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604)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방금 마차 보스를 잡으면서 큰 문제를 하나 해결한 것 같아.

마차 보스가 왔던 길을 슬쩍 보니 처참할 정도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저렇게 기동성이 좋고 강력한 몬스터가 주변을 다 휩쓸고 다녔으니 28번째 테라리움에 이변이 생긴 것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달랑 드라이어드 한둘만 데리고 모험을 떠난 초보 드루이드들이 패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

우리 데이지가 꼬꼬마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가 됐고 내 레벨도 훌쩍 자란 것 같고, 엘더와의 그래프트 스킬도 개방했으니 이젠 우릴 가로막을 수 있는 불은 없을 거야.

두 갈래 길 중 어디로 향하든 28번째 테라리움이 나온다고 했지?

내리막길은 시들링네 드라이어드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우린 그 옆 오르막길로 피해 가자. 내가 좀 힘들고 말지.

빨리 쟤네들과 헤어지자, 하고 드라이어드들을 재촉해 길을 떠나려고 했다.

“어딜 가는 거지? 왔던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라. 방금 전투를 보지 않았나? 느낀 것이 없나?”

“네네, 내가 엘더 손을 잡고 멋지게 피니시를 날렸다는 것? 내가 구해 줬으면 됐지, 이 이상 널 얼마나 더 도와줘야 하니? 나 바쁜 몸이야. 질척거리지 말고 쿨하게 헤어지자니까?”

시들링을 통해 고렙들이 쓰는 전투 기술을 몇 개 엿봐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래프트도 그때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볼 장 다 본 것 같으니 끝내자고요. 다이아나 주워. 하면서 손으로 가리켜 주고 등을 돌렸다.

그래도 뭔가 말을 더하며 붙잡으려 하길래 메스키트의 뒤로 쏙 숨었다.

야야, 우리 드라이어드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인간들을 많이 싫어하거든? 선례도 있는데 곱게 물러가라.

“아, 그래. 너. 솔직히 너도 28번째 테라리움에 용건이 있는 것 같으니, 내 바람과 달리 다음에 다시 만나지 말자고는 말 못 하겠다.”

“저런… 역시나 시들링.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또 미움을 샀구나.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지 않니?”

벨라돈나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너 다음에 만났을 땐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 내가 말하라고 할 때까지 먼저 말 걸지 마. 짜증 나.”

“그건….”

“지금부터야.”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다가오려 하길래 내 바람을 읽은 메스키트가 랜스를 쭉 내밀어 주었다. 시들링이 뻗은 손이 어쩐지 아쉬움을 가득 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들링, 그만. 저 드루이드분과 더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니? 이 이상 메스키트를 자극하지 말렴. 주인에게 과한 충성을 보이는 드라이어드는 네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있단다.”

그래도 나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에겐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니 핸드폰이 짧게 울리며 상대 아티팩트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메시지가 떴다. 파티도 해제되었네. 벨라돈나와 멀어졌으니 이제 상관없을 거야.

마차 보스와의 전투가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던 탓에 금방 날이 어둑해졌다.

보통 때라면 메스키트가 휴식을 권했을 텐데, 빨리 저들과 거리를 벌리고 싶은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는지 계속 직진만 했다.

“어때? 따라오는 것 같아?”

“아뇨.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요. 내 주인, 제이.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원한다면 뿌리를 내려 그들이 가까워질 때마다 경고를 보낼 순 있어요.”

“아냐, 아냐.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거기 드라이어드들은 재밌었는데 주인 되는 시들링이란 놈이 좀 말이 어이없잖아. 사람을 무시하고 있어! 우리 데이지한테도 작다고 말이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좀 쉬어야겠다. 넓적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올라앉았다.

하루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배도 고파졌다. 비상식량을 꺼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배는 고프지만 이건 맛이 없는데.

“그래도 배울 건 많더라. 나도 나중에 레벨이 많이 오르면 시들링처럼 직접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걸까? 검도 휘두르고. 아티팩트에서 필드를 불러오는 것도 신기했어. 드루이드가 할 수 있는 게 참 많더라고.”

마을로 돌아가면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도 있나 한 번 찾아보자. 체력이 쓰레기라 검처럼 무거운 것을 휘두르지 못하더라도 뭔가 있을 거야.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전투를 하는 모습이 꽤 멋있었다. 나는 그게 되지 않으니 엘더 옆을 알짱거리며 열심히 도망치기 바빴고.

비상식량을 조금 쪼개서 입에 넣고 곧바로 물을 마셔서 삼켰다. 알약 먹는 것처럼.

마을로 돌아가면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비상식량 다 버려 버리고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으로 바꿔야지.

“제이가 직접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어요. 또한 그렇지 않는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답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제이는 존재 자체로….”

“그래도 시들링은 못된 주둥이 빼고는 전부 멋있어 보였는걸.”

“그랬나요? 제 눈엔 제이가 가장 멋있어 보였는걸요. 그래프트도… 제이와 엘더 꼬맹이와의 그래프트는 대단히 멋졌어요.”

메스키트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멋있대. 그럼 매번 그래프트를 펑펑 쓰면 되지 않을까? 난쟁이들도 본격적으로 수레에 수도꼭지를 달았고….

하지만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메스키트가 당부를 했다.

“그래프트는 매번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랍니다. 지속적인 전투를 통해 드라이어드와의 교감을 끌어 올려야 사용할 수 있죠. 분명 그래프트를 깨달은 것은 축하할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를 믿고 모든 전투에 무턱대고 뛰어들면 안 돼요. 위험에 빠질 거랍니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상시 스킬이 아니었다니. 전투에서 게이지 채워서 사용하는 필살기 스킬이었단 말이야?

모처럼 내 다이아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좋았었는데.

“그렇게 풀 죽을 필요 없어. 나와의 친화력이 평소에도 높은 상태면 전투에서 교감을 끌어 올리는 속도도 빨라질 거야. 그러니까 교감 좀 하게 다이아 좀 더 줘 봐.”

저 다이아 귀신. 메스키트와 분위기 좋았는데 또 다이아 타령을 한다.

“아까 많이 줬잖아?”

“네가 다이아를 못 쓸 상황이 오면, 아깝지만 내 다이아를 운용해서 그래프트의 힘을 써야지.”

“그럴 상황은 없을걸?”

“다 써 버릴 수도 있잖아?”

“그럴 상황은 없을걸?”

“넌 낭비가 심한데 분명 저번처럼 이상한 상자에 집착해서 다 탕진하는 날이 올 거 아니야?”

“그럴 상황은 없을걸?”

엘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지금 쓰는 다이아도 우리 난쟁이들은 부족하다고 난린데? 얘는 아직도 주인의 다이아가 얼마나 많은지 감이 안 잡히나 본데.

“저… 저도 드루이드님과 그래프트의 힘을 쓸 수 있는 날이 올까요?”

내 옆에 착 붙어서 대화를 경청하던 데이지가 물었다. 그러게. 교감이나 친화력으로 따지면 우리 데이지가 이 중에서 제일 월등한 거 아닌가?

“제이처럼 조급해할 필요 없답니다. 아직 제이에게 가지의 힘을 나눠 주기에는 데이지가 덜 성숙하기 때문이에요. 일단 뿌리부터 강하게 여물어야겠죠?”

동시에 메스키트가 쑥 들어 올리려는 것을 데이지가 날 와락 끌어안고 버텼다. 메스키트가 처음으로 행동을 주춤했다.

약점 파악 능력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군요…. 메스키트가 씁쓸하게 웃으며 데이지를 놓아주었다. 데이지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만 쓰지 말고 몸도 좀 강해져야지, 꼬맹아.”

“드루이드님, 저는 어떤 그래프트 힘을 쓸 수 있을까요? 저도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을까요?”

엘더의 말은 무시당했다. 데이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비를 내리게 하는 스킬은 회복형인 엘더와 잘 어울렸지. 그럼 공격형인 데이지와 그래프트하면 어떤 스킬을 쓰게 될까? 메스키트의 그래프트 스킬도 궁금해졌다.

만약 이 셋 모두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전투가 완전 다이내믹해질 것 같은데…?

우린 도란도란 서로의 그래프트 스킬을 상상해 보며 밤을 보냈다. 잠에 약한 내가 눈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릴 때까지.

여느 때와 같이 늦잠을 잔 나는 잠이 덜 깬 나머지, 마침내 나온 내리막길에서 굴러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다치면 엘더가 치료해 줄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 걷기 싫은데.

한참을 잡생각을 하며 걷다가 저 멀리 28번째 테라리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잠이 확 깼다.

상상했던 대로 처참했다. 녹음이 가득 차 있던 26번째 테라리움과 달리 잿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검은 잿가루에 휩싸인 모습,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며 이따금 불꽃처럼 불이 확 튀어 올랐다. 맙소사, 저게 마을이라니.

마침내 첫 번째 퀘스트의 목적지인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지만 주변이 온통 불바다라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우린 사정권에 들지 않도록 멀리 몸을 숨기고 주변을 탐색했다. 크고 작은 불들이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불이 서로 맞부딪히면 큰 불에게 작은 불이 흡수되어 몸집이 훌쩍 커졌다.

“결계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테라리움 근처에 저렇게 많은 불이 있다는 건… 인접 테라리움들이 전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세계수의 28번째 가지는… 힘을 잃어버렸군요.”

나는 메스키트의 말을 들으며 두근대는 심장을 안고 불의 개체 수가 적은 곳을 뒤지고 있었다. 전부 처치할 필요 없이 마을로 갈 길만 뚫으면….

“여길 방치해 두면 20번대 테라리움들이 전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세계수 가지들로 쌓아 온 축복의 벽에 구멍이 뚫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구멍을 통해 불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겠죠. 본래대로라면 우리가 앞서 만났던 거대한 불은 절대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에요. 곳곳에 위치한 세계수의 테라리움들에 의해 힘이 억눌리기 때문이에요.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불이 힘을 키울 수 없어요.”

20번대면 그래도 세계수와 인접한 지역이니까. 본래대로라면 안전해야 하구나.

26번째 테라리움도 갑자기 가뭄으로 고생을 했고… 초보자 수준이었던 드루이드들이 가볍게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 다들 목숨을 잃었고.

적당한 자리에 존재해야 할 가지가 사라져 버려서 방어벽이 뚫려 버린 거였구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어째서 위대한 세계수의 가지가 이렇게 처참하게 당해 버렸는지. 무언가 크게 잘못됐어요.”

메스키트는 굉장히 분노했다. 그 분노는 나를 살짝 겁먹게 만들었다. 엄청 화난 걸로 보여.

음, 아무래도 마차 보스는 나와 시들링 파티가 어찌어찌 해치울 수 있는 수준이었잖아? 그 마차 보스가 테라리움을 저렇게 태워 먹었다기엔 좀 화력이 약해 보이고.

메스키트가 분노를 할 정도면 그 마차 보스보다 더한 것이 저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함에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약한 신호음이 잡혔다.

슬쩍 핸드폰을 보니… 이상하게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메시지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스톤헨지 모드였다가 월렛 모드였다가. 네트워크를 연결을 잡는다고 원을 빙글 돌리다가 다시 월렛 모드가 되고.

이거 왜 이러지? 또 미쳤나? 핸드폰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마치 와이파이 잡을 때처럼 여기저기에 갖다 대 보기도 했다.

그러다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을 때쯤 인접 아티팩트 네트워크를 찾는다는 메시지로 넘어갔다.

오, 저 앞쪽에 누가 있나 본데? 시들링이면 좀 열 받을 것 같아. 선수를 빼앗기다니.

아티팩트 네트워크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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