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604)

정신을 차린 것은 와르르 돌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 때문이다.

거대한 벌레 불이 있던 자리에 마차 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이아 더미가 쌓여 있었다. 저것들이 전부 이 테라리움에서 희생되었던 자들의 수라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그랬지, 벌레 불은 이 테라리움을 통째로 삼켰던 불이었지.

착잡한 나와 달리 엘더는 역시나 저 다이아 더미들에 정신을 뺏겨 버렸다.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되살리기 위해 쓴 다이아 수를 엘더가 알면 기절하지 않을까? 내 드라이어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비밀로 하자.

그리고 저 더미들. 내가 가진 다이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만, 이미 엘더가 정신을 놓은 만큼 죄다 시들링에게 양보해 버리면 반발이 클 것 같아서 모처럼 소유권을 주장해야겠어.

힘들어 보였던 전투가 세계수의 축복으로 인해 허무하게 끝나며, 드디어 내가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받아 온 퀘스트의 여정이 끝났다.

이제 가서 보고만 하면 퀘스트 완료겠지. 첫 퀘스트치고 너무 지독했어. 그래도… 음, 재미는 있었다. 돌이켜 보면 배운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고.

“또 만났네요. 드루이드님의 엘더 플라워 덕분에 살았어요. 방금 전까지 세계수의 건너편에서 제 동족이 손을 흔드는 환각을 봤었거든요. 정말 죽는 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어떻게 죽은 줄 알았던 세계수의 가지가 다시 회복한 거죠? 당신은 아시나요?”

벨라돈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수북이 쌓인 다이아 더미에 엘더처럼은 아니더라도 눈길을 줄 법도 한데 다이렉트로 내게 왔다.

비록 일이 잘 끝났더라도 내 드라이어드들과 생이별을 하게 만든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라 조금 찜찜했다.

그래, 일이 잘 끝났기에 망정이지! 지금은 처음과 같은 분노는 많이 희석되어 그를 보고 쌍욕이라도 퍼부어 주려고 했던 마음이 많이 잠잠해졌던 참이었다.

“뭐… 그렇죠.”

그래도 말투까지 곱게 나가진 않는다. 눈을 마주치기도 싫어서 애꿎은 핸드폰 화면만 툭툭 두드렸다. 스톤헨지 모드를 옆으로 밀어서 치우고 <무한 다이아> 화면을 띄웠다.

얘들아, 정산 좀 해 보자. 얼마나 뽑아다 썼니? 아직도 다이아 수가 줄어들고 있네? 이거 완전 돈 먹는 하마 아냐?

난쟁이들의 무리는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분수대에 다이아를 퍼 나르고 있었고, 한쪽은 광산에서 캐온 다이아를 수레에 채우고 있었다. 툭툭 수레를 터치하자 금방 다이아 수치가 회복되면서도 다시 쭉쭉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난쟁이들이 다이아를 갖다 쓰라며 날 채근하지 않겠네.

“무사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우리 부케도 이렇게 무리로 보이는 전투에 무턱대고 뛰어들진 않는답니다. 시들링이 당신의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당신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했어요. 보통은 드라이어드가 드루이드의 곁을 멀리 떠나지 않으니까요.”

그쪽 주인은 참으로 오지랖이 넓네요. 좋은 의도로 했다고 하지만 만약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되살리지 못하면 어쩔 뻔했어? 주인도 없이 보스전에 뛰어들게 된 내 드라이어드들이 큰일이라도 났으면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을 거다.

“세계수의 가지가 힘을 회복한 것 외에도 이질적인 힘이 느껴지는군요. 이건… 그래요! 다른 드루이드의 영역 선포와 같은 느낌이에요! 비록 어느 필드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분명 그 주인은 당신이겠죠? 정말 알수록 대단한 드루이드군요! 다이아로 비를 내릴 때도 그렇고. 대체 이건 어떤 힘이죠? 우린 수없이 많은 드루이드를 봐 왔지만 당신과 같은 존재는 처음이에요!”

로즈우드가 어느새 슬쩍 다가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무척이나 흥분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애써 점잖은 척 말해도 목소리가 떨렸다. 높낮이도 제멋대로였다.

칭찬은 고맙지만 아직 꿍했다. 그나저나 메스키트도 그랬고 저 로즈우드도 그렇게 말하고. 나도 모르게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의 힘을 끌어내기라도 한 건가? 난 전혀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이건 우리가 성급하게 행동해서… 저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들을… 그녀와 헤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멀리서 멜로우가 한 수 거들었다. 그의 말에 벨라돈나가 “역시나….” 하며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이쪽을 활활 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시들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래, 드라이어드 셋이 말했다, 이거지?

하지만 올 때의 기세와 다르게 시들링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할 말이 참 많아 보이는 눈빛인데. 평소답지 않네.

물론 그쪽이야 내 상황을 몰랐기에 나온 행동이란 것을 알았으니, 내가 사과를 받을 상황은 아니고 딱히 사과를 받아 내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보자마자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예를 들면 또 겁대가리 없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왔다거나?

“뭘 봐?”

할 말 없으면 꺼져. 의미를 축약해서 쏘아 주었다. 어쩐지 시들링의 눈빛이 더 진해졌다. 로즈우드가 안절부절못하며 시들링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이 자꾸 달싹이는 것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긴 한데.

띠링.

난데없이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아니 갑자기 왜?

핸드폰 화면에는 어디서 많이 본 편지 봉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퀘스트 완료인가? 하며 전과 다르게 실링 왁스도 박히지 않은 그것을 터치했다.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권 양도 안내

드루이드 네임: 제이

행정 관리원 직책의 부재 및 테라리움의 높은 지분으로 인해 드루이드님께서 28번째 테라리움의 임시 행정 관리원으로 책정되었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이 임시로 드루이드님의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귀속됩니다.

새로운 과수원 관리자 및 보급을 담당할 상권이 회복되기 전까지 드루이드님의 월렛으로 테라리움의 모든 행정이 관리됩니다. 행정권 양도를 포기할 시 28번째 테라리움은 무관리 상태로 변경됩니다.

무관리 상태에서 테라리움은 불의 위협을 받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달성 조건: 테라리움의 지분율이 80% 이상을 달성. 현재 달성도: 100%

★당신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경이로운 존재로 추앙 받게 됩니다.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내 당신의 지위: 1급 가드너 (행정 관리원)

(4급 이상부터 해당 테라리움의 일정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9급 미만부터 해당 테라리움과 적대 관계가 되어 입장이 불가해집니다.)

당신의 테라리움 내 권한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내 세금 조정권

-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내 과수원 인사 관리권

- 세계수의 28번째 주민 및 방문객에 대한 접근 관리권

임시 권한을 정식으로 확정받기 위해선 1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해 주세요.

세계수의 1번째 중앙 행정 관리부 및 과수원이 본 증명서를 인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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