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604)

불판 위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스테이크 덩어리가 된 느낌이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미디엄 레언데.

엘더의 방어막을 한껏 둘러 감고 메스키트가 랜스로 치운 잔해를 피해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숨쉬기 곤란할 것 같아도 하얀 빛 무리가 얼굴 주변을 맴돌며 나름의 쾌적한 공기를 제공했다. 이거 광합성…?

이따금 지반이 크게 우르릉 울리며 심장 조이게 만들었다. 뭔가 상상도 하기 싫은 아주아주 거대한 게 테라리움 안에 있다.

솔직히 내부는 이젠 테라리움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표현하자면 모 게임 기반 영화의 배경이 되는 ‘조용한 언덕’을 보는 것 같았다. 꼭 던전에 들어온 느낌도 나고….

땅이 지진 날 때마다 망가진 건물 잔해가 우수수 떨어지고, 풀썩 연막탄을 터뜨린 것 같은 잿가루가 흩날리고. 붉고 노란 불씨가 환절기 꽃가루들처럼 사방팔방에 떠다녔다.

여긴 미니 맵도 없는데 길을 어떻게 찾지?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지만 그곳을 향해 뚫고 가기엔 너무 험난해 보이는데.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든가 뭐 없을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오긴 했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난 가능한 이 테라리움 안에 있는, 그 드루이드가 죽기 전 경고했던 그 끔찍한 불과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물론 엘더의 말엔 동의한다. 위험 요소와 가까워질 때마다 경고음이라도 들리면 좋겠는데. 이렇게 갈팡질팡하다간 그 무언가와 마주칠 수도 있고. 날 부른 것이 누구냐! 답해라!

“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내 주인, 제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여길 나갈 거예요. 아주 잠시만 제이의 뜻대로 머물기로 해요.”

날 부르는 것의 정확한 존재도 모르고 무턱대고 돌입하긴 했는데. 솔직히 나도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이 테라리움과 멀어지고 싶긴 했다.

여긴 너무 더워. 불쾌지수가 하늘을 뚫을 것 같아.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반응을 보이던 데이지가 갑자기 작은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날 바라보았다.

그곳도 역시 잔해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 곳이었다. 타지 않는 돌무더기가 까만 잿더미를 잔뜩 묻힌 채 철근 같은 것을 드러내 놓고 위협적으로 쌓여 있었다.

“드루이드님! 저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음, 이건 제 감이에요.”

모처럼 데이지가 의견을 피력했다. 이렇게 보니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가 생각나네. 그때도 데이지가 나의 가이드 캐릭터처럼 마을 이곳저곳을 안내해 줬지.

그날의 특별했던 운명의 만남을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북하게 쌓여 있던 잔해들은 데이지가 묵묵히 치워 냈다. 제 몸집보다 훨씬 큰 돌무더기를 힘든 표정 없이 쑥쑥 들어 올려 옮겼다.

새삼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나는 작은 풀꽃 데이지가 떠올라서, 목 뒤가 조금 서늘해졌다. 데이지는 힘도 세고… 아주 세고….

“대체 이 더미 안에 뭐가 있다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여기를 살펴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데이지는 자신이 받은 느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 엘더가 스태프로 한쪽에 쌓아 둔 잔해들이 다시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며, 데이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애가 다 생각이 있다잖니. 좀 기다려 봐 주자.

주변이 정리가 되고 풀풀 풍기던 재와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위협적으로 날을 드러내는 유리 조각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유리 조각들 사이로 보호색처럼 저도 투명하게 몸을 투영하고 있는 동그란 구슬이 보였다.

드라이어드 열매? 저게 왜 여깄지?

내가 행여나 유리 조각에 다칠세라 메스키트가 대신 열매를 주워 건네주었다. 열매는 주변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온기를 내었다. 은은한 따뜻함이 손을 감쌌다. 살아 있네?

“용케 불의 아귀에서 벗어났군요. 어떤 드라이어드의 열매이길래 이렇게 운이 좋았을까요?”

“데이지예요.”

데이지가 내가 들고 있는 열매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레드 데이지 열매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레드 데이지라면… 우리 데이지랑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 열매란 말이야? 데이지가 노멀 등급이라 흔한 종이긴 해도, 어떻게 다음 마을에서 이렇게 운 좋게 바로 발견할 수 있지?

“동족의 기운을 찾는 재능이 뛰어나 보이는군요, 데이지.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메스키트의 칭찬에 데이지가 헤헤, 하며 환하게 웃었다.

“신기하네. 이게 어떻게 여기…. 흠, 하지만 과수원 온실의 그 흙이 아니면 이걸 개화시킬 수는 없지 않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엘더가 좀 전까지 데이지가 열심히 치운 잔해들을 스태프로 쭉 훑어 가리키며 말했다.

“낯익은 조형물들이라고 생각했어. 이것들, 임시 온실의 잔해로 보여. 하지만 주변에 과수원으로 보이는 건물은 없고…. 아무래도 무슨 사정 때문에 온실만 따로 옮겼거나 아니면 과수원의 위치를 여기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지. 잘 찾아보면 드라이어드 포트도 있을 거야.”

모처럼 드라이어드 열매를 얻었는데 개화를 시켜 볼까? 이 열매 속 드라이어드가 날 부른 것일 수도 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돌벽이 박살 나서 안의 흙이 흘러내리고 있는 드라이어드 포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척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26번째 테라리움의 온실에서처럼 주변의 환경이 아늑하지도 않고 흙에서는 좋은 향은커녕 탄내가 났으며 무엇보다 흙까지 불에 그을렸는지 거뭇거뭇 처참해 보였다.

“이 흙에선 잡초 하나 못 자랄 것 같은데?”

드라이어드 열매를 놓기만 해도 오염될 것 같아. 신발코로 흘러내린 흙을 툭툭 차며 말했다.

“내 주인, 제이. 이 흙은 보통 흙이 아니랍니다. 세계수가 직접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수 바로 아래의 흙을 퍼 온 거예요. 겉보기엔 타긴 했어도 축복의 힘까진 잃지 않았을 겁니다. 남은 건 제이에게 달려 있죠.”

굳이 따지자면 흙 중에서도 최상급 흙이었군. 이거 내가 막 발로 찰, 그럴 취급을 당할 것이 아니었잖아?

“그럼 이제 어쩌면 돼?”

“온실은 세계수의 환경을 흉내 내어 조성해 놓은 것. 마침 여기 작은 세계수 제이가 있잖아요? 하지만 공들여 조성해 놓은 것보단 개화 확률이 떨어질 수 있어요. 잘못하면 열매가 상할 수도 있답니다.”

아오, 부담감이 커진다. 모처럼 데이지의 한계를 돌파해 줄 수 있는 동족의 드라이어드 열매를 찾았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열매를 날려 먹을 수도 있다니.

그러나 메스키트는 그런 나의 불안감 따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즉, 잘못되는 것은 드라이어드지, 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온실의 상징적인 것은 다 갖춰져 있어. 지금이 아주 추운 겨울인 것보단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차라리 나을 거야. 데이지 종은 4월 전투 보너스지? 그럼 더욱. 추운 날씨엔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 외에는 개화하기 힘들어. 한여름에는 싹이 터도 꽁꽁 언 땅에선 싹이 트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엘더가 방어막의 범위를 넓혀 드라이어드 포트까지 감쌌다. 넘실거리는 반투명한 방어막 안이 둥글게 자리 잡아 마치 작은 온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엘더 꼬맹이의 말이 맞답니다. 온기와 흙과 세계수의 영혼이 갖춰져 있어요. 이젠 잠든 흙을 깨우고 촉촉이 적셔 줄 물이 필요하죠.”

“물? 이거?”

내가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보이며 물었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본래대로라면 세계수의 잎에 맺혀 세계수의 기운을 받은 이슬을 모아 사용하긴 하지만… 그건 대체용품일 뿐이야. 가격 면에서 합리적인 것을 택한 거지. 좀 더 효과가 확실한 것이 있어. 너도 잘 알고 있고, 너에게 가장 많은 것 말이야. 아주 아깝긴 하지만….”

엘더가 예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아까워할 만한 것은 하난데. 주머니에서 다이아를 몇 알 꺼내니 휙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게 세계수의 수액인 건 알지만 이걸 어떻게 사용해? 이건 물이 아니라 고체인데.”

“감싸고 있는 막을 부숴서 깨트려야죠. 잘 갖추어진 온실이라면 세계수의 가지의 힘이 알아서 했겠지만…. 지금은 제이의 손이 많이 간답니다.”

“다이아를… 내가 부수라고?”

이거 다이아인데요. 돌도 자르는 다이아 아니야? 물론 진짜 보석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다이아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고 했지만.

내가 아무리 악력이 세도 이걸… 이거 봐. 내가 손으로 힘을 주어도 찌그러지기는커녕 번쩍번쩍 자신이 건재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제이가 작은 세계수인 걸 적극 활용해 보아요. 결국 다이아도 세계수에서 나온 것. 엘더 꼬맹이와 비도 내렸잖아요? 분명 할 수 있을 거예요.”

음, 메스키트도 정확히 방법은 모르나 보네. 알면 좀 더 정확하게 제시해 줬을 거야.

그래도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내게는 다이아가 넘칠 만큼 많고 막 써도 될 만큼 하찮은 것이라 그런 거겠지? 시행착오를 겪어도 될 정도로 말이야.

다른 이들에겐 다이아 한 개도 아쉬운 상황이니 이런 조언은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악력으로 안 되면 발로 밟… 으려고 하니까 말렸다. 신체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몸과 영혼 자체가 오롯이 작은 세계수니까. 장갑을 벗고 다시 시도해도 안 되는데….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지? 꼭 쥐고 정신을 집중해도 뭔가 느껴지지 않고. 푸른색 정십이면체의 그것을 고심하며 바라보다 입으로 가져갔다.

남은 것이 이것뿐이라. 될 대로 되라지. 와득 이로 깨물었더니.

“엑, 퉤! 퉤퉷!”

돌처럼 딱딱한 그것이 이로 깨물자마자 설탕 유리처럼 부서졌다.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도 멀쩡했던 것이 무색하게. 혀에 닿은 조각이 얼음처럼 사르르 녹자 떫은 풀 맛이 났다.

손에 쥔 다이아 조각들을 흙에 묻고 황급히 물로 입을 헹궜다. 손에 꿀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은 가루들은 마치 화장수처럼 피부에 사르르 흡수가 되어 화한 느낌을 남겼다. 물파스를 바를 때와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다이아도 맛보고…. 나 참 별….

데이지가 일련의 과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너도 한번 깨물어 볼래…?

이렇게 하는 것이 맞냐는 눈으로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더니…. 사실 정말로 방법을 찾아내 성공할 줄은 몰랐다는 답을 해 왔다. 메스키트,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요?

특별한 드루이드는 신체의 특수한 힘을 써서 다이아를 녹일 수 있는데, 이렇게 나처럼 이로 부숴서 녹여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어떠한 마법적인 힘도 필요 없이… 그저 와그작 깨물어서. 자꾸 들으니 좀 민망하구만.

데이지가 하도 신기해하길래 몇 개 더 부숴서 흙에 묻는 김에 조각을 한 개 건네주었다. 그런데 다이아는 내 손을 떠나자마자 데이지의 손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데이지에게 흡수된 것도, 그렇다고 포션처럼 장비를 복구한 것도 아닌, 정말로 승화되어 버린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막이 깨져 버린 다이아가 힘을 유지하려면 내 신체에 닿아 있거나 드라이어드 포트의 흙처럼 특수한 힘을 가진 곳에 있어야 하는구나. 아무리 드라이어드라고 해도. 다이아를 부숴서 생으로 포션처럼 사용하려던 꿈이 날아갔다.

다이아를 흡수할수록 맑은 빛을 내는 흙에 조심히 드라이어드 열매를 놓았다. 정보를 읽어 줄 석판도 없고, 정말 개화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급조된 온실.

흙에 닿은 투명한 열매가 금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곧 뚜껑이 뾱! 하고 열리고 앙증맞은 금색의 새싹이 머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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