 올라오지 않는 이상, 이젠 저희와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만나는 상황마다 불쾌함을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뭐….”

아놔… 10번대 테라리움 가야 하는데. 그래도 18번째는 16번째와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저흰 28번째 테라리움을 살피는 것 외에도 다른 임무가 있었습니다. 연금탑에서 여기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기로 했던 물건이 있었는데 연락이 끊어져서 그것의 행방을 찾아야 했죠. 너무 위험한 물건이라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전해지지 못했다면 다시 회수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수색 결과 불에 다 타 버린 것으로 결론이 났어요.”

잠깐. 듣고 보니 16번째는 어디서 한 번 나온 숫자 같은데. 어디였더라…. 16번, 연금탑,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기로 했던 물건….

헐! 스케어크로우의 일지에 나왔던 내용 아냐? 세계수의 가지에 병충해를 입힌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연금탑에서 맹독초를 보내 줬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약속된 날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고.

칼미아는 다시 한번 사과를 하며 무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시들링을 질질 끌며 사라질 때까지, 나는 산에서 봤던 불에 다 타 버린 마차와 해골 마크가 새겨진 상자, 스케어크로우의 일지에 나왔던 연금탑의 지원, 맹독초에 대한 상관관계를 모두 파악하는 것을 끝냈다.

어쨌든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28번째 테라리움에 확실히 지원을 보냈다. 하지만 오던 길에 전복당했다.

스케어크로우는 그것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며 절망해야만 했다. 참혹한 비극이네.

그나저나 그 맹독초는 대체 뭘까? 그냥 독초도 아니고 맹독이라니. 앞장서는 메스키트의 뒤를 졸졸 따르며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애초에 식물들에 대해 큰 지식이 있던 내가 아니라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

가는 길은 26번째 테라리움에서 출발할 때보다 훨씬 순탄했다. 마을 근처의 잡몹은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초보 사냥터에서 열심히 굴렀던 데이지였지만, 지금 나타나는 불들은 데이지가 후, 하고 불기만 해도 꺼질 것 같았다.

전투 보너스를 받는 반지도 생겼겠다, 이젠 크게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단도를 휙 던져서 불을 잡는 데이지를 보며 새삼 우리 애가 정말 많이 강해졌구나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그럼. 우리 애가 저런 허접한 작은 불들을 상대할 짬이 아니지! 거대한 불들을 때려잡은 아인데!

엘더도 전처럼 전투 모드에 돌입하자마자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저 정돈 데이지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게 벌써 추억이 되는 거야? 한 달만 지나도 흔들의자에 앉아서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런 일이 있었지, 껄껄,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내 경험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커 버려서… 내 레벨이 너무 높아져 버려서! 이젠 레벨 업을 못 한단 말이다! 며칠 전까지는 쪼렙이었는데 어느새 초보 탈출을 한 것이요.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가 힘을 되찾으며 깨졌던 균형이 되살아난 덕에, 만나는 불들은 축복에 짓눌려서 크기들이 매우 작았다. 다이아를 던져 줘도 내가 경험치를 얻을 만큼 커지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 저 정도는 무기를 쥐면 시들링처럼 내가 불을 때려잡을 수도 있겠는데? 근자감이 샘솟는다.

가는 길에 우리 파티의 긴장이라곤 메스키트가 불시에 데이지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것도 데이지의 긴장이지.

나는 뭐 볼만한 채널 없나 하며 리모컨 버튼만 부질없이 눌러 대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상태라면 이틀은커녕 하루면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얼마나 내가 불을 때려잡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걸었을까? 마침내 메스키트처럼 거대한 랜스를 들고 돌진하는 상상까지 도달했을 즈음 메스키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과 까맣게 탄 흔적들이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메스키트만큼의 눈썰미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장소였다.

지도를 모두 외운 엘더의 설명대로라면, 우린 곧 작은 늪이 곳곳에 자리한 지형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늪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지나갈 수 없으니 빙 돌아가야 하지만 작고 얕아서 적당히 온전한 땅을 밟고서 관통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했다. 문제가 되진 않지만 지형이 바뀌는 곳이라 주의를 주었지.

그런데 그런 곳에 막 돌입하기 직전에 저런 수상한 흔적들이라니!

“이건….”

메스키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음, 한눈에 봐도 전투가 있었던 흔적인데. 산에서처럼 불에 패배한 것 같고.

하지만 오는 길에 있던 불들은 다 약했는데? 설마 마차 불 같은 보스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또 거대한 불을 만나면 어떡하지….”

“내 주인, 제이. 이건 불과의 전투 흔적이 아니에요. 물론 이곳에 불이 왔다 갔을 수도 있겠죠. 불에 탄 흔적이 보이니까요. 하지만 자세히 봐 보세요.”

그녀의 반응은 전복당한 마차를 봤을 때와 조금 달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흩어진 물건들을 관찰했다. 데이지도 날 따라서 허리를 숙여 살폈다.

여기저기 그을린 건 저번과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물건들이 비교적 온전하다는 것? 형태를 확인하기도 쉽고. 자세히 보려고 해도… 뭘 봐야 하는 거지? 너덜너덜한 가방도 있고 내용물이 없는 빈 병도 있고, 검집도 있고….

“불에 그을린 것 때문에 바로 보이진 않겠지만, 잘 보면 날카로운 것에 베인 자국이 있죠?”

“응!”

“네!”

그러네. 그렇게 말해 주니 이제 보이네.

“어라? 불이 칼을 쓴다고?”

엘더가 날 보고 한심하단 얼굴을 했다. 님 좀 노골적이시네요. 아니, 내가 좀 한심한 소리를 하긴 했다. 생각해 보니 불은 그냥 태우지 칼을 쓸 리가….

엥? 그럼 이건 불이 아닌 사람이나 드라이어드들끼리 싸움이 났다는 건가?

“시체가 없는 걸 보니 치웠거나 도망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

엘더가 우리가 가려던 방향을 보며 말했다. 메마르고 죽은 나무들이 쓰러지다 말고 서로를 기대며 자리하고 있어서 얼핏 보면 속이 검은 동굴처럼 생긴 곳. 불그죽죽한 덩굴들이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져서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이 더욱 음산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저기에 늪도 있다 이거지? 시체가 있을 수도 있고? 중간까지 가려던 거 좀 다시 생각해 볼까…?

“내 주인, 제이. 제이가 걱정했던 장애물은 어쩌면 우리가 이전에 만나왔던 불들과 경우가 다를 수도 있어요. 불보다 끔찍한 것은 없겠지만, 더 지능적인 존재일 수도, 악랄한 존재일 수도 있죠. 뭐가 되었든 우린 주의를 해야 해요.”

“드루이드님! 이것 좀 보세요!”

메스키트가 이상한 점을 짚어 주는 동안, 작은 키를 한껏 이용하여 풀썩 수그린 데이지가 물건들을 단도로 들추다 말했다. 방치된 채로 시간이 많이 흘렀던 탓인지 땅에 푹 묻혀 있던 것을 꺼내자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데이지가 단도를 튕겨서 휙 물건을 뒤집자 비교적 탄 부분이 적은 뒷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 익숙한 마크가 짙은 녹색 빛의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와펜 패치처럼.

“와… 나 지금 좀 범죄 드라마 보는 거 같아. 아니면 추리 게임.”

세계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의 문양과 함께 28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나도 모르게 메스키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붙잡고 있기만 해도 안심이 되는 두터운 팔뚝을 꼭 껴안고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미친, 또 28번째.

이 28번째 마크를 단 사람인지 드라이어드인지 모를 자가 스케어크로우가 29번째로 보낸 전령일 수도 있겠네? 누가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자를 죽였을까? 왜?

“이거 죽인 사람이 아직도 돌아다닐까?”

“글쎄요. 시간이 오래된 걸로 보이니 그건 아닐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은 어쩌면… 저곳으로 가면 확인할 수 있겠죠?”

불도 커다란 건 무섭다. 어쨌든 위험한 존재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그냥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운다는, 어쩌면 원초적인 본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들이다. 결국엔 게임 속 몬스터일 뿐이라고, 싸워서 이기고 경험치를 얻으면 되는 것이라고 사고하게 된다.

마주치면 전투력을 가늠하고 이길 수 있을지 어떻게 싸울지 지극히 게임적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가리를 굴리며 뒷공작을 하는 놈들은 내가 사고를 여러 갈래로 하게 만들면서 다양한 두려움을 선사한다. 앞으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의심할 수도 있고.

아니 시발 저놈이 내게 무슨 생각으로 접근하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28번째 임시 행정관이란 사실을 숨겨야 할지도 고민하게 만든다.

“아오, 씨….”

“우리가 오면서 봤던 마차도 여기 이 물건들도. 전부 28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건… 그래요. 확실히 28번째 테라리움이 고립되게 만들었죠. 대체 28번째 테라리움에 왜 악재가 겹친 걸까요? 세계수의 가지가 힘을 잃게 만든 병과 관련된 것일까요?”

아직 스케어크로우의 일지에 적혀 있던 내용은 이 중에서 나만 알고 있지. 어쩐지 더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병충해를 입힌 벌레뿐만 아니라 뭔가 더 이상한 일들이 연루되어 있어서 메스키트에게 설명해 주기엔 스케일이 자꾸만 커지며 복잡해진다.

그땐 분명 일이 마무리되면 다 말할 것이라 다짐했었는데. 솔직히 방금 물건들을 확인해 보니… 세계수의 가지가 죽으라고 일부러 일을 벌이는 것 같잖아?

결국 저곳에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잘 것 같다. 혹시 몰라서 발견한 물건들을 좀 더 외진 곳으로 옮겨 숨기고 새로운 지형에 돌입하기 전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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