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604)

솟아오르는 바위들에 드라이어드들은 재빨리 우위를 점유하여 뛰어올라 섰다. 저건 또 무슨 스킬이야? 땅에서 갑자기 두더지처럼 바위가 왜 솟아? 뭔 짓을 한 거야?

“멜로우!”

시들링은 뒤이어 블루 멜로우를 불렀다.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아니었던 탓인지 이리저리 불을 피하느라 바빴던 그 드라이어드는 재빨리 다리를 놀려 시들링에게 달려갔다.

역시나 벨라돈나처럼 그와 가까워지자마자 그에게 손을 뻗었고 순식간에 땅에 푸른 잔디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신발에 닿자마자 형상이 흐릿해지는 것이 진짜 잔디는 아닌 것 같았다.

“저게 뭐야? 지금 뭐 하는 거야? 환각이야?”

달려오던 불이 바위에 가로막힌 틈을 타 엘더에게 달려가 물었다.

“영역 선포야. 드루이드의 능력으로 아티팩트를 밖으로 불러와 필드의 일부분을 드라이어드들에게 맞는 자생지 환경으로 바꾸는 거야. 자신의 자생지에서 드라이어드는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으니까. 한 번에 둘이나 중첩할 수 있다니. 저 드루이드 영혼의 한계 크기가 대체 어느 정도야?”

“와… 엄청나네.”

너 진짜 레벨만큼 대단한 놈 맞았구나. 나도 레벨 높아지면 저거 할 수 있는 거야?

드루이드가 그저 드라이어드에게 작은 세계수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저런 것도 해 줄 수 있었구나. 방금 어떻게 했지? 저건 언젠가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걸까?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배워 두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시들링이 필드 바꿔 줬으니 서둘러!”

“아까부터… 노력하고… 있어….”

바위 위에서 벨라돈나와 칼미아가 날아다녔다. 둘은 좀 전과 다르게 무기를 이용하여 휘두르거나 쏘는 족족 불을 터뜨렸다.

바위는 둘의 자생지와 관련이 있구나.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블루 멜로우에게 소리를 쳤다. 무언가를 채근하는 듯했다.

블루 멜로우는 시들링의 보호를 받으며 수정구를 높이 들었다. 수정구의 색과 닮은 푸른빛이 오로라처럼 퍼지며 그의 자주색 머리칼이 팔랑팔랑 나부꼈다.

놀랍게도 필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우리 측의 데이지와 엘더도 마찬가지였다. 엘더의 광역 힐이 더욱 거세졌음은 물론… 데이지가 반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의 풀들은 노멀 필드 특화였구나.

“아직 멀었어?”

“힘 쓰는 것들이… 좀 더 버텨 봐…. 그것도 못 버텨서… 어디 쓰겠어…?”

왁왁거리며 소리치는 드라이어드들에 비해 멜로우는 꽤나 태평해 보였다. 저들이 하려는 무언가를 눈치챈 메스키트가 전면에 나섰다.

블루 멜로우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래를 쏘아 불의 주의를 전부 자신에게 몰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으로 퍼졌던 불들이 죄다 메스키트에게 몰려가며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의 전력도 한곳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방어형도 부럽네…. 좀 본받아 봐라….”

“불 앞에 나서면 1분도 못 버티는 게! 입만 살아서!”

찡그린 표정과 달리, 그 상황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멜로우에게 페리윙클이 신경질적으로 불을 채찍질하며 소리쳤다. 갈기갈기 터져 나가는 불의 모습이 꼭 멜로우를 대신한 것처럼 보였다.

“본받겠습니다!”

반면 카돈은 의지를 불태우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메스키트에게 몰려드는 불에 착실히 가시가 박힌 몽둥이로 후려치며, 열심히 메스키트를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다.

아, 쟤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우리 메스키트야!

“넌 공격형이잖아! 멍청아!”

페리윙클의 채찍이 의도적으로 카돈을 스쳐 불을 찢는 것이 보였다.

순간 향긋한 허브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몽글몽글 떠다니는, 멜로우의 수정구를 닮은 물방울 속에 불에 그을린 재들이 다닥다닥 엉겨 붙는 것이 보였다.

“잿가루가 물 위로 떴어…. 잎의 종류가… 다행히 내가 아는 것들이야…. 아주 포식을 했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뭐부터 들을래…?”

“저요! 좋은 소식이요!”

대체 이 상황에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는데? 희망이라도 좀 갖자.

시들링처럼 드라이어드와 같이 나서서 전투할 능력도 없는 나는 이중 가장 안전해 보이는 엘더의 옆에 찰싹 붙어서 소리쳤다.

“지금 나온 놈들은… 노멀이 여섯… 레어가 셋이야…. 지금 우리의 수준이면…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어…. 특수한 힘을… 낼 만한 것들도… 안 보여… 벨라돈나, 주술을 써.”

메스키트 쪽으로 가세했던 벨라돈나가 그 말에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빠진 자리를 곧장 칼미아의 탄환이 채우며 메스키트가 방어에 힘을 쓰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벨라돈나는 시들링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난데없이 무기를 시들링에게 넘겼다.

시들링이 그녀의 무기를 쥐자마자 나는 또 한 번 기이한 현상을 보았다. 벨라돈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검보랏빛 종 모양의 꽃들이 피어났다.

그것들은 줄기를 쭉 뻗어 시들링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시들링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꽃줄기에 둘러싸인 그가 갑자기 커다란 나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식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며 머리가 뜨거워졌다.

시들링에게 덧입혀진 나무의 형상의 나뭇잎이 검게 물들어 갔다. 시들링이 벨라돈나의 무기를 휘두르자 사방에서 검은 구슬들이 생겨나 일제히 메스키트에게 몰려 있는 불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구슬은 닿기도 전에 검은 액체를 내뿜으며 터졌고, 액체에 맞은 불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더니 타오르는 화염의 기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용케 데이지에게서 첫 킬이 터졌다. 동시에 칼미아가 폭풍처럼 쏟아 내는 탄환에 멈춘 모든 불이 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훅 꺼져 버렸다.

“저건 또 뭐야?”

레벨 높은 드루이드는 드라이어드의 힘도 쓰네. 대체 드루이드의 힘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거야? 이러면 쪼렙인 나와의 격차가 엄청 커 보이잖아.

‘너는 이런 거 못 하지?’ 하고 말하는 것 같은데!

하늘 높이 용솟음쳤던 불길이 훅 내려앉고 다시 마차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차가 다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는 건가? 메스키트가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내 곁으로 복귀했다.

“내 주인, 제이. 저건 그래프트(Graft)예요. 드루이드의 영혼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가지를 접목해서 힘을 증폭시킨 거예요. 제이가 분명 언젠가는 쓸 수 있는 힘이에요.”

메스키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행여 내가 풀이 죽었을까 봐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조금 열등감을 느끼긴 했지만 언젠간 나도 쓸 수 있는 힘이니까 괜찮아! 내가 빨리 커서 메스키트의 랜스를 휘둘러 볼게!

마차가 또 한 번 문을 활짝 열었다. 뿜어져 나오는 불길의 기세가 앞의 것보다 더했다. 음…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잠깐. 좋은 소식은 들었고. 설마 나쁜 소식이?

내 눈빛을 받은 멜로우가 전부 사라지고 딱 하나 남은 파란 물방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안 나온 놈 중에… 유니크 등급이 있는 것 같아…. 상황을 봐서 전부… 도망가야 할 수도 있어…. 차폐막을 뚫을 수 있다면….”

“도망은 치지 않는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피해가 커져.”

어느새 나타난 벨라돈나에게 무기를 넘겨주며 시들링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가긴 어딜 가. 여기까지 왔는데 보스 뒈지는 건 보고 가야지! 이만큼 애먹였으면 보상이 어마어마할 거야!

“지금 나오는 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멜로우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칼미아의 것과 같은 탄환들이 마차에서부터 빗발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탄환이 아니었다. 씨앗?

“닿으면 안 돼!”

메스키트가 방패를 든 우리의 상황과 달리, 방어형이 없는 저쪽은 엘더의 광역 힐에도 곧바로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다들 온몸 구석구석이 타들어 간 모습이 처참했다.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씨앗이 떨어진 곳 주변으로 작고 붉은 원이 생기고 곧이어 펑 하는 소리를 내며 불꽃이 터졌다.

땅은 원을 보고 피하면 됐지만 몸에 곧바로 닿는 씨앗은 터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시들링이 소환해 낸 아티팩트 필드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온통 터져 나가는 지뢰밭이었다. 차폐막이 좁아졌다. 행동반경이 덩달아 좁아지며 그에 의한 피해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좁은 곳에서 저런 광역 공격은 피할 수 없어!”

페리윙클이 채찍으로 날아오는 씨앗들을 쳐 내곤 있었지만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의 채찍이 손상되어 가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엘더의 광역 힐링은 장비의 손상도까지 복구시켜 줄 순 없었다. 체력을 회복시켜 주어도 장비가 이 속도로 아작 나기 시작하면,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우리였다.

메스키트의 방어 덕에 우린 직접적인 피해가 덜했지만, 저쪽의 쓸 만한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이 리타이어되면, 살아남는다 해도 뒷일이 암울했다.

우린 막는 데 급급해서 공격할 시도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설상가상으로 마차가 다시 전방을 향해 용암을 뿜기 시작했다. 유니크 등급을 삼킨 불의 광역기도 피해야 하고 마차의 공격도 피해야 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유니크가 저 정도면…. 메스키트를 삼킨 불은 재앙 그 자체일 거라는 시들링의 말이 지금에서야 피부로 와 닿았다.

“엘더! 더 숨기고 있는 스킬 없어? 아껴 둔 스킬 없어? 너 완전 쩌는 드라이어드잖아! 힐러가 너뿐이라 네가 마지막 희망이야!”

너희 드루이드는 회복형 하나 섭외 못 하고 뭐 했다니! 우리 애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광역 힐 넣는 거 안 보여?

사실 이렇게 엘더를 채근해도 쟤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들 피하기 급급할 때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쭉 같은 기세를 유지하는 것이 엘더였다.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고 피어오르는 꽃잎들은 꽃가지에서 막 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전히 생생했다.

이 정도의 끔찍한 공격 속에서 전멸하지 않은 것은 엘더의 공이 컸다.

쓰러질 것 같은 드라이어드들도 다시 일으켜 세운다. 팀의 서포트를 책임지는 힐러는 항상 맨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낸다.

이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엘더의 존재 자체가 행운이고 희망이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까와 같은 울렁거림이 울컥 솟아올랐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언제부터 엘더의 스태프가 저렇게 반짝거렸지? 주위가 점멸한 것처럼 오롯이 엘더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힘을 집중하느라 질끈 감겨 있던 엘더의 눈이 무겁게 열렸다. 녹음을 어둑하게 담은 에메랄드빛 눈과 마주하자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느낌. 그거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았어. 드디어 내가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온 거야!

엘더의 모습에 그를 꼭 닮은 예쁜 하얀 꽃가지가 투영되었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엘더가 스태프를 땅에서 뽑는 순간 성난 바다의 표면처럼 넘실대던 빛이 뚝 끊겨 버렸다. 절망적인 얼굴로 우릴 보던 드라이어드들의 눈이 커졌다. 엘더의 스태프가 내게 넘어왔다.

오롯이 하나의 거대한 나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뻗는 팔이 나뭇가지와 같고 딛고 선 다리가 나무뿌리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나를 항상 작은 세계수라고 불렀던 것이 마치 내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엘더의 스태프를 쥔 순간부터 내 몸에서 그가 항상 풍기던 달콤한 꽃내음이 풍기는 듯했다. 내 몸의 일부가 엘더 플라워가 된 것 같았다. 내 영혼의 개화.

하늘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광기도 잠재울 만큼 급속도로 주변이 어두워졌다. 몰려온 구름 떼에서 봇물 터지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드루이드인 나와 엘더 플라워의 그래프트, 연계 스킬. 푸른빛을 띠는 물방울이 한여름의 장마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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