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604)

“제이, 세계수가 불에 당했죠? 저건 드라이어드는 물론… 세계수의 힘을 일부 흡수했을 거예요. 우리론 막을 수 없어요. 피해야 해요.”

“안 돼! 물론 절망적인 상황은 알지만 아직 세계수의 가지가 살아 있어. 이번에 마저 당해 버리면 정말 끝일 거야. 내가 세계수 가지의 힘을 회복할 방법을 찾을 때까진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그때 데이지가 폴짝 뛰어나갔다.

“제가 발이 빠르니까 주의를 돌려 볼게요!”

“데이지! 위험해!”

“전 포레스트의 왕이 되는 한 걸음을 이제 막 내디뎠어요. 전 두렵지 않아요! 이 중에서 제가 제일 발이 빠르니까 드루이드님의 바람처럼 시간을 벌기에는 제가 제일이에요.”

메스키트가 모처럼 이 전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 내렸다. 그만큼 위험한 불이었다. 저 작은 아이가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믿어 주세요! 멀리 떼어 놓고 금방 돌아올게요!”

데이지는 더 말릴 새도 없이 건물의 꼭대기로 폴짝 뛰어올라 거대한 애벌레 형상의 불의 주의를 끌었다. 당장에 불 애벌레에게는 데이지가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였는지 대가리가 휙 돌아갔다. 저 새끼가! 우리 애는 먹잇감이 아냐!

“내가 여기 남을게.”

엘더가 불 애벌레의 머리가 틀어진 순간에 맞춰 데이지에게 버프를 보내며 말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도 서포트할 수 있어. 내가 있으니까 저 꼬맹이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저 애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

“저 꼬맹이가 빠른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공격을 버리고 회피에만 집중하면 쉽게 잡히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꼬맹이가 벌어 준 시간에 방법을 찾아. 세계수의 가지가 부활하면 저 불을 상대로 승산이 있을 거야.”

엘더가 시선은 데이지에게 집중한 채로 재촉했다. 메스키트는 방패 안에 나를 가두고 데이지를 향해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판단해요, 제이. 데이지 아이의 용기는 허황된 것이 아니에요. 제이, 당신이 만든 거예요. 당신이 아이가 저만큼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줬어요. 당신이 만든 용기에 대해 믿음을 보여 줄 때예요.”

“…세계수의 가지로 돌아가자.”

제발 데이지가 오래 버티기를. 아무 일 없이 무사하기를.

그렇게 소망하고 등을 돌리려 할 때, 굉음이 터졌다. 갑자기 엘더가 정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더가 사라진 등 뒤로 거대한 불의 차폐막이 생겨났다. 누가 저 보스와 전투 모드로 돌입을…?

핸드폰이 울렸다. 보나마나 뻔했다. 인접한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떠오른 거겠지. 역시. 시발 시들링! 내 새끼들이 안에 갇혔잖아!

이 눈치 없는 새끼! 언제 여기까지 쳐들어왔어? 불이 보인다고 다짜고짜 가늠도 안 해 보고 전투로 돌입하는 놈이 어딨어?

“위험해요!”

차폐막이 바짝 다가와서 메스키트가 날 끌고 한참이나 물러났다.

“이젠 시간이 정말 없어요! 드루이드와 격리된 드라이어드는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저 눈치 없는 새끼. 진짜 가만 안 둘 거다. 일이 다 끝나면 너를 끝내 버릴 거다,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세계수의 가지가 있는 방으로 뛰었다.

거대한 벌레 형상의 불이 과수원을 향해 돌진할 때만 해도 내 속이 시끄럽게 울릴 정도로 경고를 하던 세계수의 가지는 조용했다.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낸 나머지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 내 줘.

꾸물꾸물, 거대한 몸뚱이로 지반을 밀어내며 온 탓에 과수원의 내부가 또 한 번 지진의 피해를 받아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젠 정말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조심해야 될 만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도 위험해 보였다.

운 좋게 불에 타지 않아도, 떨어져 내린 잔해물에 세계수의 가지가 매장당하여 죽는 것을 걱정해야 될지도 모른다.

“얼른… 얼른 내게 말해 줘.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가지를 붙들고 애원했다. 내가 희망이라며. 방법을 알려 줘. 지금도 나와 격리된 내 드라이어드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미칠 거 같아.

엘더가 차폐막 안으로 들어가자 내게 둘러진 방어막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의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되어 머리로 피가 쏠렸다.

“혹시 다이아야? 다이아라도 쏟아 줄까? 오랜 시간 다이아를 공급받지 못했다며! 행정 관리원의 일지에서 봤어. 그런데 이 커다란 나무를 살리려면 내가 일일이 물어서 깨트리기 벅찰 것 같은데!”

겨우 뜻이 통한 걸까. 죽은 듯 처져 있던 가지가 파르르 떨렸다. 큰 움직임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보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손을 맞잡은 것처럼, 손에 맞닿은 가지가 기다려 왔던 누군가를 만나 악수를 했을 때처럼 환희의 리듬으로 흔들렸다.

스르륵, 실뱀처럼 가느다란 줄기가 닿은 왼손부터 팔을 타고 내려와 감겼다. 그에 맞춰 테라리움 아티팩트도 은은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끝이 뭉툭하게 눌린 기괴한 모양의 줄기였다.

메스키트는 직접 세계수와 교감하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이, 답을 들었나요?”

“아니, 아무리 물어봐도 말을 안 해. 이젠 힘이 없나 봐.”

설마 내 팔을 집어 삼키려는 건 아니겠지? 희망이란 건 설마 날 거름 삼겠다는 거였나요? 하며 나무줄기의 그 넓적한 네모의 끝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인데?

“헐… 이거 설마?”

이거 봐. 공감대를 형성하려 메스키트에게 나무줄기의 끝을 보여 주었다. 아니 이걸 참신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메스키트의 눈빛을 보아하니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 내가 희망이 될 만한 것이라면… 그걸 말하는 것이 맞다면 아주 잘 찾아냈네. 번지수 잘 찾아오셨어요.

줄기의 끝은 내 핸드폰의 USB 케이블과 닮아 있었다. 물론 세부적으로 놓고 뜯어보면 금속 핀이 없는 등 다르지만. 과수원에선 세계수의 가지를 위해 다이아를 공급할 때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런 방법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핸드폰을 꺼내 깨웠다. 내가 마지막 생명줄인 것처럼 왼팔에 줄기가 꽁꽁 붙들고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주인님! 기다렸어요! 다이아가 필요하세요?]

“엄청! 엄청 많이! 잔뜩 준비해!”

[주인님! 지금 가져가실 거예요?]

난쟁이들이 화면을 향해 호스의 입구를 들이대길래 말렸다. 그쪽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줄기 끝을 핸드폰 아래에 꽂아 넣었다. 검증 안 된 케이블 막 쓰면 핸드폰 고장 난다고 했는데. 식물로 만든 USB를 써 보는 것은 또 처음이네. 핸드폰 속의 난쟁이들도 살아 움직이는데 이거라고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냐만은….

딸칵 소리를 내며 줄기가 핸드폰의 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철렁하고 눈앞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철이나 공연장 같이 사람 많은 장소에서 갑자기 의식이 내려앉으며 급성 빈혈을 앓는 것처럼, 온몸의 기운이 통제를 잃고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다리도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힘을 줄 수 없었다. 자꾸만 앞으로 몸이 기울려는 것을 메스키트가 황급히 부축했다.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고 앞은 보이지 않고 속은 매스껍고. 거대한 무언가에 잔뜩 짓눌려서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그만둬요! 뭘 하려는 거죠? 세계수의 가지를 살리기 위해 제이를 희생해야 된다면 차라리 그만둬요!”

메스키트의 발언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메스키트에게 세계수는 신과 같은 존재. 그곳에서 태어났기에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그런 그녀에게 둘의 우선순위 중 내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안이 벙벙했다.

“제이의 영혼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어요. 이러다간 깨져 버릴 거예요!”

내 영혼이 깨진다라…. 비슷한 이야기를 언제 들었더라? 그래, 내 드라이어드들이 내 영혼의 크기에 맞춰 웅크리고 있다고 했지. 내 영혼이 마치 드라이어드들이 안식하는 화분과도 같아서, 영혼의 한계가 커져 넓어질 때까지 드라이어드들도 힘을 숨기고 있다고.

혹시 이 가지가… 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빈혈이 올 때마다 하는 내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지금 느끼는 것이 내가 경험한 것 중 빈혈과 유사해서 그렇지, 진짜 이게 빈혈과는 다를 것 같긴 한데.

가물가물한 시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한 다이아> 화면이 깜박깜박 시야에 잡혔다. 거대한 깔때기 같은 것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난쟁이들은 깔때기를 피해 요란하게 뛰어다니다 넘어진 채로 놀란 얼굴을 했다. 깔때기를 한 번, 날 한 번 바라보더니 손으로 콕콕 가리켰다. 저거? 그래, 그거.

“괜찮아. 진짜 난 괜찮아.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아. 그래도 세계수의 가지가 이런 일을 겪기 전에 미리 언질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지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하지.”

나는 메스키트의 부축을 한껏 누렸다. 아예 그 커다란 품에 등을 맡겼다. 그녀는 기꺼이 날 끌어 안아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그 안에 다이아 좀 다 퍼다 넣어봐.”

내 오더에 난쟁이들은 와아아, 함성을 지르더니, 들고 있던 곡괭이들을 전부 내던져 버리고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무한 다이아>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 위치에서 움직인 적 없던 다이아 수레가 레일을 타고 깔때기가 있는 지점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가 움직일 때마다 잔뜩 쌓여 있던 다이아가 바닥으로 넘쳐 흘렀다. 난쟁이들은 제 몸집의 몇백 배나 되는 거대한 수레를 밀어 그 중앙의 수도꼭지가 깔때기의 입구에 맞도록 옮기는 데에 성공했다.

손잡이를 돌리는 것도 일이었다. 여럿이 붙어서 물레를 돌리듯 힘을 주었다. 몇몇 난쟁이가 북과 거대한 징을 가져와서 둥둥 치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돌리는 난쟁이들은 그 소리를 노동요 삼아 영차, 영차, 하며 박자에 맞춰 손잡이를 돌렸다.

저건 내가 현질로 버프 살 때 볼 수 있는 모션들인데…?

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주둥이에서 다이아가 하나둘, 종래엔 내가 핸드폰을 터는 것에 비할 바 없이 엄청난 양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수레에 올라탄 다른 난쟁이들이 다이아를 집어 던졌다.

내 다이아 소지 수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숫자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천 자리를 돌파하고 만 자리 단위가 바뀌어 있었다.

설레발치는 몇몇 난쟁이들이 내던진 곡괭이를 주워 광산으로 달려가기 시작할 즈음 가지에 변화가 생겼다.

“어… 저기 봐.”

어지러워서 혀가 꼬여 말도 잘 안 나올 지경이었다. 힘들게 고갯짓으로 가지를 가리켰다. 새까맣게 들러붙어 있던 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막았다. 재들이 떨어지며 하얀 진액도 가루들도 함께 떨어져 내렸다.

재들이 떨어진 자리에 옅은 빛을 내는 상아색 나무 속살이 드러났다. 분명 좋은 차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대로만 계속….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지의 표면에 물방울들이 아롱아롱 나와 맺히기 시작했다. 가지가 마치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물방울을 후드득 떨궜고 물이 맺힌 자리가 짓물리는 것처럼 곪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친, 지금 난쟁이들이 정도를 모르고 다이아를 쏟아부어 넣고 있는 건가? 이런 것도 전문적인 손길이 필요했던 거였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