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거 위험한데….”
로즈우드가 황급히 바이올린을 턱밑에 끼우며 말했다.
그가 활로 가볍게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내자마자 진한 장미 향이 훅 퍼졌다. 무형의 향기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마치 거미줄처럼 엉겨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공기는 엘더가 내게 방어막을 집중적으로 치며 나아졌다.
내게 몰빵하면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다들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방어막의 혜택을 받는 것은 나뿐이었다. 심지어 시전자인 엘더도 얇은 방어막에 의존한 채 열기를 견디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라. 너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의를 끌겠다.”
누구 마음대로 도망가라 마라야. 내가 언제 너에게 그런 걸 부탁하기라도 했어?
마치 내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구는 시들링에게 짜증이 났다.
레벨 좀 높다고, 아니 좀 많이 높다고 나를 무시하나 본데! 내가 먼저 너에게 ‘님, 여기 사냥터 제가 놀기엔 레벨이 좀 그렇나엽?’ 하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애초에 위험하다고 말려서 들을 거였으면, 테라리움 밖을 나오며 메스키트가 경고할 때부터 안 왔어!
시들링의 말을 듣고 내가 내빼기라도 하면 내 드라이어드들이 실력이 낮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실력이 허접한 건 나지, 내 드라이어드들이 아냐.
갑자기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연재해라기보다는 무언가 좀 다른데? 마치 기차가 지나가는 근처에 서 있는 기분이야.
지진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아주 묵직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우리가 서 있던 터 주위로 순식간에 화르륵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의 벽이 솟아올랐다.
꼭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차폐막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부에서 나가는 것을 막는 거겠지. 사냥감을 중앙에 몰아넣고 가두는 것처럼.
우린 마치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아씨… 이거 평소의 불을 상대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데…?
뭐…. 도망가려는 마음을 먹었다 해도 이미 늦었다.
“메스키트를 써라. 그녀라면 불에 내성이 높으니 불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거다.”
“내 드라이어드를 네가 뭔데 쓰라 마라야?”
“이미 늦었어! 시들링, 괜히 드루이드들끼리 싸워서 힘 빼지 마. 지금은 협력해야 될 때야!”
“그래, 차라리 근처에 두고 지키는 것이 나을 거야.”
벨라돈나와 칼미아가 말했다. 누가 가만히 보호만 받는대? 내 드라이어드들이 얼마나 뛰어난데!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악! 저게 뭐야?
메스키트가 나와 엘더, 데이지를 몰아 뒤로 세우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든 방패에서부터 모래색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몸집을 불렸다.
빛으로 감싸인 거대한 방패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앞을 막았다.
그건 마차였다. 불에 활활 타고 있는 마차. 저승 마차, 지옥에서 막 올라온 마차가 분명했다. 크기도 우리가 발견했던 전복된 마차보다 훨씬 컸다. 집채만 한 마차, 불에 활활 타며 지나온 모든 길을 용암으로 초토화시킨 마차.
불은 생태계 최강의 모습을 따라 변모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사물도 쳐 주는 거였어? 설마 전복된 마차의 드라이어드를 전멸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불이 저거?
시발 이거 느낌이 꼭 보스전… 레이드…?
게임에서, 보스전을 솔로 플레이 하려면 고인 물이라도 어지간히 고여선 안 된다.
고이다 못해 석유쯤은 되어야 일당백 하면서 보스를 독식하는 것이다. 저걸 혼자 잡기에는 난 고이기는커녕 막 영근 이슬 같은 존재인데.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이랑 파티라도 맺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혹시 레벨도 높아 보이는데 혼자 잡을 수 있는 거 아냐? 같이 잡자고 하면 자기 혼자 잡겠다고 날 무시할 것 같기도 한데?
시들링은 왠지 협력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독선적인 놈처럼 보였다.
우리가 애먹었던 불을 여유롭게 싹 쓸어 간 드라이어드들일 텐데도 마차를 마주하자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아하, 그쪽도 저 마차 보스가 힘든 상대가 맞구나? 동질감 느끼기엔 이쪽의 불안감의 무게가 더 컸다.
아씨, 진짜 초보자 퀘스트가 아니었나 봐. 저건 분명 난이도 헬 모드 끝판왕! 보스 몬스터가 분명해. 거기에 패턴 사전 공략도 숙지 못하고 뛰어든 최악의 상황.
“시들링, 상황이 심각해. 저 드루이드분께 협력을 요청해. 이 전투를 절대 상처 없이 끝낼 순 없어. 저쪽엔 고급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있는 조합이고, 나는 저쪽이 아군으로 묶이지 않은 이상 행동에 제약이 생겨.”
고민 중에 저쪽이 먼저 숙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저 드라이어드의 의견일 뿐, 주인이 되는 드루이드의 표정이 썩 탐탁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작잖아.”
“정신 차려! 저분은 드루이드야! 드라이어드가 아니라고! 널 키운 드라이어드의 오랜 가르침 때문에 묘목은 보호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본데, 이건 달라!”
“저기 진짜 묘목도 있잖아?”
“우리 데이지 무시하지 마!”
우리 애는 묘목이 아니라 묘목처럼 보일 뿐이라고 항변하려는데 마차에서 선제공격이 터져 나왔다.
레드 카펫처럼 일직선으로 마차가 뿜어낸 용암의 강이 뻗어 나왔다. 메스키트는 애써 막으려 하지 않고 우리를 끌어 옆으로 몸을 피했다.
공격은 쿨타임이 없었다. 바라보는 방향으로 쭉쭉 용암을 뿜어 대며 모여 있던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흩어 놓았다.
나는 데이지의 줄기에 묶인 채 아이의 순발력 덕에 끈질기게 메스키트에게 붙어 있는 중이었다.
시들링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피하다 우리 쪽으로 오게 될 뻔한 벨라돈나가 멈춰 서서 용암에 맞는 것을 택하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드디어 명중을 성공한 마차가 꿈틀대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내 주인, 제이. 그녀는 필드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주위를 해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군요. 비슷한 능력을 쓰는 종들을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따로 행동할수록 그녀의 행동은 크게 제약될 거예요.”
“야! 들었지? 고집 부리지 말고 파티 신청이나 해! 너네 드라이어드 다쳤잖아!”
난 신청하는 방법 몰라.
난데없이 손목의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진동했고 핸드폰이 큰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 타이밍에? 난쟁이들이 날 부를 리는 없고. 나는 엘더가 날 들쳐 매고 피하든 말든 핸드폰을 꺼내서 보았다.
검은 화면에 붉은 글씨가 커다랗게 박혀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월렛 모드 변경. 스톤헨지 모드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