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604)

세계수의 가지가 실시간으로 내 다이아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평화가 내려앉은 오후. 상황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테라리움 아티팩트에서 뿅 튀어나왔다.

어쩐지 들어가기 전과 후의 장비 상태가 달랐다. 간소한 천 옷차림이었는데 지금은 처음 데이지를 개화시켰을 때와 비슷한 외형의 장비를 입고 있었다.

설마 아티팩트 안에서 그새 레벨 업이라도 한 거야?

드라이어드는 본래 드루이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메스키트가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자신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민폐 끼치지 말고 잽싸게 피해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나섰다가 불에 잡히면 그건 아주 큰일이지. 나도 매번 엘더를 방벽 삼아 잘 피해 있으니까. 그렇기에 뒤늦게 나타나 테라리움을 둘러보며 호들갑을 떠는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무어라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상황 판단 하는 눈치 하나만큼은 아주 뛰어나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아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티팩트로 뛰어들더라고.

머리색과 눈 색도 같고 종도 같은 데이지 드라이어드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각자 자신만의 개성이 존재했다. 성격은 물론 생김새에서도.

우리 데이지가 시종일관 밤색 눈이 곱게 감춰 들어가는 예쁘게 웃는 눈이라면, 저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놀란 얼굴을 해도 살짝 졸린 것처럼 눈꺼풀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긴장감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눈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눈은 기운이 없는 탓이 아니었구나.

“아티팩트 안에서 모두 보았지만… 불이 모두 처리될 줄이야. 거기다 가망도 없어 보였던 세계수의 28번째 가지까지 회생시키시고. 제이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이제 건물들을 복구하고 내부를 정리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러려면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야겠죠?”

듣고 보니 이거 꽤 막막한 상황이었잖아? 마냥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관이 된 것을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다 파괴된 황무지의 마을을 떠안게 된 것이니까. 꼭 망해가는 난쟁이들의 광산 마을 주인이 되는, <무한 다이아>의 시작 배경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지금처럼 난쟁이들의 다이아 제국을 일구기 위해 반년이나 걸렸는데. 26번째 테라리움과 같은 모습을 갖추려면 얼마나 해야 되는 걸까?

“막막하네….”

아이고, 절로 곡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뭐 초반 유저들을 위한 가이드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환영합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관이 되셨네요! 이제부터 저를 따라 터치해 보세요! 먼저 조작법부터 알아볼까요? 이런 거 말이야.

<무한 다이아>에서는 난쟁이들이 그 역할이었는데. 주인님! 먼저 수레를 비워 보세요! 수레가 작아서 금방 가득 차니 자주 비워 주셔야 해요! 그 지시에 따라 5분마다 터치했었는데. 이건 뭐 어디부터 손을 대야…. 누가 알려 줘….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며 거대한 벌레 불이 지져 놓았던 땅을 발끝으로 툭툭 차고 있는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쟤 과수원 잡일 담당이라고 안 했나? 과수원에서 오래 일해서 마을 내부는 다 꿰고 있다고 했고. 말은 잡일 담당이라고는 하나, 여태 느껴 온 바로는 과수원은 테라리움의 중심부, 공공 기관 같은 느낌이잖아?

어찌 보면 공공 기관에 배정된 공익 근무 요원… 같은?

비록 전투력은 내 드라이어드들 중 가장 달릴지는 몰라도, 이런 일에 저 드라이어드만큼 제격인 자는 또 없을 것이다.

그래, 우리 데이지처럼 저 데이지 드라이어드도 내게 온 것은 운명이었던 거야!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슬쩍 가까이 가서 운을 떼 보았다.

“음, 세금부터 조정하셔야겠죠? 당장 마을을 고치려고 해도 인력이 없으니까요.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오는 사람들이라면 십의 자리 수가 바뀌는 테라리움으로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지만 길이 아주 험난하지요. 제일 좋은 건 근처 테라리움이나 앞 번대에서 내려오는 건데, 지금은 테라리움이 엉망인 상태니까 내세울 건 낮은 세금일 것 같아요.”

세금이라…. 나랑 친하지 않은 단어인 건 확실해. 솔직히 감도 안 잡힌다. 우리 사이에 이미 만리장성급의 거리감이 느껴져. 모르면 기존 방식을 따라가자. 족보 보면 된다.

“그럼 이전 행정 관리원이 있을 때는 어땠는데?”

“흐음, 중앙 지역은 완납금이 1000다이아고 분할은 달마다 15다이아였어요. 가장 변두리 지역은 완납금이 300다이아고 분할은 달마다 5다이아예요. 그래도 다른 테라리움들보단 세금이 낮았던 걸로 기억해요. 여행을 하는 드루이드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들 그랬어요.”

“완납금은 뭐고 분할은 또 뭔데?”

뭔데 둘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건데? 세금이라면서. 왜 퍼센트가 안 나오는데? 내 질문에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 저 표정은 본 적 있다. 우리 데이지와 처음에 만났을 때, 내가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저런 표정을 했지. 내가 묻기도 전에 이것저것 다 설명해 주는 메스키트에게 너무 길들여졌어. 감이 떨어졌네.

“외부인이 테라리움에 입주하기 위해선 두 가지 세금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요. 완납을 해 버리든가 테라리움에 지내는 내내 달마다 다이아를 내든가. 분할의 경우 완납금의 금액을 넘어도 한 번 선택한 이상 계속 다이아를 내야 해요. 변두리 쪽은 불이 습격하면 가장 먼저 타격 받는 곳이고 과수원과도 멀어서 완납금이 낮긴 해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다이아를 한 번에 지급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죠. 더군다나 다이아를 유통시킬 수 있는 드루이드들이 자주 방문하지 않는 이상 유예 기간 동안 완납금을 모으기도 어려울 거예요.”

유예 기간? 내 멍청한 눈빛을 재빠르게 알아챈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유예 기간은 입주 유예 기간이에요. 한 달을 주는데 그동안 무료로 테라리움에서 지내면서 상업 활동을 해도 괜찮아요. 그래서 다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기간에 입주를 신청해요. 그땐 드루이드님들이 많이 방문하니까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드루이드님들에게 다이아를 털어 내서 완납금을 모을 수 있다고 확신하죠. 하지만 포션이나 장비 제작처럼 전문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해요. 그래서 다들 분할을 결정하게 되는 거죠.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라도.”

“…그런 제도였구나….”

“뭐, 28번째 테라리움 주민들이 다 떠나간 것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세계수의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않으니 다이아를 공급해 줄 드루이드님들이 발길을 뚝 끊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세계수의 가지가 기운을 찾았으니 내년엔 열매를 맺을 수 있겠죠?”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벌써부터 북적거리는 테라리움의 모습이라도 상상하는지 싱글벙글 웃음 지었다. 지금만큼은 그 환한 웃음이 우리 데이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세금이라…. 확실히 세계수의 가지를 관리하는데 다이아가 필요하니까 주민도 많이 유치해야 하고… 뭐 그런 사이클이겠지? 그런데 근본적으로… 내가 세금이 필요한가? 지금도 세계수의 가지는 내 월렛에 빨대 꽂고 있잖아?

그런데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이런 내 고민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세금을 낮춰야 되는 것 때문에 걱정하시는 건가요? 물론 지금처럼 주민도 없는 암울한 상태에서 세계수의 가지에 지속적으로 다이아를 공급하는 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합니다. 솔직히 세계수의 가지를 되살리기 위해 아주 많은 손해를 보셨겠죠. 그 다이아 수는 감도 잡히지 않지만… 혹시 대출이라도 끌어다 쓰신 건가요? 그래도 세금을 낮추지 않으면…. 안 올 건데… 아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내 다이아 사정을 걱정해 주는 모습은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아직 날 모르네. 자기 주인 되는 드루이드가 결코 그런 걸로 고민할 리 없단 걸 언제가 되어야 깨달을까?

생각난 김에 핸드폰 화면을 켜서 두드렸다. 아무리 빠져나가도 내가 맥스로 찍어 둔 난쟁이들의 다이아 생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심지어 수레가 쌓여 있었다.

“세금은 안 받을 거야.”

“…네?”

“특히 기술자들의 경우. 뭐 집 짓고 수리하고 이런 분들 있잖아? 아, 아니다.”

“그렇죠? 역시 세금은 받아야….”

“생각해 보면 여긴 모든 직업이 필요하고 난 한 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그래. 입주 목적이 그럴싸하다 싶으면 그냥 세금 없이 다 입주시켜야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막 받으면 분란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우린 좀 더 다른 유예 기간을 두는 거야. 테라리움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세금을 받을 거야.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는 사람에게만 세금을 받아 내야지.”

놀고먹는 건 아직 나도 못 해 봤는데. 그렇게는 안 되지. 난 방학 때도 계절 학기 나가던 인간이었으니까.

하물며 우리 난쟁이들은 다 망해 가는 광산 마을에서 제국이 될 때까지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던 애들인데, 여기 올 사람들이 난쟁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뭘 해야 하지 않겠어?

다이아를 내 월렛으로 대신 지불하는 만큼의 보람은 느껴야지, 내가.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내려앉았던 눈을 활짝 뜨고 내게 재차 되물었다.

“세금 안 받는다니까? 나 이런 여자야.”

“그걸 왜 안 받아요?”

“그걸 왜 받아?”

“세계수의 가지를 관리해야죠!”

“걔는 알아서 내 월렛에 빨대 꽂고 쪽쪽 빨아먹고 있다니까?”

“어마어마한 다이아 양이 필요해요! 개인이 그걸 어떻게 지불해요?”

“아, 글쎄 내 월렛은 마르지 않는 다이아 샘이라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 못 하는 끊임없는 굴레를, 예쁜 얼굴을 뾰로통하게 구긴 엘더가 다가와 끊었다.

얜 또 표정이 왜 이래? 설마 다이아 이야기를 들었나? 아니, 그럼 기절했을 텐데? 산더미만큼 쌓여 있던 다이아를 죄다 챙겨 놓고, 후광이 비칠 정도로 밝은 웃음을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표정이 그래? 누가 괴롭혔어?”

아니, 널 괴롭힐 누군가가 여기 있기는 해? 아니면 그렇게 다이아를 챙기고도 부족했니? 내 질문에 엘더는 완전 죽을상을 하고는 손을 쓰윽 내밀었다. 뭐? 다이아 더 달라고?

엘더의 손바닥 위에는 눈부신 빛을 발하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놓여 있었다. 잎사귀처럼 세공된 금이 다이아몬드 보석을 열매처럼 감싸고 있는 반지였다. 빛이 닿을 때마다 촘촘한 면에서 별처럼 반짝반짝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분위기 다이아몬드 반지?

“어? 이거….”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반지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과거 28번째 테라리움 특산품이에요! 이게 어떻게 여기 있지? 전 행정 관리원님도 전설만 들었지 테라리움을 전부 뒤져도 못 찾았거든요!”

“…다이아를 줍는데… 같이 있었어.”

엘더의 손이 이젠 살짝 떨렸다.

아… 너 이거 줍긴 주웠는데 갖고는 싶지만 가질 순 없으니까 그렇게 죽을상이었구나. 그래, 이렇게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보석 반진데 오죽 갖고 싶겠어.

내가 반지를 받아 살필 동안 엘더의 눈은 반지를 진득하게 따라 달라붙으며 아쉬움을 뚝뚝 흘렸다. 거대한 벌레 불이 죽으면서 다이아는 물론 이런 장신구까지 남겼구나. 그래야 보스 몬스터지.

“제이, 불멸의 다이아몬드로군요. 엘더 꼬맹이의 손가락에 있는 루비 반지와 같은 효능을 내는 탄생석이에요. 4월의 태양을 담고 있답니다.”

메스키트가 말했다. 그녀는 나와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대화를 할 동안 마치 재잘거리는 참새들을 보는 것 같은 흐뭇한 눈을 하고 있었다.

종종 그녀가 대신 설명해 줄 수 있는 타이밍에도 지켜보는 것에 그쳤다. 그리고 지금은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우와, 우와.” 하며 말을 잃어버린 바람에 그녀가 대신 나서게 되었다.

“4월이라면…. 전투 보너스가 4월이면?”

내겐 4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 드라이어드가 둘이었다. 데이지와 메스키트. 세상에. 보스를 잡았는데 드롭된 아이템이 마침 내 드라이어드들의 전용템일 확률은? 이것도 설마 엘더의 행운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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