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04)

드루이드 하나에 드라이어드가 여섯. 그것도 하나같이 다 세 보이는 드라이어드들. 무엇보다 드루이드 자체도 세 보였다. 메스키트처럼 묵직한 갑옷도 입고 있고 말이야.

들고 다니는 것은 핸드폰밖에 없는 나와 달리 그럴싸한 무기도 있네?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건가?

“저긴 우리의 드루이드인 시들링, 그 옆의 바이올린을 든 자는 브라질리안 로즈우드, 허리에 권총을 꽂은 자는 칼미아 포레스트의 우성종인 칼미아 라티폴리아입니다. 채찍을 든 자는 페리윙클, 수정구를 든 자는 블루 멜로우죠. 그리고 좀 전부터 당신의 방패를 든 드라이어드에게서 눈을 못 떼는 자가 사막의 왕자 카돈이에요. 같은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를 마주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나 보군요.”

카돈이라는 드라이어드를 소개할 때의 그녀는 억양이 좀 더 강해졌다. 아마 실례일 정도로 메스키트를 노려보는 태도에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저는 드루이드 제이예요. 테라리움 밖에서 드루이드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 이쪽은 벨벳 메스키트, 여기 작은 아이는 레드 데이지고….”

“저쪽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요. 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모체를 가지고 있는 드라이어드니까요. 전에 만났던 동족의 드라이어드도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했죠. 엘더 플라워 맞죠?”

오, 엘더 예쁜 건 저쪽에서도 유명한가 보네. 나는 엘더 플라워란 꽃을 여기 와서 처음 들어 봤는데 이쪽 세계에선 엘더가 연예인급인가 보구나. 엘더 얼굴이 오죽 예뻐야지.

엘더의 표정이 기고만장해졌다. 혹시 전에 만났던 다른 엘더 플라워 종족도 인성이 저런가요?

“그나저나 메스키트라니. 역시 예상대로 대단한 드라이어드였군요. 모습을 보고 긴가민가했지만 이름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정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필드의….”

“저도 영광이랍니다. 대단한 팀을 이루고 있네요.”

어쩐지 메스키트가 벨라돈나의 말을 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스키트가 확실히 스페셜급의 대단한 드라이어드긴 하지만 벨라돈나의 말을 들어 보면 더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걸까?

갑자기 뒤의 카돈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손을 뻗으며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저쪽의 드루이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제 말은 끝났지?”

그의 말에 벨라돈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이로써 셋이 끝났네요. 제이 님이라고 하셨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드루이드, 시들링은… 태어났을 때부터 드라이어드들과 생활하여 인간들의 사회생활에 익숙지 않답니다. 사회성이 좀… 떨어지죠. 그래서 우리 부케에선 그가 나서기 전, 먼저 세 명의 드라이어드들이 이야기를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먼저 드라이어드들이 나서서 이야기를 하고 그 주제를 이어받아 시들링이 이야기를 하는 거죠. 먼저 순서의 두 드라이어드가 어이없게 순번을 날려서 그가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춰 이야기할 거란 기대는 못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게 되네요.”

남자는 벨라돈나를 지나쳐 우리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메스키트도 키가 큰데 남자도 밀리지 않을 만큼 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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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마주하니 기세가 대단했다. 꼭 무형의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메스키트를 볼 때 느끼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레벨의 차이를 이렇게 느끼는 걸까? 그게 맞다면 대체 저 드루이드는 레벨이 몇이야?

짙은 밤색의 머리와 심해 같은 푸른 눈, 꽤 준수한 얼굴인데 하도 엘더 얼굴을 보고 지내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었다.

눈썹 부근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상처가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 턱 아래쪽에도 울긋불긋한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흉터가 있고. 많은 전투에서 구른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도 다른 드라이어드들처럼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맞나 보네.

남자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칼미아 드라이어드가 작게 소리쳤다.

“생각을 하고 말해! 되는대로 다 내뱉지 말고!”

저쪽 드라이어드들의 반응이 저러니까 괜히 긴장하게 된다. 아니 얼마나 사회성이 달리면…. 드디어 내게 그가 첫마디를 건넸다.

“작군.”

이건 또 뭐야? 내가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아니 상대적으로 여기 드라이어드들이랑 님이 커서 제가 작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내 키는 평균 이상인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작다니!

“몇 번을 가르쳤지만 드라이어드를 대할 때와 인간을 대할 때는 달라! 상대의 심정을 생각하고 말하란 말이야!”

이번엔 벨라돈나 드라이어드가 멀리서 그에게 질책했다.

“돌아가라. 여긴 너 같이 영혼의 크기가 작은 인간이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못 된다. 지금까진 벨벳 메스키트의 덕을 본 것 같은데 이 이상의 길은 무리다.”

이게…?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이유를 먼저 말하고 너의 의도를 말하면 좀 더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댔잖아! 저번처럼 싸움 나고 싶어? 그 때문에 15번째 테라리움에서 쫓겨날 뻔했잖아!”

칼미아 드라이어드의 목소리가 커졌다. 남자는 그 소리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형편없는 너의 실력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가 죽으면 너의 드라이어드들도 불에게 먹히겠지. 메스키트급의 드라이어드가 먹히면 재앙급 불이 탄생한다. 그러니 왔던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라. 원한다면 호위를 해 주지.”

“뭐? 이 씨….”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막말에 발끈하려는데 벨라돈나 드라이어드가 손짓을 했고 로즈우드 드라이어드가 황급히 뛰어왔다.

그는 날 보고 연신 허리를 숙였다. 칼미아 드라이어드도 뛰어와 남자와 내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그러곤 난처하게 웃으며 죄송하다고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냐며 양해를 구했다.

남자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지만 드라이어드들이 나서서 사과를 하니 일단 참았다.

“시들링, 너도 인간이라 다른 인간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든 행동이 신기하고 재밌겠지. 더군다나 저 드루이드는 네가 오랜만에 만난 인간이고 널 보고 바로 피하지 않은 인간이니까. 하지만 너의 언어는 드라이어드들이 가르쳐 준 것이라 날것 그대로야. 드라이어드들은 드루이드의 모든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아. 하지만 인간은 달라. 그러니까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해서 이야기해야 된다고 몇 번을 가르쳤잖니.”

“형편없다는 말은 쓰지 말랬지?”

로즈우드 드라이어드가 바이올린의 활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남자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칼미아 드라이어드도 그의 말에 덧붙였다.

“생각하고 말한 거야.”

“너 지금 저 메스키트가 랜스 든 거 안 보여? 조금만 더 저 드루이드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면 그녀가 나섰을 거야. 싸움이 났을 수도 있다고! 우리가 쪽수는 많지만 저쪽엔 메스키트는 물론 우리에게 없는 고급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있어. 조합이 너무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부상을 면치 못할 거야.”

칼미아 드라이어드의 말에 메스키트를 보니 어느새 싸늘한 눈을 한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시들링이 좀 더 말을 막 뱉었으면 메스키트가 참지 않았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데이지도 엘더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두 드라이어드에게 남자가 묶여 있는 사이, 아까부터 유달리 존재감을 내뿜던 카돈 드라이어드가 툭 튀어나왔다.

그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대뜸 메스키트 앞에 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선공인가?

“존… 존경합니다!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사막의 수호신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묘목일 때부터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악수 한 번만 해 주세요!”

저건 또 뭐야?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메스키트의 경계가 조금 풀렸다. 정확히는 두 무리 사이에 흐르고 있던 아슬한 분위기가 탁 풀려 버렸다.

“야! 이리 안 와? 내가 저럴 줄 알았어!”

“난… 저럴 것… 같았어….”

페리윙클 드라이어드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고 멜로우 드라이어드는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저쪽 드라이어드들은 주인인 드루이드만큼이나 개성이 넘치네.

“악수가 안 되면 그 랜스로 한 대 때려 주셔도 됩니다! 위대하신 사막의 수호신에게 영광의 상처라니! 데저트 필드 드라이어드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야, 저거 기분 나빠.”

내 말에 메스키트는 카돈 드라이어드를 내쫓기 위해 랜스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고 눈을 꼭 감을 뿐이었다. 더 짜증 나. 더 기분 나빠.

“우린 26번째 테라리움의 의뢰를 받아 28번째 테라리움에 가는 중이야.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보아하니 내가 자는 사이 주변 불을 쓸어 놨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배려였어. 네가 그따위로 말할 만큼 우린 약하지 않아. 더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나도 더 이상의 예의는 지키지 않겠어.”

욕이 먼저 나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멀리서 페리윙클 드라이어드가 채찍을 뻗어 카돈 드라이어드의 목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카돈 드라이어드가 켁켁거리며 끌려가고 칼미아 드라이어드가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소된 28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된 의뢰인가요? 그건… 당신이 받기에는…. 아, 이건 절대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랍니다. 그 의뢰는 우리의 주인과 같이 높은 평가를 받는 드루이드에게 특별히 내려온 의뢰예요. 아직 영혼의 한계가 작은 분껜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의뢰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20번대 테라리움들에선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아무 드루이드나 조사를 보낸 것 같은데 다들 목숨을 잃은 걸로 알고 있어요. 10번대 테라리움에선 그래서 시들링과 같은 평가가 높은 몇몇 드루이드를 선정하여 내려 보낸 것이랍니다. 아직 이곳에 온전히 도착한 것은 우리뿐으로 보이지만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람?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인이 내게 준 초보자 퀘스트가… 알고 보니 난이도가 엄청났다고?

그가 말했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진짜였어?

갑자기 메스키트가 날 끌어안고 뒤로 물러섰다. 저쪽의 드라이어드들도 우리가 향한 방향으로 물러서고 각자 무기를 들었다.

엘더의 방어막이 우리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피부가 녹을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덮쳐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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