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04)

비에 닿은 불은 사그라들고 땅이 축축하게 젖었다. 노멀 필드의 푸른 풀들이 생기를 머금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참혹했던 드라이어드들의 무기와 장비들이 빗방울에 닿자 빠른 속도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비는 지상 모든 식물들의 생명의 축복.

불은 물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건 보통의 물이 아니었다.

마치 물로 만든 옷을 입은 것처럼 적셔 오는 이 물방울은… 그래, 포션의 액체와 동일한 것이었다.

세계수의 수액. 어쩐지 귓가에 꺄르르 웃는 내 광산 난쟁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수액의 출처를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그야말로 엘더와 나만 쓸 수 있는 스킬이잖아?

내 영혼과 엘더의 힘이 덧입혀진 축복의 비.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오직 드라이어드의 특수한 힘.

그 힘이 내 다이아를 녹여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엘더, 다이아에 집착하던 건 정말 본능이었니?

보스전 뛸 때 캐시로 버프 쓰는 유저들이 부러웠었는데, 이젠 다 필요 없었다. 캐시로 직접 스킬 쓰는 나보다 더할까.

내가 이 스킬에 지불할 수 있는 다이아는 무한대. 내가 아닌 보통의 드루이드라면, 잠깐 내리고 끝나는 일회성 스킬이 되었겠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정신을 차린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기세가 약해진 불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힘들 것 같았던 유니크 등급을 삼킨 불을 순식간에 협공으로 끝내 버리고, 최종 보스인 마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라이어드들은 마차가 뿜어내는 용암을 피하지 않았다. 용암에 닿아도 비를 맞는 족족 복구되었다. 메스키트마저 방어를 버리고 랜스를 세워 마차로 달렸다.

마차는 요란했던 등장과 다르게 휘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양동이로 물을 끼얹은 화롯불처럼 사그라들었다.

까맣게 탄 땅 위에 푸른 다이아를 왈칵 쏟아 내며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상쾌한 기운이 몰려오고… 멀리 선 데이지의 전신이 흰빛으로 휩싸였다.

차폐막이 고리가 떨어진 커튼처럼 훅 내려앉아 사라져 버렸다.

힘겨웠던 레이드가 끝이 났다.

***

눈부신 빛에 감싸인 데이지. 과수원에서 열매 상태의 아이를 개화했을 때와 같이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물방울을 머금은 붉은 꽃잎들이 왈츠의 리듬으로 경쾌하게 춤을 추다가 크기를 키우던 빛과 함께 사라졌다.

눈을 잠깐 감았다 떴을 뿐인데 시야가 훅 높아졌다. 빠르게 달려온 누군가가 날 안고 빙글 돌았기 때문이다.

꺄르르 웃는 맑은 웃음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내 드라이어드가 되었을 때는 내가 이렇게 널 안아 올렸는데.

내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내리던 비가 동시에 멈췄다. 구름을 제일 마지막에 떠난 빗방울들은 그대로 땅에 도달하지 않고 공중에 멈춰 섰다.

가볍게 부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반짝반짝. 먹구름이 물러가고 열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아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리고 나와 마주한 아이의 웃음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무척이나 작았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나와 눈높이가 많이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앳된 모습은 군데군데 남아있어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른은 아니고 학생쯤? 성장한 데이지는 이젠 자신도 나를 번쩍 들 수 있다며 커진 키를 자랑했다.

“아직 드루이드님보단 키는 작지만, 힘이 더 세졌어요! 이젠 불을 더 잘 잡을 수 있어요! 전 계속 자랄 거예요. 드루이드님을 더 안전하게 지켜 드릴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주변이 다 불타서 새까매진 곳에서 우리만 환한 꽃밭이었다. 훌쩍 성장한 데이지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보기만 해도 절로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고 데이지도 날 마주하며 자신감이 부쩍 늘어난 웃음을 보내왔다.

“성장했군요. 보기 좋아요. 이젠 묘목 아이라고 부를 수 없겠는걸요?”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메스키트가 랜스를 휙 휘둘러 재를 털어 내며 말했다. 엘더는 내게서 스태프를 받아 가며 씁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빗방울들이 뭘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있는 거겠지.

“원래의 내 능력이라면 비가 아니라 잠깐의 안개였을 텐데….”

손을 들어 제 앞에 아롱거리는 빗방울을 쥐었다. 물방울이 톡 터져 엘더의 손에 흡수되었다.

결코 쥘 수 없는 것을 쥐고자 하는 행동이, 아련하게 젖은 예쁜 얼굴과 맞물려 무척이나 허망하고 가련한 한 떨기 꽃처럼 보였다.

“비가 내릴 정도라면… 넌 대체 다이아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거야?”

엘더가 푹 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알려고 하면 다친다. 정신이 다칠 거다.

‘얼마나’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수로 헤아릴 수 없지. 무한대야. 무한 다이아니까. 간만에 난쟁이들이 열일 했겠는걸.

“이 구역을 성역으로 만들어 버렸네. 당분간 이 근방엔 불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얼씬도 못 할 거야.”

“이런 힘은 처음 봤어. 내가 예전에 만난 엘더 플라워라면 이런 엄청난 힘이 있었으면 내게 자랑을 했을 거야. 그 드라이어드는 높은 콧대만큼 자신이 무척이나 고상하고 대단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알려 주고 싶어 했으니까.”

정신없는 전투가 끝이 나고 자신들의 드루이드에게 복귀하던 드라이어드들이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위에 둥둥 떠다니는 빗방울들을 조심히 손안에 받아 내 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툭툭 쳐 보기도 했다.

“물이 벌써 말라 버렸네. 아쉽다. 촉촉하게 젖은 기분이 좋았는데. 내 날개의 꽃가지들이 싱그럽게 피어났어. 마치 세계수로 돌아간 기분이야. 이건 시들링이 기를 써도 무리일 것 같은 힘인데. 드루이드님은 괜찮으신 거 맞나요?”

“그쪽… 드루이드… 쓰러지는 거 아냐? 이건 수천 병의 포션을… 하늘에서 쏟아 낸 거나… 다름없어…. 분명 수액을 대신할… 생명력을… 소모했을 거야….”

주위에 떠다니는 빗방울이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딪힐세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멜로우가 말했다.

카돈이 입을 쩍 벌리고 주위의 모든 빗방울들을 향해 개처럼 뛰어다니는 것과 무척이나 대조되었다. 벨라돈나가 멜로우의 말을 듣고 다가왔다.

“저는 치유의 힘은 없지만 육체의 이상이나 고통은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살펴봐 드릴까요?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고갈된 드루이드의 생명을 채울 순 없을 겁니다. 상황이 심각하면….”

“난 괜찮아요. 멀쩡해요.”

진짜 멀쩡해요. 렙업도 짱짱하게 해서 피로도 다 날아갔는데요. 제가 소모한 것은 다이아밖에 없어요. 소모한 것도 분명 지금쯤 만렙 찍은 난쟁이들이 다 채워 놨을 거 같기도 해요.

하지만 내 대답에 벨라돈나는 도통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멀쩡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데이지뿐이었다. 내가 괜찮으니 다 됐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지 나를 껴안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대롱대롱 몸을 움직였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그래프트한 드라이어드의 힘만으로 끌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벨라돈나에게 맡겨라. 겁에 질릴 필요는 없다. 그녀는 모체의 악명과 다르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뭔데요. 누가 겁에 질렸다는 거야. 내가 주사 맞기 싫어서 병원 안 가는 애처럼 보인다는 거야? 물론 주사는 싫지만.

“생명력 같은 거 소모한 거 아냐. 내렸던 비도 수액 같은 것이 아니고. 정확히 수액 맞을걸? 메스키트가 다이아는 세계수의 증산 작용으로 뿜어져 나온 수액이 결정화 된 것이라고 했으니까.”

“방금… 다이아라고 했어요?”

벨라돈나가 되물었고 이를 엿들은 멜로우의 어깨가 빗방울을 피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엘더는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마주하게 되어 버린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주인님! 다이아를 더 쓰실 건가요?]

귀신같다. 어떻게 내가 말한 다이아라는 단어를 그렇게 귀신같이 캐치해 내지. 내 시리는 가끔 못 알아듣던데.

난쟁이들은 내 입 옆에 도청기라도 달아 둔 건가? 내가 이럴 줄 알고 다이아라는 단어는 열심히 말하기를 피했는데.

핸드폰을 보니 난쟁이들이 스톤헨지 모드 창을 옆으로 낑낑대며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방해라는 것처럼. 아니 시스템 창을 그렇게 멋대로 옮길 수도 있어?

<무한 다이아>의 게임 화면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옆에서부터 움찔움찔 나타났다.

모처럼 만난 다이아 수레는… 어딘가 모습이 좀 달랐다. 불법 개조한 자동차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 수레는 초면인데요. 거대한 수도꼭지가 수레 정중앙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래로 내 다이아 지하 금고로 향하는 곳에서부터 거대한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주인님! 준비됐어요!]

[주인님! 아까처럼 또 해 주세요!]

[주인님! 한 번에 다이아를 많이 요구하셔서 수레를 엎어 버렸어요! 이젠 엎지 않아도 다이아를 많이 가져가실 수 있어요!]

[주인님! 많이 가져가실 수 있으셨으면서 왜 그동안 가져가지 않으신 거예요? 더 가져가세요!]

…다이아를 물 쓰듯 쓰라는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수도꼭지를 박아 넣을 줄은 몰랐지. 틀면 나오는 다이아라니.

“정말 아까 비처럼 내린 힘의 근원이… 다이아란 말씀이신가요?”

내가 난쟁이들의 어이없는 스케일에 할 말을 잃고 핸드폰만 멍하니 보고 있자, 벨라돈나가 힘을 주어 되물었다. 그리고 곧 다른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도 이 소리를 제대로 듣게 되었다.

뭐래? 다이아라고 하지 않았어? 다이아가 여기서 왜 나와? 드라이어드들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의문을 담아 열심히 웅성거렸다.

“다이아 맞을걸요. 아, 잘 보니 숫자가 확 줄었네. 다이아가 맞네.”

만 자리 단위의 숫자가 9가 아니었다. 그마저도 수레를 톡톡 두드리니 수도꼭지에서 다이아가 와르르 지하 창고로 쏟아지며 다시 9가 되었다.

난쟁이들은 펌프질을 하며, 지하 창고로부터 고무호스를 통해 다이아를 다시 수레로 끌어 올리며 그게 아니라고 아우성을 쳤다.

수레를 비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며 다이렉트로 지하 창고에서 끌어 올려 줄 테니 가져가라며 열심히 어필을 했다. 내가 행여나 발견을 못 했을까 봐 고무호스까지 가리키면서.

츄라이, 츄라이, 베이비 원 몰 타임. 또 해 봐여, 또. 도트 난쟁이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빗방울… 모두가… 다이아의 힘이라고…?”

그럼그럼. 만 자리 단위의 다이아가 날아간 엘더와 나의 합작이지. 엘더는 더 듣기 싫은지 눈을 질끈 감았다. 내 긍정의 눈짓에 멜로우의 얼굴이 이름처럼 파랗게 질려 갔다.

“내가 레벨은… 그래, 영혼의 한계는 너보다 못해도.”

집게손가락과 엄지를 둥글게 붙였다.

“요게 많거든. 엄청. 다이아 비를 맞아 보니까 어때? 아직도 내가 형편없어 보여?”

시들링의 눈을 똑똑히 보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해 주었다. 제가 쪼렙이어도 자본이 고렙입니다. 알아서 잘 커 왔고 잘 크고 있으니 신경은 꺼 주시져.

“나 시들링보다 다이아 많은 드루이드 처음 봤어.”

“우리 시들링이 불 잡고 의뢰도 받아서 모은 다이아도 많은데…. 좀 전의 전투에서의 그 힘은 우리가 감히 많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 생명의 비가 내렸어. 드루이드가 인위적으로 그래프트 힘으로 비를 내렸다고. 넓은 지역에. 그것도 오랫동안.”

애써 귀를 닫으려는 엘더가 안쓰러워 보여서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엘더 어린이, 여기 보세요. 뭐 어쩌라는 눈빛이 스쳤다.

이거 안 보이니? 산더미만큼 수레에 쌓여 있는 다이아와 수도꼭지를 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난쟁이들이. 너에겐 이게 블랙 카드쯤으로 보여야 할 텐데.

내 카드는 ‘BLACK’, 무한대로 싹 긁어 버려.

“월렛은 왜?”

“뭐 안 보여? 네가 좀 침울해 보여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보여 주려고 했는데.”

“그냥 까만 화면이잖아.”

뭐야? <무한 다이아> 창은 나밖에 안 보여?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엘더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그가 내 의도를 읽고 귀찮은 표정을 하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왜?”

엘더의 후드를 잡고… 월렛을 집어넣고… 흔들어 주었다.

쉐킷. 작정한 난쟁이들이 쏟아 내는 다이아가 후드 밖으로 다 넘쳐 흘렀다.

“그래프트 수고했어. 이건 선물! 비로 다 뿌렸다고 암울해하지 말고! 난 다이아 많으니까 갖고 싶으면 말해!”

엘더가 묵직해진 후드를 양손으로 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는 것을 봤다.

그래, 웃어라. 넌 예쁘니까 웃으면 더 예뻐.

“그 보스 처리하고 나온 다이아는 다 가지세요. 보다시피 제가 이렇게 다이아가 많습니다. 전부 챙기시고 우리 각자 갈 길 가요.”

카돈이 내가 엘더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엘더는 엘더답게도 내가 그렇게 다이아를 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 보상까지 탐내며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이, 저거 언제 다 줍고 있겠니? 쟤들 다이아 줍느라 정신 팔렸을 때, 우린 2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자.

또 시들링이 무슨 오지랖을 부려서 갈 길 막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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