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604)

“이건 산이 아닌데….”

엘더가 끝까지 내 주장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건 산이야. 평지보다 솟았으면 다 산이야.

나는 민들레꽃의 향긋한 향기를 맡으며 꽃이 드문 곳에 풀썩 드러누웠다. 눕기만 해도 피로가 점점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데이지는 민들레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드라이어드였다. 연예인 버금가는 인기였다.

“밖의 불도 다 네가 해치운 거야? 대단하다.”

데이지는 머리처럼 빨개진 볼을 하고 메스키트와 엘더가 자신보다 더 대단했음을 피력했지만 아이들은 모두 필터링해서 듣는 것 같았다.

재잘재잘 말하는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한 명쯤은 내 드라이어드로 영혼의 계약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 생각이 들기도 전에 단델리온이 먼저 말했다. 데이지를 따라 모험을 떠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몇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묘목 상태의 아이들은 모험을 떠나기엔 너무 미성숙해서 안 되기 때문에 내가 단호하게 거절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졸라도 내가 끊어 내야 한다고.

데이지와 다르게 갓 태어난 묘목 아이들은 너무 연약하며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해서 드루이드의 뜻과 다르게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물며 작은 세계수와 다름이 없어서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드루이드를 비호하기엔 아무런 힘이나 경험도 없었다.

포레스트에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성숙한 상태가 되면 상관이 없지만, 민들레 드라이어드는 다 자라기 전에 세계수의 품으로 갈 확률이 높다고 했다. 지금 군락지의 드라이어들이 다 작은 크기인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데이지는 성숙한 개체로 개화했으나 힘을 잃어 묘목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없다며 단델리온이 이미 한차례 아이들을 타일렀다.

다이아 길을 깔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도 왕이나 다름없는 보호자가 동의를 하지 않으니 안 될 일이었다. 또한 단델리온은 메스키트처럼 내 영혼의 한계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애써 민들레 아이를 데려가는 것보다 다른 성숙한 드라이어드를 데려가 비호를 받는 것이 낫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저 내 작은 욕심이었을 뿐이었다.

작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데이지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마지막 전투 때 시무룩했던 표정이 마음에 남아서, 단델리온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인 데이지가 지금은 훌훌 털어 버리고 저렇게 즐거워하고 있으니 나도 털어 내야지.

아니 지금 내가 내 체력을 걱정하며 산에 오르는 것을 투정 부릴 때가 아니었잖아? 앞으로 갈 길에 지금보다 더한 산이 수없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반성하자.

지금의 나는 평소의 나와 같으면 안 돼. 지금의 나는 내 드라이어드들을 이끄는 드루이드야. 나는 이 세계에 맞춰 바뀌고 성장해야 해.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지. 투정도 부리지 말고. 그렇게 다짐했다.

해가 떠 있는 순간만큼은 비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놀던 민들레 아이들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숨자마자 놀랄 정도로 차분해졌다.

단델리온의 주위로 옹기종기 모이더니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를 ASMR 삼아 정신을 놓으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곤히 잠들어 버렸다.

진짜 음 소거 버튼을 누른 줄 알았다.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나 홀로 렉 걸려서 재생이 정지된 줄 알았다.

활짝 펴서 노란 은하수 속에 있다고 착각할 만큼 만개했던 노란 꽃들이 봉오리를 여미고 잠에 빠져들었다. 낮의 별들은 밤의 별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들은 원래 잠잘 시간이 되어도 칭얼거리며 버티다가 재우다 지친 보호자와 함께 잠드는 것이 정설 아니었나. 때가 되니까 거짓말처럼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 중 유일하게 잠들지 않은 자는 단델리온뿐이었다. 드라이어드는 잠을 자지 않아도 먹을 필요도 없다고 했던 소리는 오직 민들레 중 그녀에게만 적용되는 듯했다.

“아이들은 아직 연약하니까요. 또한 제게 영혼을 의탁한 만큼 지금은 인간 아이와 다름없답니다. 모체의 본능에 충실하죠.”

그녀의 주위로 모여 단잠에 빠져든 민들레 아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그렇게 말했다. 조곤조곤 자장가처럼 낮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목소리로.

메스키트가 혹시 몰라서 군락지 주변을 한 번 순찰하고 돌아왔다. 그러곤 아이들의 꿈나라 여정에 함께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몇 번 그녀가 군락지 중심을 나가는 것의 횟수를 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아침이 기대되면 일어나야 할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왜 나는 적용이 안 되는 건데요? 의지가 강하면 할 수 있다면서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 망했다…. 이런 기분이 들면서 일어나면 백 퍼센트 망한 것이다.

이 기분은…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아늑한 집을 벗어나 평일 아침마다 꼭 떠나야 하는 배움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 출발 시간을 심하게 오버했음을 조상이 물을 끼얹으며 알려 줄 때의 그것이었다.

일어나라 잠꾸러기야. 학업을 늦잠으로 게을리해서야 되겠느냐. 우리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갈고닦은 유서 깊은 집안으로, 너같이 누가 깨우기 전까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배움의 의지가 약한 후손은 처음이구나.

내버려 두면 저녁까지 잘 것 같아서 보다 못한 내가 깨워 주느니라. 하지만 이미 늦어서 오지게 혼나겠구나.

이왕 깨울 거면 일찍 깨워 주면 좋겠는데 왜 항상 화들짝 일어나 봤자 이미 다 망했을 때 깨워 주는데요?

아침에 지저귀는 참새들 대신 민들레 아이들이 꺄르르 재잘거리고 있었다. 다들 일어나 있었구나.

전날 밤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또 늦잠을 잤다. 퀭한 눈을 하고 샘까지 기어가 얼굴에 물을 적셨다. 물이 적당히 차가워서 정신이 슬슬 깨어나기 시작했다.

엘더가 고양이 세수를 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차마 못 깨웠어.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아서.”

“난 원래 죽은 것처럼 자.”

가끔 우리 엄마가 나 진짜 죽은 줄 알고 코밑에 손가락도 대 보더라고. 너무 걱정되어서 중간에 흔들어 깨울 때도 있어. 잠버릇도 없고. 이렇게 바른 사람이야, 내가.

“대단하다, 너도. 민들레 묘목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녀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더라.”

“문득 든 생각인데, 만약 내가 자고 있을 때 위험한 순간이 오면 깨우는 것보다 들고 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난 틀려먹은 인간이니까. 인생의 다짐을 해도 이렇다, 내가. 바른 사람이긴, 개뿔.

아직 잠에서 덜 깨 몽롱한 기분이라 샘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빼면 좀 확 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들다 멀리 민들레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데이지가 보였다. 데이지는 단도를 꺼내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공격 모션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귀엽다. 아이들이 우와, 하고 감탄하며 데이지의 단도를 이리저리 눈으로 쫓았다.

“우리 데이지는 기운도 좋아. 어떻게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잠자기 위해 풀어 놨던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며 솔직하게 감탄했다.

나도 저만할 땐 엄마가 집에 들어오라고 해도 안 갈 정도로 놀이터를 뛰어다녔는데.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도 하고 그랬는데.

높게 묶은 머리를 말꼬리처럼 한 번 흔들어 주고 기지개를 펴는데, 흰빛을 두른 엘더의 손이 이마에 와 닿았다.

“아픈 데는 없는 것 같은데? 기운이 없다고? 어제 폭발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야?”

내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보호를 받았던 내가 설마 다쳤겠니. 설령 다쳤다 하더라도 나는 주삿바늘도 무서워하는 엄살쟁이라 결코 가만히 있진 않았겠지.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 이거지. 이게 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봐.”

바로 위 학번 선배들한테 말하기만 해도 처맞을 소리긴 하지만. 급식 때 체력이랑 학식 때 체력이 같을 리가 없잖아.

“나이는 너보다 메스키트가 훨씬 더 많을 텐데? 메스키트는 어제 밤새 순찰 다녀 놓고 또 나갔어.”

“규격 외 존재를 나한테 들이밀지 마라. 감히 메스키트 님을 나 따위의 비교 대상으로 삼다니!”

앞으로 운동도 하고 좀 그래야겠다. 모처럼 게임 속 세상인데 체력도 본래 나의 것을 들고 와서 골골대고 있다니.

메스키트가 돌아오자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시바삐 군락지를 떠났다. 그리고 내 다짐은 어젯밤의 일찍 기상하기를 오늘 아침에 말아먹은 것처럼 하루도 못 가 패배했다.

통통 튀는 걸음으로 바위 위를 뛰어다니는 데이지와 중갑옷에 방패와 랜스까지 끼고 힘든 기색 없이 성큼성큼 올라가는 메스키트…. 치렁치렁한 옷을 걸치고도 평안한 표정으로 걷는 엘더.

이중 가장 보통인 나는 수십 번의 포기 선언을 곱씹으며 죽을상을 하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엘더가 뒤처져서 걸음을 맞춰 주었다. 내 꼴을 보아하니 힘 빠져서 뒤로 굴러떨어질까 봐….

산 아니라며…. 아니랬잖아. 자고로 평지보다 10미터만 높아도 산이라는 내 주장은 맞았다.

아니 이건 10미터만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의 산들은 그래도 등산객들을 위해 길이라도 닦아 놓지. 여긴 진짜 야생의 산, 아무런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산!

인공적인 설치물이라곤 돌계단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오르막길!

비교적 길이 넓게 트인 곳을 오르고 있었지만, 요령이 없는 나는 자꾸만 신발이 흙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택시 불러 택시.

가던 길에 기다란 나무 막대를 주워 지팡이 삼아 걷던 나는, 그래도 일행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불평 없이 이를 악물고 올랐다.

차라리 이렇게 하염없이 등산만 계속되면 좋겠는데. 정신 놓은 채 앞만 보고 걸으면 되니까. 그런데 앞서간 드루이드가 이 루트를 통하진 않았는지… 불이 자꾸 출몰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등장할 때마다 불길로 덥혀 놔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냥터 다 쓸어 갔다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안 쓸어 가니까 몬스터가 폭젠(갑자기 몬스터가 많이 출현하는 현상) 수준이네요.

땅에서 나타나는 놈은 양반 수준이었다. 이곳의 생태계 최강자는 땅을 노니는 짐승이 아닌 하늘을 누비는 날짐승인지, 하늘에서 불이 날갯짓을 하며 덤벼 왔다.

미친 불이 이젠 날아다닌다고요! 저게 무슨 불이야! 피닉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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