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604)

여기까진 다행히 온실에서 나의 드라이어드들을 개화시켰을 때와 다름없었다. 급조한 온실이 그럴싸하게 제구실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아티팩트를 채운 왼손으로 살며시 싹이 난 열매에 손을 댔는데….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작은 생명의 기운이 자꾸만 열매 안으로 숨으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심장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따뜻한 기운이 왼손을 타고 흘러 열매를 두드렸지만, 열매 속의 기운이 나와 연결되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겁을 먹고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기운은 자꾸만 손길을 피해 열매의 더 깊숙한 곳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렇게 나오니 이쪽도 오기가 생겼다. 시간상으론 벌써 개화시키고 인사를 나누고도 남았을 텐데, 자꾸 나랑 밀당을 하네?

여기 보세요, 열매 어린이. 자본으로 충만한 새 주인이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엘더가 인정한 작은 세계수가 여기 있어요.

간신히 기운의 끄트머리에 닿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티팩트가 작게 진동하며 순식간에 연결이 견고해졌다. 마치 물속의 물풀 끄덩이를 잡아 쭉 끌어 올리는 것처럼 안에 숨은 기운을 잡아 끌어냈다.

데이지와 같은 꽃향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붉은 꽃잎이 회오리 치고 빛 무리에 휩싸인 열매가 둥실 떠올랐다.

빛은 착실히 크기를 키워 나가더니 성인의 키가 되자 성장을 멈췄다. 넓게 퍼진 꽃잎이 빛 무리의 중심으로 요동치며 휩쓸려 들어가고 빛이 옅어졌다.

데이지를 닮은 짧고 붉은 머리에 붉은 꽃을 꽂은 남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민들레 군락지에서 동종의 드라이어드들을 많이 보고 깨달은 것이 있는데, 머리색과 눈 색은 종에 따라 고정되나 보다.

비록 남성형이긴 하지만 데이지도 다 자라면 저렇게 말쑥하게… 는 내 기대를 저버리고, 막 개화한 또 다른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겁먹은 표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누가 때린댔니…?

“진정해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내 주인, 제이. 이건 아무리 봐도 한 번 개화를 했던 드라이어드 같아요. 제이의 데이지 아이처럼 말이에요.”

“레드 데이지 개량종의 영혼에 새겨진 특수한 힘, 이미 알고 있지? 이미 한 번 죽고 부활한 거야.”

우리 데이지는 동종의 드라이어드를 본 것이 신기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데, 저쪽 데이지는 체격은 훨씬 크면서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아….”

덜덜 떨던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겨우 몸을 진정시켰다. 얼굴을 슬쩍 들어 우리를 살피며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렸다.

“죽었군요. 저 잔해들이 떨어질 때. 음…. 뒤통수가 많이 아프긴 했는데….”

“안녕하세요! 저도 레드 데이지예요!”

그래, 이왕이면 동종이 나서서 말꼬리를 트는 것도 좋겠지. 데이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런데 그는 언제 움츠리고 있었냐는 것처럼 입을 빠르게 움직이며 중얼중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늑한 영혼이에요. 제 새로운 주인은 굉장한 영혼을 갖고 있군요. 굉장해요. 모든 게 다 굉장해요. 온몸에 힘이 넘쳐요. 음, 안녕하세요. 차마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굉장하신 분들이 제 앞에 서 계시네요. 그쪽도 저와 같은 레드 데이지라고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요. 아마 세상에 나온 레드 데이지들 중 당신이 가장 으뜸일 거예요. 이렇게 강한 영혼을 가진 레드 데이지라니. 동종의 자랑이군요.”

“그, 뭐랬더라. 데이지가 포레스트를 형성하려면 저걸 굴복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정신없이 말을 쏟고 있는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차마 말리진 못하겠고, 메스키트에게 슬쩍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그의 입이 뚝 멈추더니, 다시 수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데이지들은 다 저렇게 활기찬가 봐. 물론 저 드라이어드는 입이 가장 활기차.

“오, 굴복이라뇨. 저는 보다시피 등급도 낮고 볼품없는 드라이어드입니다. 이런 저와 싸움을 하실 건가요? 강자의 배려를 보여 주세요. 아, 싸운다면 당신이겠군요. 항복입니다. 부디 저를 다스려 주세요. 당신은 척 보기에도 왕이 될 자질이 넘쳐 보여요. 제 미약한 힘이나마 당신에게 보탤 수 있다면, 제겐 더욱 영광이죠.”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우리 데이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쩐지 내게 연결된 우리 데이지의 영혼의 크기가 훌쩍 부풀어 오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데이지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두 개의 단도가 밝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단도는 유려하게 곡선으로 휘며 더욱 길어졌고 칼날에 붉은 문양이 새겨졌다.

“저는 당신과 달리 이런 무기를 사용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그가 꺼낸 것은 철로 만들어진, 날이 두 개인 부메랑이었다.

“제 영혼의 힘을 받아 이젠 같은 힘을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에 데이지가 변모한 두 개의 단도를 꺼냈다. 손잡이끼리 맞부딪히니 이어져서 그의 것과 비슷한 부메랑이 되었다. 오, 원거리.

“당신께 제 영혼이 안배되었으니 영혼의 힘도 두 배가 되었습니다. 우리 종의 특성상 사용할 수 있는 부활. 그걸 당신은 두 번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되었나요?”

그는 꼭 꼬리치는 강아지와 같은 눈을 하고 열심히 데이지에게 어필을 하고 있었다. 칭찬해 줘요! 그렇게 보였다.

데이지는 어쩐지 조금 아쉽다는 얼굴이 되었다. 너무 쉽게 포레스트를 만들어 버려서일까?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허망하긴 하지. “좋아. 우리 데이지가….”라고 말했을 때 두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나를 퍼뜩 바라보았다. 어… 이거 좀 귀엽다.

“새로운 힘을 얻어서 기뻐.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중요한 게 있어서. 혹시 날 부른 게 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제 새로운 드루이드 주인님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난 제이야.”

“네, 제이 님. 저는 방금 전까지 열매 속에 깊게 잠들어 있었어요. 영혼의 힘도 미약해서 멀리 있는 당신을 부를 만큼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잘못 짚었네. 얘가 아니면 대체 누구야?

“그럼 전 주인은 어떻게 됐어?”

“저는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과수원 소속의 잡일 담당 드라이어드였습니다. 행정 관리원님이 저를 개화시킨 후 세계수의 잔가지 한편에 그분의 특수한 힘으로 제 영혼을 묶어 두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무리 없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힘을 키우거나 하진 못하죠. 주인이라고 하기엔… 개화시킨 분을 일컬으면 행정 관리원님이 맞겠죠? 그나저나 그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대피를 하던 와중에 제가 잔해에 깔려 죽는 바람에….”

“당신은 불에 당해서 죽었다면 부활하지 못했을 거예요.”

메스키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불 외의 물리적인 요인으로 죽어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는 거네? 행정 관리원이라면 밖에서 만난 그 스케어크로우를 말하는 거겠지?

“그분은… 음…. 아냐. 다른 이야기를 하자.”

내가 화제를 돌리자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난 여기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러 왔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메스키트의 말로는 세계수의 가지가 이렇게 쉽게 불에 당했을 리가 없다고 했어. 아는 것에 대해 전부 말해 줬으면 해.”

내 질문에 메스키트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본래는 28번째 테라리움 내의 극비긴 하지만…. 이제 당신이 저의 주인이시니 숨길 것도 없죠. 맞습니다. 본래의 세계수라면 불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았겠죠. 물론 본래의 세계수라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처참하군요. 전부 타 버렸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죠?”

자꾸 다른 길로 새길래 눈빛으로 은근히 재촉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세계수의 가지는 몇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가지가 마르고 빛을 잃어 갔죠. 그 때문에 최근까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과수원에서 열매를 제공하지 못하니 드루이드들도 이곳의 발길을 끊은 지 좀 됐습니다. 내부에선 이 일을 숨겼지만… 어떻게 소식을 접한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부랴부랴 이곳을 떠나 버렸지요.”

“세계수의 가지가 병들었다고? 대체 어떤 병에?”

“저도 정확한 사항은 듣지 못했습니다. 드라이어드에게 전염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접근을 못 하게 막았거든요. 하지만 저 역시 세계수의 잔가지에 묶인 몸. 어느 날부터 힘이 빠지고 약해지긴 했습니다. 몸의 생기와 피를 쭉쭉 빨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심한 상황인데 당장 다른 테라리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거야? 다른 테라리움들은 이 상황을 모르는 것 같던데?”

세계수의 가지가 병든 것은 정말 큰일이잖아. 불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세계수 가지의 축복 덕인데, 그 가지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 거 아냐?

“관리의 부실로 책을 잡힐 수도 있고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죠. 하지만 그것보다 행정 관리원님께선 일을 키우지 않고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신 것 같습니다. 테라리움 내에 불안이 커지면 다들 떠나 버리니까요. 주민이 없는 테라리움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테라리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20번대의 테라리움들이 아닌 더 위쪽 테라리움에요. 연금탑이 있는 16번 테라리움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해결책을 보내 주기로 했는데… 감감무소식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 역시도 2년 전의 일입니다. 그쪽에서 우리를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닌지….”

설마 우리가 오면서 봤던 전복된 마차가…?

“이곳으로 오는 방문객도 1년 전을 기점으로 갑자기 뚝 끊겨 버렸습니다. 나가는 사람들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다이아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고…. 급하게 드루이드를 파견해도 돌아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어떠한 알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이곳이 고립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 습격은 갑작스러웠죠. 내부에선 불에 저항할 수 있는 인력이 몇 없었습니다. 저는 행정 관리원님이 과수원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네, 죽어 버렸습니다.”

“메스키트, 어떻게 생각해?”

“세계수를 위협할 수 있는 건 불 외엔 없어요. 병들었다니. 말이 되지 않는군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 드라이어드는 세계수가 병이 들었대.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이리로 와요….”

이번엔 정확히 방향을 잡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건 내 왼쪽. 마을의 중앙쯤 되는 곳.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도 이 드라이어드와 달라. 마을에 누군가 또 있나 봐.

“혹시 과수원이 저쪽에 있어?”

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수원으로 가야겠네. 그곳에서 정말 세계수가 병이 들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안내해 줄 수 있지?”

“비록 과수원에 묶여 있던 몸이지만 이 테라리움의 지리는 훤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잡일 담당이었기 때문에 마을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꿰고 있죠.”

“이곳엔 위험한 게 돌아다니고 있어. 아마 그건 거대한 불일 거야. 그걸 피해서 과수원에 가야 해.”

“그렇군요…. 불이 결국…. 좀 돌아가야겠지만 샛길이 있습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뺨을 찰싹 쳐서 정신을 다잡았다. 불의 이야기를 할 땐 무척이나 아픈 표정을 짓더니 겨우 멀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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