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04)

우린 그의 안내를 받아 잔해 더미를 피해 가며 과수원으로 향했다. 그는 막힘없이 걸었고 중간중간 마주치는 불은 강해진 데이지가 빠르게 처리해 냈다.

또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깔짝깔짝 박수를 치며 감탄했지만, 나는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주치는 여기 이 불들도 그렇고….

과수원까진 금방이었고, 그곳에 다다를 즘엔 아주 멀리서 테라리움에 둥지를 튼 거대한 불의 정체도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체만 겨우 남았으나 우뚝 솟은 건물들이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거대했다. 후드득 튀어 오르는 플레어 같은 불길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고… 내뿜는 열기와 불덩이가 작은 태양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 불의 대략적인 형태도 그렇고….

애벌레…? 구더기…? 아니, 진딧물…? 대체 왜 그런 하찮은 형태를…?

갑자기 마을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그에 맞춰 거대한 불이 몸을 세웠다. 다시 보니… 진짜 벌레 같은데? 잠깐, 마을 밖? 설마 시들링이 벌써 도착한 거야?

“여기예요. 많이 무너지긴 했지만 과수원이 맞습니다. 네, 유리는 다 깨지고 철근은 내려앉고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도 확실히 과수원이랍니다.”

잘도 찾아왔네. 다시 만날 것 같긴 했지만. 시들링이 밖에서 테라리움으로 들어오기 위해 난리를 치든 말든 데이지 드라이어드의 안내를 받아 과수원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난잡했다. 위급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내부였다. 26번째 테라리움의 정갈했던 내부와 비교해 보면, 여긴 뭐… 전쟁터의 한복판이지.

메스키트가 혹시나 잔해가 내려앉아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경호했다. 엘더의 방어막도 내 머리 위에 몇 겹이고 더 두툼하게 둘러졌다.

깔려 죽은 선례도 있겠다, 나같이 연약한 인간은 조심해야지, 암.

“세계수의 가지가 있는 곳은?”

“이쪽입니다.”

엉망진창인 곳에서도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용케 길을 잘 찾아갔다. 막상 도착했지만 문 앞에 잔해가 가득 내려앉아 열 수 없었다. 심지어 문틀이 찌그러져서 정상적인 방법으론 문을 열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메스키트는 주저 없이 랜스를 내질러 문을 부수고 곧바로 모래 벽을 쌓아 무너져 내리는 잔해를 지탱했다. 멋져요!

우리는 거대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열매를 땄던 곳과 같은 방. 그 안은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처참했다.

“이런, 가지도 다 타 버렸네.”

과수원 내부에도 불이 기어 다니고 화재에 의한 피해가 역력해서 예상은 했지만…. 세계수의 가지 역시 까맣게 탄 후였다. 손대면 부스러질 만큼 바짝 타서 숯이 되어 있었다. 아, 회생 불가로 보이는데. 희망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거뭇거뭇한 재 속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것 좀 봐 봐. 세계수의 가지가 원래 이랬나? 물론 타긴 했지만 좀 달라 보여.”

나야 뭐 실제로 봤던 세계수의 가지는 2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이 전부였고, 꿈속의 것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라 경험으로 칠 순 없겠지. 하지만 드라이어드들은 이상을 알지 않을까? 이런 내가 이상을 느낄 정도면 말이야.

나는 땅에 떨어진 막대를 들어 가지의 재를 열심히 털어 냈다. 그러자 푹 파인 하얀 반점 같은 부분이 드러났다.

막대 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니 그곳에서 하얀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옆의 잿가루도 털어보았다. 이번엔 끈적하고 기분 나쁜 하얀 진액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상해 보이지? 그렇지? 정말로 병에 걸린 게 맞았나 본데? 아주 지독한 병에.”

메스키트가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곳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엘더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음, 뭔가를 아는 눈치는 아니군.

유독 발치에 많이 굴러다니는 둥근 재 뭉텅이들을 뻥뻥 차서 치우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병에 걸렸었구나. 병도 걸리고 불에 타 버리고. 이제 이 테라리움은 어쩌니?

“행정 관리원님의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병에 대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뭉텅이들을 발로 차며 괜한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말했다. 바로 근처라고 하여 흔쾌히 승낙했다.

무너져 내린 복도를 조금 걸었을 뿐인데 목적지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문을 넘어 행정 관리원의 방에 들어갔다.

커다란 초상화가 겨우 모서리 한쪽만 대롱대롱 벽에 매달려 있었다. 불길에 그을렸지만 탐스러운 금발의 젊은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세고 단호한 눈.

“저분이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십니다. 스케어크로우, 그런 이름이었어요.”

말도 안 돼. 마을 밖에서 만났던 노인이 저분이라고?

“아주 오래전 모습이야? 젊을 적?”

“아뇨. 마지막에 헤어졌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으십니다.”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마지막의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산 노인처럼 주름지고 버석한 피부에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생명력, 그래, 생명력.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소모해서 최후의 그래프트를 사용했다고 했어. 설마 그것 때문에…?

나는 메스키트가 무너져 내린 책상에서 불에 거의 타 버린 노트를 건져 내 내게 건넬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그녀의 희생이 와 닿으니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온몸이 저려 왔다.

“제이… 괜찮아요?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난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타서 눌어붙은 노트를 살폈다. 그것은 행정 관리원의 일지였다.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페이지는 많지 않았다. 종이가 바스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겼다.

세계수의 나무가 알 수 없는 병충해의 피해를 받았다.

대체 어디서 온 벌레지?

과수원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외부에서 쉽게 유입될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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