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 같은 것을 뚝뚝 흘리면서 매섭게 달려드는데 그때마다 내 발 디딜 곳이 줄어 미친 듯이 피해 도망쳐야 했음은 물론, 디딘 곳이 하필이면 불이 다 태워 버린 자리라 와르르 무너져 내려 간담이 서늘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땅과 달리 하늘의 불은 유능한 메스키트도 바로 반응하기 까다로워서 더 고생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방패에 데이지를 태워 높이 던져 보내고, 하늘로 발사된 데이지가 처리하는 식으로 불의 수를 차분히 줄여 나갔다.
생태계의 최강자 자리를 되찾고 내 기력도 달려서, 몰래 피로 회복제를 까먹고 바위에 기대섰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눕고 싶어질 테고 누우면 눈도 감고 싶어지겠지.
눈 감은 김에 한숨 자고. 답 없는 내 상태를 알기 때문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었다.
아이씨, 그래도 너무 빡세네. 좀비로 세상이 멸망한 아포칼립스 영화 속에 갇힌 기분이야.
어디서 끝도 없이 불이 좀비처럼 튀어나와. 내 유능한 드라이어드들이 아니었으면 초반 영화 시작 5분 만에 죽는 엑스트라가 바로 나였다.
“좀 쉬었다 갈까요, 제이?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마침 이 근처의 불은 방금 것을 끝으로 다 해치운 것 같아요. 한숨 돌려도 될 거예요.”
“미안. 내가 체력이 너무 저질이라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내 주인, 제이. 민폐라니요! 제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저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잊었나요?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우린 힘이 난답니다. 그런 소린 하지 마세요.”
나까짓 게 뭐라고 존재 자체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황송한 소리를…. 나 자신이 이렇게 구제 불능의 체력 쓰레기라는 걸 소름 끼치게 깨닫고 있는데.
당장에 다이아를 투자할 곳도 없는 나는 진짜 뭣도 아닌 인간이네. 정말로 가진 것이라곤 넘치는 다이아뿐인 노답 인간이다, 내가.
다른 드루이드들은 자신을 어떻게 단련하고 있을까? 다들 나처럼 노답 인간은 아니겠지?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나는 쓰레기야, 흑흑. 바위에 얼굴을 묻고 몸을 굴리다가 문득 바위 너머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까맣게 타 버린 덤불 속에 거대한 상자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상자는 아니고 마차?
“오, 나 이상한 거 찾았어! 저기 봐 봐!”
드라이어드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직접 갈 배짱은 없는데 누가 대신 확인 좀 해 주라! 멋대로 나섰다가 불에게 공격당하면 이 무슨 민폐야. 난 내 자신을 잘 아니까 호기심을 참고 자중해야 돼.
메스키트가 내 부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커다란 랜스로 덤불을 걷어 냈다. 다 타 버린 채 형태만 유지하고 있어서 메스키트의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바스락 무너져 내렸다.
“마차네요. 전복된 마차예요.”
“마차가 있었어? 알면 타고 왔을 텐데!”
택시 대신할 것이 생겼다! 말하기 무섭게 메스키트가 그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의 공격에 바로 대응하기 힘들고, 또한 목표물이 커서 불의 타겟이 되기 쉽단다. 그래서 실력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여럿 데려다가 호위를 시켜야 한다고.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저것이라며 랜스 끝으로 가리켰다. 음…. 취소할게요.
“전투가 있었지만… 전멸한 것 같군요. 이 자리를 빨리 떠나야 될 것 같아요. 아마 이곳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불은 무척이나 힘이 강대해져 있을 거예요. 지금은 근처에 그런 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지만 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겠죠.”
드라이어드 하나를 삼켰던 불이 그렇게 기괴한 힘을 썼는데 여럿을 삼킨 불은 얼마나 장난 아닐까.
전복된 마차에서 불에 그을린 화물들이 잔뜩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중엔 위험한 해골 그림이 박혀 있는 상자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위험 물품을 운반하던 마차 같은데…?
메스키트가 당장에 주위엔 불이 없다고 했지. 그럼 살짝 살펴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 죽일 놈의 호기심. 슬쩍 메스키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조심히 마차를 관찰했다.
“어? 상자에 숫자가 있어! 28이면 28번째 테라리움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해골 그림이 있는 상자는 물론 상태가 비교적 온전한 화물들에도 죄다 숫자 28과 함께 희미하게 나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운송되어야 했던 물건인가 보네. 좀 더 용기를 내서 메스키트의 팔을 꼭 끌어안고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우리가 가야 할 곳도 28번째 테라리움인데 정보 좀 얻으면 좋잖아?
해골 그림의 상자는 뚜껑이 박살 난 채였고 안에서 까만 흙이 흘러나와 있었다. 흙 속에 바짝 마른 식물들이 난잡하게 섞인 것이 보였다.
꽃? 식물? 안에 든 것은 식물이었나? 하지만 너무 타 버려서 식물의 종류까지 알아보긴 힘들어 보였다.
대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뭘 운반하려던 걸까?
화물들은 재가 된 것은 물론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아 더 살펴보는 것은 무리였다.
메스키트의 조언에 따라 최대한 그 불과 마주치지 않길 기원하며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오르막길이 드디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이젠 제발 아래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기를. 그리고 쌍갈랫길과 마주했다.
탁 트인 큰길을 따라 걷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특이 지형이었다. 한쪽은 아래로 가파르고 딱딱해 보이는 덤불이 우거진 곳이고 다른 한쪽은 장애물이 없지만 다시 경사가 시작되는 곳.
엘더는 지도를 살피는 수고 없이 어느 쪽으로 가든 28번째 테라리움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내리막길을 선택하고 싶지만 가는 길이 험난해 보였다. 저런 곳에서 불과 마주치면 행동에 제약을 받겠지. 어떻게 할까?
“인기척이 느껴져요.”
메스키트가 우릴 뒤로 물렸다. 소리는 왼쪽의 내리막길. 덤불이 파드득 흔들리며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 사람인가? 메스키트의 경계가 한풀 꺾였다.
“분명 도망쳐 온 흔적은 있지만 몇 년도 더 됐어. 괜한 수고를 했어.”
“발이 아주 빨랐던 드라이어드 같아. 그러니 혼자 살아남았겠지. 하지만 결국 목적은 달성 못한 것 같은데?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잖아. 남은 건 다 타 버렸고.”
“잠깐! 앞에 인기척이 느껴져.”
대치 상태가 짧게 이어졌다가 끝났다. 먼저 반응을 보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쪽이었다.
우리가 해가 되지 않는 상대라고 파악한 것일까? 넷뿐인 우리와 다르게 저쪽은 수가 꽤 되었다.
인영들이 계속해서 덤불을 헤치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화려한 외향들. 전부 드라이어드인가?
“아… 시들링이 그날 밤에 발견했다던 무리가 저기였나 본데.”
연보라색 머리에 머리색과 같은 꽃이 장식된 적갈색의 연미복, 키가 훌쩍 크고 피부가 어두우며 커다란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이상적인 조합을 하고 있네. 작은 영혼의 크기를 한 드루이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최상의 조합이야. 하지만 많은 운이 따랐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듬성듬성 하얀 머리칼이 섞인 연분홍색의 긴 머리에 품이 큰 붉은색 상의, 연분홍 꽃가지가 여러 갈래로 엮인 등 뒤의 날개, 허리춤에 두 개의 권총을 꽃아 넣은 여자가 말했다.
날개가 있단 건 단델리온과 같은 포레스트의 왕이란 걸까?
내가 저쪽을 세세하게 뜯어보며 관찰하는 만큼 저쪽도 우리를 가늠해 보는 듯했다. 둘의 이야기가 끝나고 뒤의 나머지 넷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채찍을 든 푸른 머리의 남자와 거대한 가시 몽둥이를 든 블론드의 남자, 창인지 스태프인지 모를 기다란 무기를 들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 들고 있는 푸른 수정구와 똑같은 짙푸른 눈 색이 인상적인 자주색 머리의 남자까지.
형형색색, 다양하고 화려한 외모의 사람들이 여섯이라니. 참 많기도 하지. 눈도 호강하네.
아, 제일 뒤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다들 모체를 나타내는 꽃이나 잎으로 하나씩 치장한 걸 보면 드라이어드가 맞는 것 같은데.
제일 뒤에 선, 은색 갑옷을 입고 거대한 검을 들고 있는 키가 큰 남자만 유일하게 식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이 이 드라이어드들의 드루이드구나.
“자, 한 명 남았어. 누가 말할 거야?”
연분홍색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제일 뒤에 선 남성을 제외한 드라이어드를 쭉 훑어보았다.
메스키트를 뚫어져라 주시하는 블론드의 남자를 제외하고선 죄다 자신이 말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그러다 승자가 정해졌다.
“쓸데없이 기회를 낭비했구나. 소개를 먼저 했어야지. 저 드루이드분께서 당황하시지 않니?”
검은 머리의 여자가 기다란 무기를 휙 휘둘러 옆의 드라이어드들을 제지하고 앞으로 나왔다.
화려한 검은 로브를 입었고, 검고 작은 종 모양 꽃들이 허리띠 장식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꽃들이 모빌처럼 흔들거렸다.
걸어 나오던 여자는 적당히 먼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 섰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벨라돈나. 현재 이 부케의 메인을 맡고 있죠. 우리 사이의 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요. 제 모체의 특성상 부케가 아닌 분들껜 위험할 수 있으니 먼 거리에서 당신들과 마주하는 걸 이해해 주길 바라요.”
“아, 네에.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을 시작할 쯤부터 맨 뒤의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시들링, 아직이야. 내 말이 다 끝나지 않았어.”
성큼성큼 걸어오던 남자는 그녀의 제지에 입을 굳게 다물고 멈춰 섰다.
“아직 영혼의 한계가 작아 보이는데 이런 험난한 곳을 뚫고 오시다니 놀라울 따름이네요. 우리 부케는 의뢰를 받아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던 참이었죠.”
“오… 우린 26번째에서 왔어요!”
“역시 그날 밤에 저희가 만났던 무리가 당신들이셨군요.”
그렇다는 건 앞서 사냥터를 쓸어 간 드루이드는 저쪽이었나 보군. 어떻게 생겼나 궁금은 했는데 마주하니 정말 대단해 보이네. 왕으로 보이는 드라이어드도 있고 우리보다 수도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