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04)

내가 할 일은 이제 꼭 링겔처럼 줄기와 연결된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전부라, 모든 것은 가지에 쉴 새 없이 다이아를 공급하는 난쟁이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몸에 좋은 약을 링겔로 맞는다 해도 약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독이라 들었다.

지금 그런 상황 아냐? 내 다이아 소지 수도… 감소하던 것이 어느새 십만 자리 수를 뚫었다….

“야야! 적당히 해!”

하지만 난쟁이들에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이아를 퍼 넣는 얼굴들이…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들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깔때기는 이전에 내가 다이아를 소비했던 패턴과 달리 한계가 없었다. 다이아를 주는 족족 막힘없이 빨아들이니 난쟁이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오랜 한을 푸는 것처럼 모든 인력을 동원해 다이아를 주입하고 있었다.

USB를 뽑아 버릴까? 하지만 그냥 뽑았다가 큰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줄기를 쥐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짓물러 곪아 가던 가지가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곪았던 곳에서 새로운 금빛 잔가지가 튀어 나왔다. 여린 속살에도 조금씩 금빛 겉껍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날 힘들게 만들었던 빈혈과 같은 증상도 그즈음 나아졌다.

떨어졌던 물방울들은 바닥의 홈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2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의 온실에서 본 적 있었던 광경이었다. 마법진의 문양처럼 둥글게 파인 곳으로 물방울들이 모여 졸졸 흐르며 바닥의 재를 씻어 냈다.

방 안을 굽이치던 푸른 물은 가지가 있던 방에서 뻗어 나가 연결된 다른 방들로도 흘러갔다.

빈혈이 낫자 갑자기 점점 몸에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가슴속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활기가 솟아오르며 날 잠식해 오던 열기가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방 안에 놀랄 정도로 상쾌한 기운이 가득 차며 손목에 찬 아티팩트도 그에 발맞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세계수의 가지는 어느새 내가 2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본 것처럼, 내 꿈에서 본 것처럼 성스러운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고마워요.”

드디어 세계수의 가지가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무언가 쿵, 하고 내 안에 내려앉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티팩트가 팔이 저릴 정도로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앞서 시들링과의 마차 보스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온 반구의 빛이 크기를 키워 가며 빠르게 방을 채우고 과수원 전부를 뒤덮었다.

내가 손대지 않았는데 핸드폰에 꽂혀 있던 줄기가 알아서 뽑혀 나갔다. 화면 속 깔대기가 있던 자리에는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나무 분재가 놓여 있었다.

화분에 새겨진 숫자는 28. 난쟁이들이 다급하게 수도꼭지를 잠글 때, 내 다이아 소지 수는 백만 자리의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이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계수의 가지가 내 다이아를 쪽쪽 빨아먹고… 드디어 완전히 회복했다.

***

세계수의 가지가 회복된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내겐 더 급한 것이 있었다. 과수원 밖으로 뛰어나가 내 드라이어드들을 찾았다.

세계수의 일도 그렇고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위협적이던 불의 차폐막이 사라져 있었다. 또한 테라리움 내의 하늘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옅게 둥근 막이 둘러져 있었다. 꼭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을 보는 것처럼.

큰 전투가 있었던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이 초토화되어 건물들이 죄다 무너지고 땅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금빛 창이 벌레 형상을 한 불의 마디마디를 꿰뚫고 있었다.

불은 제대로 붙잡혀 옴짝달싹도 못 한 채 안간힘을 쓰며 겨우 꿈틀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땅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달리는 내가 휘청거릴 뻔한 것을 아예 메스키트가 붙들고 뛰었다.

불은 창이 꽂힌 부위에서 엄청난 수증기를 뿜어내며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창은 내가 그곳으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바닥에서 쑥쑥 솟아올랐다. 창이 아니라…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 같았다.

저와 같은 방식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엘더가 모체의 꽃가지를 소환하여 사용한 기술과 동일해 보였다. 그렇다면 저건 세계수의 가지인가?

제 할 일을 끝낸 난쟁이들이 이제 핸드폰을 깨우기 전까진 조용할 법도 싶은데, 어쩐지 소란이 가라앉질 않았다. 꺄르르 웃는 소리도, 다이아가 촤르르 흐르는 소리도. 본래대로라면 가져간 다이아가 부족하더라도 조금 쫑알대고 말았을 텐데.

이상한 느낌에 핸드폰을 보니 놀랍게도 화면의 한편이 어디선가 뻗어 나온 가지들로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알던 <무한 다이아> 화면이 아닌데? 슬라이드하여 화면을 이동하니 그곳에 28이라는 숫자가 적힌 분재가 존재했다.

분재의 화분 크기는 26이라 적혀 있던 분재와 다르게 아주 넓적해졌고 스프링클러 같은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난쟁이들은 놀이라도 하듯 다이아를 집어 던져 넣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분수대에 다이아가 던져지면 그 끝에서 푸른빛을 띠는 물이 뿜어져 나와 나무를 적셨다. 다이아 소지 수도 변동이 없었다가 이제 보니 다시 감소하고 있었다. 쭉쭉.

다이아가 몇 개는 분수대에서 튕겨 나왔다가… 벌레 불을 꿰뚫기 위해 새로운 금빛 창이 솟아오르면, 블랙홀처럼 난쟁이들의 다이아들을 빨아들였다.

그랬군…. 그러니까 저 무지막지한 세계수의 공격력의 근원이… 여기였군. 내가 인지도 못 한 사이에 다이아를 막 갖다 쓰고 있었네.

물론 저 창에 의해 불만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창도 함께 불에 타들어 갔다. 하지만 회복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난쟁이들이 저들끼리 쑥덕쑥덕 토론을 끝내더니 본격적으로 다이아를 분수대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내겐 밑 빠진 독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실시간으로 천 단위의 다이아가 사라지고 있어도 별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많은 다이아, 세계수의 가지가 막 가져다 써서 불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이쪽이야 환영이지.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메스키트에게 매달려 겨우 차폐막이 사라진 전장 안으로 들어왔다. 시들링과 내가 파티 상태가 아니었기에 벨라돈나의 위험 때문인지 내 드라이어드들은 그들과 정반대 편에 서 있었다.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되살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다들 처참하게 당해 있었다. 무엇보다 언제나 올곧게, 지칠 줄 모르는 것처럼 서 있던 엘더의 무릎이 꺾여 있었다. 덩달아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데이지는 많이 힘들어 보였지만 다행히 무사해 보였다. 그만큼 엘더가 힘을 내 줬던 거겠지. 파티 상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힐을 못 받은 저쪽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즐거워하는 난쟁이들의 <무한 다이아> 화면을 넘기고, 시들링의 아티팩트 네트워크와 연결을 시도했다. 그리고 곧장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달려갔다.

데이지와 엘더에게 포션부터 마구 안겨 주며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여기저기 많이도 다쳤네. 주인 없이 고생했을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데이지와 엘더에게 모래 방패의 이펙트가 떠올라 감겼다가 사라졌다. 드디어 단절됐던 우리의 사이가 다시 이어졌단 뜻이었다.

둘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엘더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엘더가 포션 뚜껑을 따며 말했다. 데이지도 재가 잔뜩 묻은 이마를 닦아 내며 겨우 미소를 찾았다. 내 울 것 같은 표정에 “저 멀쩡해요. 단지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하면서 도리어 위로를 해 왔다.

메스키트가 몸부림치는 벌레 불에서 떨어져 나오는 불똥들을 방패로 막아 냈다. 그사이 내 드라이어드들은 전투의 피로를 모두 회복했다. 어쩐지 더욱 생생해진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상하지. 그래도 내 드라이어드들은 내가 없는 사이 힘든 전투를 견뎌 냈어야 했을 텐데.

심호흡을 한 엘더가 스태프를 땅에 꽂았다. 건너편의 시들링 파티까지 챙겨 줄 생각이었나 보다. 광역 힐이 시전되고…. 전과는 다른 이펙트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엘더가 힘을 쓸 땐 항상 엘더의 모체 꽃잎 색을 닮은 눈부신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놀랍도록 맑은 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꼭 벌레 불을 꿰뚫고 있던 창에서 새어 나온 금빛이 녹아든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금빛 창의 형태를 한 나뭇가지와 엘더의 힘이 공명하고 있는 듯했다.

엘더가 내는 힘은 가히 폭발적이라, 엘더를 중심으로 거대한 파도가 치는 느낌이었다.

“오…. 엘더, 엄청난데?”

“가서 뭘 하고 온 거야? 이건 내가 세계수에서 썼던 힘과 똑같은 느낌인데.”

“지금은 세계수의 안과 같은 환경이니까. 이곳 전체가… 그래요. 마치 제이의 영혼 속에 있는 느낌이네요. 정확히는 제이의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에 있을 때처럼 아늑함이 느껴져요.”

메스키트가 그렇게 말하며 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어쩐지 조금 경외가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빛은 너무나 생소해서 부끄러워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주인, 제이. 지금은 팀의 메인을 데이지 아이에게 넘겨주어도 될 것 같아요. 더 이상 저 불은 우리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랍니다. 힘을 집중해서 전투의 승기를 가져오도록 해요.”

메스키트의 평가가 드디어 긍정적으로 변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영혼의 연결을 데이지로 옮겼다.

온 힘을 다해 날뛰어 보라는 내 마음을 받은 데이지가 두 개의 단도를 연결했다. 그러곤 앞으로 뛰어나가 크게 몸을 돌려 부메랑을 날려 보냈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부메랑이 날아갔다.

데이지의 공격도 평소와 달랐다. 데이지를 나타내는 붉은 꽃잎들이 아닌, 금빛 꽃잎들이 부메랑의 궤적을 따라 밤하늘의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데이지가 던진 부메랑은 벌레 불의 두 마디를 완전히 본체에서 끊어 내곤 돌아왔다.

쿵!

큰 소리가 나며 떨어진 불은 또 하나의 개체가 되어 꿈틀거렸다. 내게 엘더의 금빛 방어막이 둘러지자 메스키트는 방어를 버리고 데이지와 함께 그 불을 향해 튀어 나갔다.

본체의 크기가 작아지니 몸부림은 이전과 다르게 더욱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들링 쪽도 드디어 기운을 차렸는지 선방하기 시작했다.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잘라 처리하자 남은 마디가 새로운 머리가 되었다. 저쪽에선 앞부분을, 우리는 뒷부분을 맡아 착실히 불의 크기를 줄여 나갔다.

때마침 저쪽에서 그래프트를 사용했는지 시들링이 거대한 장총으로 연발탄을 쏘아 가며 피니시를 찍었다. 막타를 뺏긴 것은 조금 억울하지만.

암울할 정도로 위압감을 자랑하던 거대한 불이 세계수의 축복으로 인해 힘을 잃은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세계수의 위엄을 깨닫게 되었다. 마을이 괜히 세이프 존이 아니었어.

금빛 창은 불이 사라지자 산산조각이 나서 고운 입자의 가루가 되었다. 가루는 둥근 구를 이루어 내부의 기류를 타고 회오리치며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그 바람에 내 몸도 밀려 나갈 것 같아 열심히 엘더를 붙잡았다.

별 가루같이 반짝이는 힘은 테라리움 곳곳에 퍼져 나갔다. 부서진 건물 사이를 구석구석 흘러가며 재들을 씻겨 내고 남은 불들을 꺼트리거나 테라리움 밖으로 밀어냈다.

테라리움 밖으로 밀려나던 와중에 불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서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 광경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눈을 현란하게 현혹시키는 금빛의 향연. 검게 물들었던 테라리움이 지독한 병에 걸렸다가 낫는 것처럼 빠르게 금빛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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