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끼면 안 그래도 강한 메스키트가 더욱 강해지나? 빠른 성장 중인 데이지에게도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건 데이지 아이에게 주세요.”
내 고민이 무색하게 곧바로 메스키트가 양보 선언을 했다. 어…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모처럼 전투 보너스에 맞는 장신구인데?
“내 주인, 제이. 전 그게 없어도 충분히 강하답니다.”
헐… 완전 멋있어! 이런 반지의 보너스를 빌릴 필요 따위 없을 만큼 강하다고. 전혀 아쉬움이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하니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완전 멋있어….
“그래도 더… 강해지면…. 거기서 더 강해지면….”
반면에 데이지는 다이아 반지가 욕심이 나는 것 같았다. 엘더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이아 반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우리 애는 강해지는 것에 한참 열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쉽사리 메스키트가 양보를 해 버리니 영 마음에 걸리나 보다.
혹시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고 생각해 부담스러운 걸까? 아무래도 데이지는 아직 팀에서 제일 약하니까.
메스키트는 단번에 아이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반지를 일단 데이지가 끼게 했다. 그리고 반지를 낀 상태에서… 메스키트에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낼 수 있으면, 자신이 정진해야 되는 상태가 맞으므로 나에게 선택을 맡기겠다고.
결과는 어떻게 보면 아주 뻔했다. 데이지는 반지를 끼고 전보다 더 펄쩍펄쩍 날아다녔지만… 한 번도 메스키트의 방패를 넘어서지 못했다.
***
좋아, 세금을 없애 버렸으니 금방 주민들이 이주할 거야. 하지만 그 금방이란 것이… 입소문도 타고 그러려면 오래 걸리잖아?
말이 금방이지. 난 테라리움이 모두 복구될 때까지 여기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2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 퀘스트도 완료해야 되고, 그걸 완료하면 이 임시 딱지를 떼기 위해 18번째 테라리움도 방문해야 됐다. 바쁘다, 바빠. 지금은 경영 게임보다 카드 뽑기 RPG로 모험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런데 한편으론 28번째 테라리움을 텅 비워 놓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세계수의 가지가 건재하여 테라리움을 불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 유령 마을은 좀 그런데.
이 고민은 의외로 바로 해결되었다. 내 원대한 여행 계획을 들은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자진해서 이곳에 남아 관리를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이 내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공익 근무 요원급 경력이 있었으니까 가장 제격이긴 하지.
또한 28번째 테라리움이 나의 아티팩트에 묶여서, 나와 멀리 떨어지더라도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영혼의 연결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과수원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던 입장이었던 전과 다르게 테라리움 안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데이지는 자유예요! 프리덤!
혹시나 지금 파티의 구성과 그의 실력 차이가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이라면 찝찝한 마음이 남았을 것이다.
꿈이 사무직이 아니라 현장직일 수도 있잖아? 그러나 벌써부터 테라리움 구석구석을 탐방할 생각에 신이 난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고마워. 내가 이 테라리움을 떠나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거든.”
“고맙긴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전 항상 과수원에 묶여 있던 몸이었으니까요. 이 기회에 궁금했던 멀리 변두리 지역도 가 보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레드 데이지 꽃을 심을 겁니다. 아티팩트에서 포레스트의 권한은 저의 왕에게 있으니, 이 테라리움 내부만큼은 제 마음대로 꾸며도 괜찮나요?”
“임시 딱지를 떼고 정식 행정 관리원이 되어 다시 방문했을 땐 너와 우리 데이지를 상징하는 붉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을 수도 있겠네. 상상만 해도 멋져! 여긴 이제 너의 구역인데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
내 말에 그는 벌써부터 구역 하나를 통째로 레드 데이지 꽃밭을 조성할 계획을 짜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 테라리움은 28번째 테라리움이 아니라 레드 데이지 테라리움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그거대로 괜찮을 것 같다.
그나저나 2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산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도를 펼치고 엘더가 놓친 샛길이 없나 열심히 살펴보았다. 물론 그런 길은 없었지만.
그런데… 찬찬히 지도를 들여다보니…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의 임시 행정관이 되기 전엔 미처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이 테라리움, 고립되었다고 했지? 28, 27, 26번 테라리움은 V자의 형태로 이어져 있다, 내가 출발한 26번째와 27번째는 중간의 낮은 산 전체에 마차 불 보스가 돌아다녀서 그렇다고 치자. 그건 무척이나 위험했던 보스 몬스터였으니까.
그렇다면 28번째 옆의 29번째는 왜 지원을 오지 않았지? 분명 여기 지도엔 28번 옆에 29번째 테라리움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26, 27번째에 비해 상대적으로 28번째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스케어크로우가 사전에 지원을 요청했을 법했다. 교류가 끊길 만큼 먼 거리가 아닌 걸로 보이는데….
어렸을 때 했던 카페를 경영하는 쿠키 가게 CD게임이 떠올랐다.
내 가게로 손님들이 찾아오려면, 그 손님들의 마을을 활개치고 다니던 몬스터들을 잡아서 수를 줄여 주어야 했지. 통행에 방해가 되니까.
분명 28번째와 29번째 테라리움의 길목에 무언가가 있다. 요컨대 마차 불 보스와 같은 지독한 장애물이 있어서 교류가 끊겼던 거야! 분명해!
이제 28번째 테라리움의 일은 해결되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 같아 보여도, 그렇게 되면 혹시나 29번째에서 이주해 올 주민들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29번째 테라리움에 가진 않더라도 중간까지만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떨까? 데이지 드라이어드도 이것에 대한 특별한 정보는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직접 가 봐야 한다는 거지.
내 제안에 드라이어드들은 그러자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 예측처럼 위험한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과 마주하는 것이 걱정되지만, 내 뜻이 곧 자기들의 뜻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바로 떠나시려구요? 하루 정도는 더 있다 가시지…. 비록 다 파괴됐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을 관광시켜 드릴 수 있어요. 전부 다… 파괴됐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어디 한 군데 덜 파괴된 곳이 있을 수도 있는데….”
“29번째로 가는 길목만 잠깐 확인하고 돌아올 거야. 26번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3일 정도 걸렸나? 그렇다면 길어야 이틀 뒤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걸? 아, 혹시 혼자라서 외로운 거면….”
“아뇨, 외롭지는 않아요. 전 포레스트 없이 홀로 개화한 야생의 드라이어드도 아니고 제이 님의 영혼에 담겨 있는 축복받은 드라이어드인걸요. 제이 님의 영혼은 무척이나 아늑하고 따뜻해서 외롭다는 추운 감정은 전혀 생겨날 수 없어요. 그런 감정은 드루이드에게 속한 드라이어드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감정이에요. 다만 그냥 아쉬울 뿐이에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아쉬움을 가득가득 담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내 드라이어드라고. 아티팩트로 인해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주인과 함께하고픈 마음은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아, 좀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네. 난 혹시 유독 데이지 종들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아직 날은 밝고 궁금증이 감성을 앞지를 정도로 폭발해서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가 한 것이라곤 다이아를 물 쓰듯 쓴 것 외엔 없었다. 전투를 오래 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거대한 벌레 불을 잡으며 레벨 업도 해서 피로도 모두 회복되었다.
즉 아주 쌩쌩한 나머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생각해 보니 제가 정식으로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라 바로 인지 못 했던 것이 있어요. 제이 님의 아티팩트 말이에요. 걱정이 되신다면 종종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들여다보세요. 보고자 한다면 28번째 테라리움도 한눈에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또한 저는 아티팩트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언제든지 전할 말이 있으시면 아티팩트를 보며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이 님의 생각은 아티팩트 안의 드라이어드에게 전부 전해지니까요. 제이 님이 아티팩트를 볼 때, 저 역시도 제이 님을 만날 수 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네요.”
그 말에 곧바로 내 왼팔로 눈을 옮겼다. 반구형 유리를 들여다보며 28번째 테라리움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항공 숏으로 내려다보는 것과 같았다. 확대해서 자세히 볼 순 없고, 꼭 전시된 미니어처 마을을 보는 것과 같은 시점에서 멈췄다.
이렇게 보니 파괴된 내부가 적나라하게 보이네. 마음이 아파. 누가 잘 만들어졌던 미니어처 마을을 짓밟고 불태운 것 같잖아.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아쉬운 얼굴을 할 땐 언제고 이젠 어서 다녀오라며 등을 떠민다. 마음을 바꿔서 내가 잠깐 떠났다 돌아온 사이에 달라진 테라리움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도 드라이어드라고 우리 데이지처럼 가느다란 팔로 잔해들을 번쩍번쩍 들어다 옮기며, 적어도 사람이 정상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길목을 치워 둘 것이라고 했다. “제가 얼마나 뛰어난 드라이어드인지 전투로는 보여 드릴 순 없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하며 열심이었다.
이거 꼭 ‘엄마 나갔다 올 테니까 방 깨끗하게 치우고 있어, 이따가 검사할 거야.’ 하는 것 같잖아.
데이지들끼리 따로 인사를 나누고 우린 28번째 테라리움을 나왔다. 그리고 금방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들링을 만나게 되었다.
뭐야? 쫓겨났는데 아직 안 갔어? 자신의 드라이어드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는지, 시들링은 멀리서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까이 올 수 없는 벨라돈나를 대신하여 칼미아가 나섰다.
“아, 벌써 나오셨네요. 하루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테라리움에서 추방되는 경험은 언제 겪어도 끔찍하네요. 그게 또 시들링 때문일 줄이야. 이젠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 시들링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꼭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본인이 직접 말하면 좋겠지만 또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아서요.”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무 시들링을 싸고 도니까 쟤가 더 그런 거 아닐까요? 쟨 그러기엔 너무 큼직한 놈인데.”
“역시 그렇죠. 저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칼미아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저흰 저 아이를 아기 때부터 길렀던 어떤 드라이어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우리 부케의 초대 메인이었기에 그의 사고방식이 굳어져 버렸거든요. 그땐 시들링이 정말 어리기는 했지만, 그가 다 자랐어도 저희의 사고방식은 자라지 못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저희의 이런 행동이 더 독이 되고 있겠죠. 시들링이 드루이드들의 사회에 정상적으로 합류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우리 부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긴 하네요.”
드라이어드가 또 있어? 지금 메인인 벨라돈나 말고 초대 메인이면 누구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저기 있는 드라이어드들 중 하나는 아니란 건데. 저쪽 파티는 메인을 하나로 고정하고 안 바꾸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